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아빠가 누군가에게 ‘빙의’가 돼볼까 해. 아빠의 말투가 아니라 역사 속 누군가의 입장과 어조를 빌려보고자 한다는 뜻이야. 그 사람이 누구냐고? 고구려 시대 평강공주야. 뒤의 이야기는 ‘빙의’돼 떠드는 것이므로 객관적 사실에 더하여 아빠의 주관적 생각이나 짐작도 들어가 있다는 걸 미리 얘기해두마.

나는 너희가 평강공주라고 부르는 사람이다. 단군 이래 4000년 역사에 나만큼 유명한 공주도 없으리라.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나는 바보 온달의 아내였다. 그런데 혹시 너희 가운데 김부식이라는 자가 〈삼국사기〉에 쓴 것을 곧이곧대로 믿는 자가 있느냐? 내가 어릴 적 하도 울어대어 부왕이 자꾸 울면 온달에게 시집보내겠다고 하였는데 장성한 다음 모모한 귀족에게 시집보내려 하자 “아버지가 온달에게 시집보낸다고 했는데 어찌 말을 어기십니까” 따지고 들어 끝내 바보를 남편으로 맞았다는 이야기. 그건 사실이 아니다.

온달은 바보가 아니었다. 단지 평민 집안의 사내였을 뿐이다. 나는 우연한 기회에 그를 만나 사랑에 빠졌고 그 아니면 누구와도 혼인하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던 것이다. 부왕은 나를 때려죽일 듯 분노했고 후일의 영류왕 건무(建武) 오라버니는 온달을 죽이겠다고 설쳐댔으며 뒷날 영양왕이 되는 맏오빠 원(元)은 내 앞에서 무릎까지 꿇어가며 만류했다. “너는 상부(上部)의 고씨에게 시집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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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너희도 알다시피 사랑에 빠진 여자는 황소보다 억센 법이다. 끝끝내 내가 고집을 꺾지 않자 부왕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자식 이기는 부모가 어디 있겠느냐. 궁을 나가라. 온달과 혼인하여 평민으로 살거라. 너는 내 딸이되 공주일 수 없다.” 아버지의 얼굴은 어두웠다. 패물을 챙겨 궁궐을 나가던 날 안학궁 처마 아래에서 오래도록 밤하늘을 쳐다보던 아버지의 표정은 보이지 않았으나 알 수 있었다. 나도 눈물을 흘리며 궁궐을 나갔다.

내 결혼은 온 고구려의 화제였다. 나를 며느리로 삼으려던 상부 고씨 집안은 말할 것도 없고 귀족들 태반은 혀를 차며 나를 미쳤다고 욕했다. 온달은 ‘바보 온달’로 부여성(고구려 북쪽의 성)에서 한성(황해도 재령에 있던 고구려 남쪽의 성)까지 유명해졌다. “바보가 공주를 얻었다네.”

온달조차도 나를 버거워했다. 온달의 어머니는 내 손을 잡으며 “귀하신 분이 있을 집이 아닙니다”라고 나를 돌려보내려 갖은 애를 썼다. 그러나 그럴수록 나는 이를 악물었다. 내가 선택한 사람이 결코 바보도 아니었거니와 거들먹거리는 재주 외에는 없는 유약한 귀족의 아내로 평생을 보내느니 내가 선택한 남자를 어떻게든 가다듬고 변화시켜 보란 듯이 세상에 내세우고 싶었다. 그리고 온달도 내 노력에 따라주었다.

마침내 어느 해 3월 삼짇날 고구려의 풍습대로 낙랑의 벌판에서 부왕 이하 5부의 귀족들과 무사들이 모두 참가한 사냥 대회가 열렸을 때 온달은 단연 두각을 드러냈다. 부왕이 그의 이름을 물으실 만큼. “온달입니다.” 그리고 온달은 덧붙였다. “공주와 함께 살고 있습니다.” 이미 온달은 웬만한 귀족 나부랭이보다 훨씬 글도 잘 짓고 무술도 뛰어난 장재(將材:장군의 재목)로 성장해 있었지만 귀족들에게는 그저 ‘바보 온달’ ‘천치 온달’로 통했다. 그들은 온달이 그들의 동렬에 선다는 것 자체를 참을 수 없었다.

후주의 무제가 요동으로 쳐들어왔을 때, 온달은 적진으로 뛰어들어 수십명을 쓰러뜨렸고 이에 힘을 얻은 고구려군은 돌격을 감행하여 후주 군대를 물리쳤다. 사냥 대회에서도 ‘기특하게’ 여길 뿐 사위로 인정하지 않으셨던(또는 귀족들 눈치 보느라 인정하지 못하셨던) 아버지의 얼굴도 환하게 피어났다. 그래도 못마땅해하는 귀족들 앞에서 부왕은 선언했다. “이 사람은 나의 사위다.”

