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하고 놀까


7000만 ‘호갱’ 리스트에 이름을 올리며

스트리밍 서비스의 고전적인 문제

 

한산한 휴일 아침. “띠리링.” 스마트폰 문자메시지 알림이 울렸다. ‘〈해외승인〉 USD 9.99 NETFLIX’ 아차 싶었다. 신용카드에서 1만2000원이 ‘쓱’ 빠져나갔다. 한 달짜리 무료 이벤트가 끝나자마자, 리드 헤이스팅스(넷플릭스 창업주)는 내 통장 잔고에 마수를 뻗쳤다. 문자를 받아든 그 순간, 침대 한편에서는 아이패드를 통해 〈나르코스〉 2편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뭐, 1만2000원 정도라면 괜찮잖아.” 스마트폰을 던져둔 채, 다시 이불 속으로 기어 들어가며 이렇게 스스로를 위로했다. 전 세계 7000만 넷플릭스 호갱 리스트에 이름을 올린 순간이었다.

5㎡. 내가 살고 있는 ‘방’이라는 공간의 크기다. 비좁은 방에 겨우 모셔둔 23인치짜리 텔레비전 모니터(TV와 PC 모니터 겸용 제품)는 정작 TV 기능을 쓸 수 없었다. 누가 대한민국에는 난시청 지역이 없다고 했던가. 서울시 산동네 주택가는 안테나를 창밖으로 뻗어도 지상파 디지털 신호가 잡히지 않았다.

어차피 상관없다. 미디어를 찾는 생활습관 전체가 뒤바뀌었다. 방송 프로그램을 인터넷으로 찾아보면 된다. 〈디즈니 만화동산〉을 놓치지 않으려 ‘엄마 아빠 늦잠 자는 일요일 아침’ 일찍부터 깨어났던 그 열정은, 그저 유튜브 덕질로 이어졌을 뿐이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코드 커팅족’이 되었고, 방구석 TV 모니터는 ‘티빙스틱’이라는 OTT(Over-The-Top:인터넷을 통해 방송을 보는 서비스) 기기를 꽂은 채 가끔 무료 뉴스 채널인 YTN만 틀어둘 뿐이다(지상파 방송은 ‘티빙스틱’으로 볼 수 없다).

ⓒ시사IN 신선영넷플릭스가 직접 제작하고 발표하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는 넷플릭스의 강점이다.

넷플릭스는 이 와중에 정식으로 한국에 서비스를 시작했다. 사실 처음에는 시큰둥했다. 기대했던 것보다 서비스되는 동영상 수가 적었다. 한물간 영화나 드라마 시리즈뿐이었다. 한국 영화나 TV 시리즈도 찾기 어려웠다. “이제 모든 미드를 넷플릭스로 볼 수 있을 거야”라던 기대는 실망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이런저런 영상을 찾다 보니 나름 괜찮은 영상이 많았다. 가장 감탄한 프로그램은 넷플릭스가 직접 제작하고 발표하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다. VOD 사업자였던 넷플릭스가 직접 돈을 투자해 만든 ‘미드’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마블 히어로들이 서로 영향을 끼치는 세계관. 쉽게 말해 ‘어벤져스’ 시리즈의 일부인 셈이다)의 일부인 〈데어데블〉이나 〈제시카 존스〉는 꽤 만족스러웠다. 특히 〈제시카 존스〉는 괜히 로튼 토마토(미국 영화·TV 드라마 비평 사이트)에서 호평을 받은 게 아니었다. 부수고 깨뜨리는 호쾌한 마블 히어로 영화를 떠올리면 곤란하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시달리는 주인공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조종할 수 있는 악당을 상대하는 이 드라마는 그 자체로 꽤 매끈한 사이코 무비다.

