고려대학교가 큰 결정을 했다. 성적 장학금을 없애고 장학금을 가정 형편에 따라 지급한다고 한다. 2분위 이하의 학생들에게는 등록금의 100%를 지급하고 기초수급자나 차상위 계층에게는 교내 근로와 연계해 생활비를 지원한다. 그리고 3분위 이상은 필요에 따라 신청을 하는데 장학위원회의 심사를 거쳐 지급하겠다고 한다. 장학금을 성적이 아닌 가정 형편에 따라 지급하겠다는 고려대의 결정은 옳다. 장학금은 말 그대로 학문을 장려하기 위한 것이지 학문의 성과에 대한 ‘상금’이 아니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이 ‘상금’으로서의 장학금이 집안이 가난한 학생들에게 희망이던 시절이 있었다. 대학에 들어가는 것이 힘들었고, 등록금이 그렇게 비싸지 않고 생활비도 많이 들지 않던 시절의 이야기다. 시골에서 올라와 오로지 공부에만 전념해서 성적을 잘 받으면 장학금을 받던 시절이 ‘전설’처럼 있었다. 단 여기에는 조건이 하나 있다.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다는 조건 말이다.

그 당시에 공부에만 전념할 수 있었던 것은 가난한 집안의 전폭적인 지원 덕이었다. 이 경우 다른 형제들이 ‘희생’되는 경우가 많았다. 또 불법이든 합법이든 과외를 통해 짧은 시간에 어느 정도 큰돈을 받을 수 있었다. 과외 하나 정도면 한 달 생활비는 만들 수 있었다. 방학 때 과외를 좀 더 하면 등록금도 마련할 수 있었다. 이런 ‘조건’에서는 가난한 학생들도 공부에 전념할 수 있었고 성적을 통해 다른 ‘부잣집’ 학생들과 어느 정도는 ‘경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시대는 이미 갔다. 등록금은 더 이상 가난한 집에서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생활비 역시 과거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학생이 돈 들 일이 뭐가 있느냐는 사람들이야말로 세상 물정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다. 숨만 쉬어도 돈이 드는 세상이다. 통신비와 교통비만 해도 10만원이 훌쩍 넘는다. 과외비는 이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

ⓒ박해성 그림

사정이 이렇다 보니 어지간한 집 출신이 아니면 등록금과 생활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할 수밖에 없다. 대부분은 편의점에서부터 호프집 서빙 같은 ‘최저임금’ 알바를 한다. 절대적인 시간을 필요로 하는 노동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이 알바를 하는 만큼 공부할 시간은 절대적으로 줄어든다.

반면 대학에서 학점을 잘 받기 위해 공부에 들여야 하는 시간은 상대적으로 더 늘었다. 과거처럼 도서관에 앉아 책을 파기만 한다고 학점을 잘 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조별 활동이 부쩍 늘었다. 현지 조사나 참여관찰 같은 것을 해야 하는 ‘수행적’인 강의들이다. 학점을 잘 받기 위해 들여야 하는 시간도 절대적으로 늘었다는 말이다.

시간과 공간에 허덕이게 만드는 ‘가난’

학교에서 강의를 할 때마다 이런 구조에서 가난한 집 학생들이 과연 공부에 대한 동기 부여가 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실제로 많은 학생이 공부와 관련해 열패감을 더 느낀다고 토로한다. ‘장학’이 안 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을 고려할 때 고려대의 결정은 원칙적인 ‘장학’의 근본으로 돌아갔다고 할 수 있다. 장학금이 개인의 성취에 대한 상금이 아니라 구조적인 불평등을 조정하며 각자 처한 조건과 상관없이 공부를 장려한다는 의미에서 ‘장학’금의 본래 취지로 돌아간 좋은 시도이자 결정이다. 노동하지 않으면 학교를 다닐 수 없는 학생들에게 공부할 ‘시간’을 돌려준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그러나 고려대의 시도가 개별 대학의 시도를 넘어설 때 좀 더 의미를 지닐 것이다. ‘시간’이 필요한 학생들이 과연 2분위 이하나 차상위 계층이기만 하겠는가. 국가 장학금의 기준은 들쭉날쭉하고 부조리한 경우가 많다. 고려대가 장학금을 상금이 아닌 장학금의 자리로 돌려놓은 이번 시도가 문자 그대로 ‘좋은’ 시도가 되기 위해서는 한 대학의 시도를 넘어서는 대책이 필요하다. 반값 등록금만을 말하는 게 아니다. 과거처럼 대학생에게만 ‘특혜’가 되는 과외 같은 알바가 더 생겨야 한다는 말도 아니다. 최저시급이 올라가고 청년층을 위한 주거대책이 마련되어야 한다. 가난이 곧 시간과 공간에 허덕이게 되는 것인 한 ‘장학’은 불가능하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 시간과 공간을 돌려주는 것, 그것이 곧 ‘장학’의 핵심이다.

기자명 엄기호 (덕성여대 문화인류학 강사)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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