하지만 온달은 여전히 ‘바보’로 불렸다. 온달은 그 경멸과 질시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을 다해야 했다. 온달은 무던한 사람이었다. 노골적인 또는 은연중의 경멸과 무시를 웃으며 받아넘겼고 꿋꿋이 참아냈다. 하지만 그도 사람이었다.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공을 세워 바보 딱지 떼고 왕실의 일원으로 떳떳이 서겠노라는 강박을 갖고 있었다. 그 강박이 빚은 것이 신라 공격이었다.

데릴사위제 성행한 고구려에서도 없었던 일

“죽령 이북 땅을 되찾지 못하면 돌아오지 않겠소.” 출전하는 온달은 이렇게 말했다. 서토(西土:중국)의 정세가 불안해 주력군은 요동에 집결해 있었다. 반면 온달이 이끄는 군대는 허약했다. 걱정하는 내게 그는 이렇게 오금을 박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승리하면 바보 소리를 떼지 않겠소?” 그때 나는 절감했다. 이 사람이 얼마나 한이 맺혀 있었던가를. 공주를 사랑한 대가가 그에게 얼마나 큰 짐이었던가를. 달포 뒤 신라군의 화살에 맞아 죽었을 때 한달음에 달려간 내 앞에서 온달은 두 눈 부릅뜨고 죽어 있었다.

그의 관을 옮기는 과정은 무척 힘겨웠다. 까닭 없이 마차 바퀴가 부러지거나 말 다리가 꺾이거나. 사람들이 온달의 한(恨) 때문이라 수군거렸고 나는 관 앞에 나아갔다. 그리고 관을 어루만지면서 이를 악물고 말했다. “생사가 이미 정해졌으니…” 오만 가지 생각이 머리를 때렸다. 나 때문에 그가 이렇게 죽은 것이 아닐까. 내가 차라리 그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는 비슷한 신분의 색시를 맞아 해로할 수 있었는데. 그를 그리도 힘들게 살게 하고 이렇게 허무하게 죽인 것은 결국 공주라는 내 신분 탓이 아니었을까. “그만 돌아가십시다.”

사람 사이의 귀천은 하늘이 낸 것이라는 믿음이 지배하던 나라에서 나와 온달은 별종이었다. 온달은 바보가 됐고 나는 정신 나간 공주가 됐다. 그 모멸을 떨쳐보려고 발버둥 쳤으나 우리의 사랑은 비극으로 끝났다. 나의 시절로부터 무려 1500년이 흐른 너희 시대에는 만인이 평등하다는 원칙이 빛난다고 들었다. 너희 헌법으로도 “사회적 특수계급제도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어떠한 형태로도 이를 창설할 수 없다”(제11조 2항)라고 못 박고 있다고 안다. 그러나 얼마 전 나는 나의 살아생전 모습을 보는 듯한 이른바 ‘재벌 가문’의 이야기에 망연자실하고 말았다.

사랑이야 죽 같은 것이니 끓을 수도 있고 식을 수도 있다. 나도 온달이 꼴 보기 싫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 하지만 적어도 너희 대에서는 신분이 다르다고 하여 한쪽이 바보가 되거나 차별을 받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느냐. 어떤 대단한 가문에 장가든 온달 같은 이가 파경 교섭을 앞두고 “저희 아버님을 비롯한 저희 집안 대부분 식구들은 저희 아들이 태어나서 면접교섭 허가를 받기 전, 2007년부터 2015년 9살이 될 때까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라고 토로하는 것을 보고 내 귀를 의심했다. 데릴사위제가 성행한 우리 고구려에서도 그런 일은 듣도 보도 못했을뿐더러, 나와 온달 사이의 아이를 시어머니가 보지 못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어려운 일이다. 얼마나 대단한 가문이기에 옛 왕가도 어쩌지 못했던 천륜을 그 지경으로 틀어막는단 말이냐. 사실이 아니리라.

평강공주 아닌 온달의 아내로서 너희에게 당부한다. 잘난 사람과 못난 사람이 어찌 없으며 출중한 사람과 용렬한 사람이 왜 차이가 없겠느냐. 그들의 삶이 어찌 동일할 수 있겠느냐. 그러나 그 차이가 차별로 굳어져 한 사람으로서가 아닌 집단으로 평가되고 특권과 의무가 분리되고 일방적으로 부여될 때, 그리하여 인간의 존엄함이 소수에게만 적용될 때 비극은 싹트고 자라 암울한 꽃봉오리로 세상을 덮는 법이다. 내 남편 온달은 바보가 아니었다.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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