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시스KBS 정연주 사장(왼쪽)을 해임하고 낙하산 사장을 선임하려는 움직임이 속도를 낸다.
요즘 여의도에 블록버스터급 호러 영화 시나리오가 한 편 돌아다닌다. ‘공정 방송 죽이기’라는 가제가 붙은 이 시나리오는 청와대가 기획하고 방송통신위원회가 연출하고 한나라당이 영화로 제작할 예정이다. 방송가에서는 누가 다음 KBS 사장으로 내정되었는지, 이미 캐스팅까지 완료되었다는 얘기가 나온다.

이 납량 특집 공포영화가 현실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 7월24일, 민언련·언론노조·언론연대 등이 주축이 되어 긴급히 ‘방송장악 네티즌 탄압저지 범국민행동(범국민행동)’을 결성했다. 광우병국민대책회의를 계승한 범국민행동은 촛불의 힘으로 정권의 방송 장악을 막겠다며 본격 활동에 들어갔다. 7월24일까지 536개 단체가 가입해 힘을 보탰다.

그런데 범국민행동에 참여한 단체 중에 언론노조 KBS본부는 없었다. KBS 부산지부는 있었지만 정작 KBS본부는 없었다. 7월22일 범국민행동 결성 선포 기자회견, 7월23일 KBS 이사회 저지 기자회견, 7월24일 범국민행동 발족식, 7월25일 촛불문화제까지 4일 연속 KBS 본관 앞에서 시민사회 단체와 촛불 시민이 KBS를 지켜주겠다고 모였지만 정작 KBS 노조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7월23일 KBS 밖에서 범국민행동 집행부와 시민이 신태섭 이사를 불법 해임한 이사회를 비난하는 기자회견을 열고, KBS 안에서 KBS 기자협회·KBS PD협회 등 7개 직능단체가 이사회를 저지하기 위해서 행동에 나설 때, KBS 노조는 ‘사장추천위원회(사추위) 구성안’을 설명하는 기자회견을 열어 정연주 사장 퇴진을 기정사실화했다. 이 자리에서는 신태섭 이사 해임의 정당성을 알리는 자료도 배포되었다. 

이런 KBS 노조의 행태에 대해 공식 언급을 삼가는 범국민행동과 달리 시민은 이미 KBS 노조를 ‘어용노조’로 규정하고 강하게 비난한다. 범국민행동 발족식에서 마이크를 잡은 누리꾼 ‘권태로운 창’은 시민과 함께 “어용노조 물러가라”고 연호하며 비난했다.

노조가 중심을 잡아주지 못하면서, 내부의 결속도 현저히 떨어진 상황이다. 밖에서는 정부가 방송 장악, 특히 KBS 장악 시도를 본격화 했다며 단체를 결성하고 촛불을 들었지만 안에서는 미온적인 움직임만 감지된다. 이사회 저지를 위해 7개 직능단체에서 직원이 왔지만 40명 내외였고 KBS 앞에서 개최된 행사에도 채 20명도 참석하지 않았다. ‘권태로운 창’은 “왜 국민이 지켜주겠다고 왔는데 KBS 안에서 박수치는 사람이 없는지 모르겠다”라고 푸념했다.

KBS 노조가 오히려 걸림

KBS에 구전되는 말 중에 “KBS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라는 농담이 있다. ‘3분의 1은 열심히 놀고, 3분의 1은 남이 일하는 것을 방해하고 (그래서 노는 사람만 못하고), 그리고 나머지 3분의 1만 일한다’는 것이다. KBS의 방만한 경영을 비꼰 농담인데, 요즘 이 농담이 바뀌었다.

정부가 낙하산 사장을 보내 KBS 장악을 본격화하는 데 대한 반응이 세 가지로 갈린다는 것이다. ‘3분의 1은 방관하고, 3분의 1은 KBS 장악을 돕고 (그래서 방관하는 사람만 못하고), 3분의 1만 KBS 독립을 위해서 싸운다’는 것이다. KBS의 한 PD는 “국민이 지켜주겠다고 촛불을 켜는데 성문 열어줄 날만 손꼽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도 너무 많다”라고 말했다. 

노조 출범 때부터 정연주 사장 퇴진을 주장했던 KBS 노조는 요즘 정연주 사장이 식물 사장이 되었다고 비꼰다. 경험해보니 사실이었다. 이미 KBS 내부는 이사회가 ‘평정’한 상태였다. 이사회를 취재하려던 기자들은 입구에서 취재를 거부당하고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출입기자만 허용). 안전 담당자는 취재 봉쇄가 이사회의 조처라고 설명했다.