콜롬비아 마약왕 파블로 에스코르바를 다룬 〈나르코스〉도 명작이다. 광고 매출을 신경 쓰는 TV 드라마가 ‘온 가족이 함께 보는 프로그램’이라는 걸 감안하고 만들 때, 넷플릭스 드라마는 오직 장르 특성에 집중한다. 〈센스 8〉을 만든 워쇼스키 남매(〈매트릭스〉 감독)나 〈하우스 오브 카드〉를 공동 연출한 데이비드 핀처(〈파이트클럽〉 〈소셜 네트워크〉 감독)처럼 색깔 있는 유명 영화감독이 직접 만든 드라마는 넷플릭스의 강점이다. 게다가 자체 제작한 시리즈는 TV처럼 오랜 기간 방영하는 게 아니라, 한꺼번에 시즌을 통으로 업로드한다. 10시간 넘는 영상을 ‘정주행하는 즐거움’은 설 연휴를 풍족하게 만들었다.

게으른 공급자는 살아남을 수 없는 세상

넷플릭스가 워낙 유명한 탓에, 정식 서비스 전부터 유사 서비스가 많았다. 통신3사 IPTV 서비스는 모바일 상품을 내놓았고, 티빙이나 푹(pooq) 같은 N스크린(언제나, 어디서나, 어떤 기기를 통해서나 같은 영상을 볼 수 있는 통합 플랫폼을 이르는 말) 서비스는 이미 한국에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넷플릭스가 지니는 이점은 깔끔한 인터페이스와 빅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추천 서비스’에 있다. IPTV처럼 방송을 틀 때마다 잡다한 광고가 나오는 것도 아니고 스마트폰·태블릿·노트북을 오가며 영상을 이어서 볼 수 있다. 내가 좋아하는 프로그램을 알아서 추천해주는 알고리즘은 사람을 점점 게으르게(?) 만든다. “추천해주고 있으니 내 취향에 맞겠지” 싶어 재생 버튼을 누르면, 덕질은 파도치듯 일렁거리며 넓게 뻗어나간다. 한 통신사에서 ‘콘텐츠 연구소’라며 광고하는 이 알고리즘 기능을 넷플릭스는 이미 수년 전부터 수천만명의 사용자 데이터를 기준으로 제공해왔다. 자연히 취향 저격의 명중률에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넷플릭스에 대처하는 한국 (대기업) 사업자들의 반응은 어떨까. 초반 반응은 기시감을 유발했다. 몇 년 전 아이폰이 처음 한국에 소개되었을 때, ‘옴XX’라는 괴상한 스마트폰을 만들어낸 한 업체의 광고를 보는 것 같았다. 사람들은 IPTV 통신사 서버에 데이터가 많다고 지갑을 여는 게 아니다. 같은 1만2000원이더라도 케이블 회선을 깔기엔 아깝고, 넷플릭스를 결제하기에는 부담이 적게 만드는 것은 오롯이 서비스의 차이다. 광고를 보지 않고도 쉽고 빠르게 영상을 넘나들 수 있다는 ‘사용성’ 장점이 없었다면, 넷플릭스도 그저 호기심에 한번 들여다보는 걸로 그쳤을 것이다.

공룡 IPTV 대기업이 회선 관리와 동네 점유에 힘쓰는 동안 스타트업의 ‘알고리즘’은 세상을 바꾸고 있다. 아이폰이 스마트폰 지형을 넓히고, 이케아가 쓸 만한 토종 가구 브랜드의 가격을 낮춘 것처럼, 넷플릭스도 덕질의 편의를 늘리고 있다.

당장 다음 달에도 여전히 9.99달러를 내고 있으리라고 장담하기는 어렵다. 케이블TV처럼 2~3년 장기 약정을 맺는 것도 아니니까. 넷플릭스가 필요 없어진다면, 당장 끊어버리면 그만이다. 그렇게 덕후는 세상을 반 발자국 앞당긴다. 게으른 공급자는 살아남을 수 없는 세상을 자연스럽게 만들기 때문이다.

기자명 중림동 새우젓 (팀명)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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