범국민행동 발족식을 비롯해 언론노조 등 언론단체가 KBS 앞에서 행사를 하려 할 때마다 경찰의 원천봉쇄로 애를 먹는다. 도로가 아닌 KBS 현관 앞에서 하는 행사이기 때문에 KBS 측의 시설보호 요청이 있어야 경찰이 막을 수 있다. 요즘은 KBS 직원이 직접 나와 KBS 사장을 지켜주겠다는 집회 참가자와 몸싸움과 언쟁을 벌인다. 그들은 이미 사장 편이 아니었다. 정권에 공영방송 KBS의 성문을 열어주려는 움직임은 KBS를 지켜내려는 움직임보다 더 크고 조직적이었다.

이런 줄서기와 함께 혈기방장한 젊은 기자와 PD를 절망시키는 또 하나의 벽은 구성원의 ‘복지부동’ 자세다. 입사 8년차 한 PD는 “정연주 사장이 해임되든 안 되든, 낙하산 사장이 내려오든 안 오든 나는 상관없다”라는 냉소주의가 가장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 PD는 선배들의 각성을 촉구하며 자기 블로그에 독일의 신학자 마르틴 니묄러의 시를 올려놓았다. 그는 이 시가 KBS 직원의 운명이 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나치는 우선 공산당을 숙청했다. 나는 공산당원이 아니었으므로 침묵했다. / 그 다음엔 유대인을 숙청했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었으므로 침묵했다. / 그 다음엔 노동조합원을 숙청했다.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므로 침묵했다. / 그 다음엔 가톨릭교도를 숙청했다. 나는 개신교도였으므로 침묵했다. / 그 다음엔 나에게 왔다. 그 순간에 이르자, 나서줄 사람이 아무도 남지 않았다.

ⓒ시사IN 안희태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를 위해 촛불을 들었던 시민이 ‘방송 장악 저지’를 위해 다시 촛불을 들었다.
KBS 노조가 다른 태도를 취하고 있어서 내부 결속이 안 되는 것과 함께 외부와의 연대가 안 된다는 것도 큰 문제다. 특히 상급 단체인 언론노조와의 갈등은 극에 달했다. KBS 노조는 7월21일자 노보 특보에서 “단순무식한 언론노조 위원장, 규약 무시하고 임의로 지·본부 대의원 축소”라는 기사를 내보냈다. 언론노조가 KBS본부 대의원 수를 54명에서 18명으로 줄였다고 맹비난하며 사실상 결별선언을 했다.
언론운동 단체 사이의 결속력도 좋지 않은 상태라 더욱 힘든 상황이다. 광우병국민대책회의 당시 역할을 놓고 주도하는 단체와 그렇지 못한 단체 사이에 알력이 있었다. 이 앙금이 아직까지 남아 결속을 저해한다. 범국민행동을 출범시키는 과정에서도 이런 내홍 때문에 실무자는 많은 난관을 극복해야 했다.

여름휴가와 올림픽에 이슈 묻힐 수도

이런 상황에서 ‘KBS 독립’을 지키기 위해 마지막으로 의지할 곳은 바로 촛불을 든 국민이다. 그러나 이마저도 여의치가 않은 상황이다. 7월5일 평화대행진 이후 사그라든 촛불은 ‘독도 영토 분쟁’이 터지고 주력 부대가 일본 대사관으로 향하면서 방향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범국민행동이 집중 행동을 하는 동안 계속 비가 내려서 참여자는 100여 명 내외였다.  
범국민행동 측은 이때 정부가 정연주 사장 해임과 낙하산 사장 임명을 밀어붙일 것이라고 염려한다. 본격 휴가철인 7월 마지막 주와 8월 첫째 주에 KBS 이사회가 임시 이사회를 소집해 정 사장 해임 문제를 안건으로 상정하리라 짐작한다. 그리고 베이징 올림픽 개막식 전후로 해임안을 처리해 KBS 문제가 올림픽 이슈에 묻히도록 할 것으로 예상한다.

KBS 노조위원장을 지낸 현상윤 PD는 ‘공정 방송 죽이기’ 시나리오가 3부작 대하 드라마로 진행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1단계는 정연주 사장에 대한 해임안 처리다. 8월15일을 전후로 예상한다. 2단계는 낙하산 사장 투입이다. 누가 내려올지까지 이미 얘기가 끝난 것으로 안다. 3단계는 ‘국가기간방송법’ 제정이다. 이 과정을 거치면 KBS는 공영방송으로서 기능을 거의 상실하고 정권에 편향된 방송이 될 것이다”라고 예상했다. 
PD연합회 최용수 정책실장은 이를 위한 사전 정지 작업이 이미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분석했다. “검찰이 기어이 정연주 사장을 불구속 기소했다. 앞으로 감사원이 감사 결과를 발표하고 해임 의견을 낼 것이다. 방송통신위원회가 적자 문제 등을 지적하고 이사회는 이런 문제에 대한 책임을 물어 대통령에게 정 사장 해임을 건의할 것이다”라고 예상했다. 

이미 박재완 청와대 국정기획수석은 “KBS 사장은 정부 산하기관장으로서 새 정부의 국정 철학과 기조를 적극적으로 구현하려는 의지가 있어야 하고 재신임 절차가 필요하다”라고 말했다. 신재민 문화관광부 제2차관도 “KBS 사장의 임명권은 물론 해임권도 대통령에게 있다”라며 KBS 정연주 사장 교체 의지를 천명했다. 이는 현행법에도 어긋나는 주장으로 이에 대해 진보신당 심상정 대표는 “이명박 정부는 법도 논리도 양심도 윤리도 없는 ‘뺑소니 정권’이다”라고 비난했다.
 

ⓒ시사IN 윤무영YTN·KBS 장악 움직임이 보이자 언론 관련 시민단체는 ‘방송 장악·네티즌 탄압 저지 범국민행동’을 조직하고 적극 행동에 나섰다. 위는 방송 장악 저지 투쟁을 하는 언론노조.
KBS 독립을 지키려는 언론운동 단체 관계자를 가장 당혹스럽게 만든 것은 이런 일련의 언론 장악 시도가 상당히 가파르게 진행된다는 점이다. 해임된 신태섭 전 이사는 “최시중 방송통신위원장이 정연주 사장 해임을 요구했을 때 김금수 이사장이 최 위원장에게 역제안을 했다. 수신료 인상, 민영화 반대, 정치독립성 보장 장치를 마련해서 정 사장의 퇴로를 열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거절당했다”라고 말했다.

‘공정방송 죽이기’가 현실화할 때 주목해야 할 부분은 조연의 활약이다. 사추위를 구성하고 정연주 사장 퇴진을 기정사실화한 KBS 노조가 앞으로 어떤 구실을 할지, 역시 정 사장에게 “후안무치한 버티기를 그만하고 나가라”고 비난하는 제2노조 KBS 공정방송노동조합이 어떤 구실을 할지 주목된다. 사장 내정자로 지목되는 인물과 교감하는 것으로 알려진 ‘수요회’ 등 사조직의 움직임도 역시 관심거리다.

사장 바뀌면 법 개정까지 일사천리로

범국민행동에서는 정연주 사장 해임과 새로운 낙하산 사장 임명 과정에 여러 가지 불법·편법이 있으리라 예상한다. 신태섭 전 이사는 “해임과 임명 과정에서 위법 내용을 지적하는 소송을 내더라도 정부는 개의치 않고 진행할 것이다. 일단 임명하고 나면 소송에서 진다고 해도 되돌리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염려했다.  

현실적으로 정부가 무도하게 KBS 장악을 시도하더라도 이를 막을 제도적 장치가 거의 없다는 것이다. 범국민행동 성유보 집행위원장은 “지금 KBS에서 벌어지는 상황은 우리의 민주화가 얼마나 취약했느냐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민주주의를 지킬 수 있는 제도 마련이 부족했다”라고 말했다.
이런 정부의 ‘공정방송 죽이기’ 시나리오에 대응하기 위해 현재 논의되는 대응 시나리오는 먼저 걸림돌인 KBS 노조를 제압하는 것이다. 언론노조가 KBS 노조를 제명하고 비대위 체제로 전환해 내부 역량을 모으고 외부 연대를 강화해 대응한다는 복안이다. 그러나 이런 계획이 실현될 경우 적지 않은 파장이 예상된다. 

범국민행동은 정 사장 해임안과 낙하산 사장 임명안이 처리될 올여름과 함께 국회에서 관련 법률이 처리될 12월을 가장 걱정한다. 11월에 KBS 노조위원장 선거가 있어서 이때 힘의 공백기가 생기는데 이 시기에 법률안 처리가 이뤄진다면 맞대응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법률안 개정과 관련해서는 정부가 예산 편성권을 가진 ‘NHK 모형’으로 국가기간방송법을 개정할 것이라는 예상이 나온다. 돈줄을 틀어쥐어 방송 논조를 통제하리라는 것이다. 현상윤 PD는 “총파업을 통해서라도 막아야 하는 상황이 발생할 것이다. 그러나 그때 막을 수 있을지는 현재로서는 장담할 수 없다”라고 말했다.

정연주 사장이 해임되고 새로 낙하산 사장이 오고 관련 방송법이 개정되는 동안 KBS는 어떤 일을 겪게 될까? 범국민행동 집회 현장에서 만난 한 중견 PD는 “우리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겪게 될 것 같다. 구조조정을 통한 길들이기까지 할 것이 분명하다”라고 말했다. 여러 번 연락을 시도했지만 계속 공식 인터뷰를 거부한 정연주 사장은 “역사에 대한 낙관을 버리지 맙시다”라는 문자를 보내왔다. 촛불은 과연 KBS를 지켜줄 수 있을까?

기자명 고재열 기자 다른기사 보기 scoop@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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