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사우디아라비아 관계는 가치가 아니라 손익계산에 근거한 것이다. 가치 측면으로 본다면 양국은 애초에 상호 관계를 맺을 수 없었다.” 걸프전 발발 등 격동기에 해당하는 1989년부터 1992년까지 사우디아라비아 대사를 지낸 전직 미국 외교관 찰스 프리먼이 최근 언론에 고백한 말이다. 미국은 1933년 사우디와 국교를 맺은 뒤 오랜 세월 밀월 관계를 유지해왔다. 원유의 안정적 공급이 필요한 미국과 주위의 적대세력으로부터 미국의 든든한 방어벽이 필요한 사우디 양국의 상호 이익이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런 두 나라가 지금은 매우 서먹서먹한 관계로 돌아선 상태다. 특히 지난해 7월 미국이 앙숙인 이란과 핵 협정을 타결한 데 이어 최근 경제제재까지 해제하면서 돈독했던 양국 관계가 근본적인 전환점을 맞이한 게 아니냐는 관측이 무성하다. 〈뉴욕 타임스〉는 “오늘날 미국의 원유(셰일오일) 생산이 급증하고 사우디의 지도력이 깨지면서 1930년대부터 계속된 양국의 상호 의존이 더는 예전 같지 않다”라고 밝혔다.

ⓒAP Photo1월23일 존 케리 미국 국무장관(왼쪽)과 아델 알주베이르 사우디 외무장관이 기자회견을 열었다.

미국과 사우디의 관계가 요즘 들어 갑자기 시들해진 것은 물론 아니다. 프리먼 전 대사도 “양국 관계는 오랫동안 악화 일로였고, 이는 오바마 행정부가 출범하기 훨씬 전에 시작됐다”라고 말했다. 오바마 행정부가 출범한 2009년 이전에 이미 양국 관계가 악화되어 있었다는 의미다. 이와 관련해 외교 전문가들은 사우디가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반대했을 때부터 양국 관계가 틀어지기 시작한 것으로 본다. 사우디는, 미국이 아랍 지역에서만은 억압적이지만 안정적으로 국내외 질서를 유지할 수 있는 정권을 계속 지원해주길 바랐다. 하지만 이런 바람은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해 사담 후세인을 제거하면서 무산됐다. 2011년 봄 이른바 ‘아랍의 봄’이 아랍 세계를 강타했을 때도 미국은 사우디의 강한 반대를 물리치고 이집트의 독재자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다. 이런 불화가 차곡차곡 쌓이다가 최근 미국·이란 간 관계 개선을 계기로 사우디의 불만이 폭발한 것이다.

이슬람 수니파인 사우디는 미국과 손잡고 시아파 종주국인 이란을 견제해왔다. 미국과 사우디의 ‘이란 봉쇄전략’은, 2006년 이후 핵 개발 의혹이라는 명분으로 유엔과 유럽연합 차원에서 대(對)이란 경제제재를 이끌어내는 성과(?)를 거두었다. 미국은 이보다 훨씬 전인 1995년부터 이란에 대해 각종 경제제재를 취해온 터였다. 하지만 2013년 3월 개시된 미국과 이란의 핵 협상이 지난해 7월 타결되면서 사우디의 불만은 극에 달했다. 사우디는 이란과 핵 협상에 나선 미국과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하게 됐다. 실제로 사우디 고위 관리들은 워싱턴을 방문할 때마다 ‘동맹국 미국’에 대한 의구심을 공개적으로 표출했다.

이런 와중에 미국·사우디 관계의 현주소를 단적으로 보여준 사건이 바로 새해 벽두 사우디가 강행한 시아파 성직자 처형이다. 문제의 성직자는 사우디의 대표적인 반체제 인사인 셰이크 님르 바르크 알님르. 그는 시아파 교도들이 집중적으로 거주하는 사우디 동부 지역의 분리를 공개적으로 요구해오다 수감된 바 있다. 미국은 알님르를 처형할 경우 중동 정세가 더욱 불안해질 것이라며 반대 의견을 밝혔다. 하지만 사우디는 미국의 경고를 의도적으로 무시해버렸다.

알님르 처형 소식에 이란의 성난 군중이 테헤란 주재 사우디 대사관을 방화하자 사우디는 즉각 이란과 국교 단절 조치를 단행했다. 이렇게 긴장이 고조된 상황에서 미국은 이례적으로 이란은 물론 사우디에도 자제를 촉구했다. 이 같은 미국의 중립적 태도는 과거 같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다. 특히 최근 이란 측에 미국 해군 10명이 나포되는 사태가 터지자, 미국 케리 국무장관이 이란 외무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하루 만에 해결하기도 했다. 존스홉킨스 대학 국제대학원(SAIS)의 발리 나스르 원장은 외교 전문지 〈포린 폴리시〉의 인터뷰에서 “미국 국무장관이 휴대전화로 이란 외무장관과 이야기를 나누게 된 세상을 사우디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라고 지적했다.

ⓒEPA알님르(포스터 속 인물)의 처형에 항의하는 이란 시위대가 1월3일 사우디 대사관 앞에 모여 있다.

미국 중앙정보국과 사우디의 ‘뽕나무 작전’

사우디는 이런 미국에 행동으로 반감을 표시했다. 실제로 알님르 처형 건과 관련, 사우디와 이란의 긴장이 고조됐을 때 아델 알주베이르 사우디 외무장관은 케리 미국 국무장관의 전화를 하루가 지나도록 받지 않았다. 그뿐인가. 사우디의 이웃 국가인 예멘 내전과 관련, 미국은 사우디의 개입이 오히려 사태 해결을 복잡하게 만든다며 평화협상 동참을 요구했지만 거부당했다. 사우디는 이란이 예멘의 시아파 반군 후티족을 지원하자 집권 수니파 하디 정부를 지원하겠다며 9개의 수니파 아랍 국가들과 함께 2015년 3월부터 공식으로 내전에 개입한 상태다. 설상가상으로 미국은 시리아와 이라크에 활동 거점을 둔 이슬람국가(IS)에 맞서 사우디가 좀 더 적극 동참해줄 것을 요청했지만 사우디는 예멘 내전 참전을 이유로 시큰둥한 반응이다. 미국 외교협회 중동 전문가인 레이 타키 선임연구원은 “사우디가 더 이상 미국과의 동맹에 연연해하지 않고 자국의 힘에 의존하기 시작했다”라고 지적한다.

문제는 미국 역시 사우디에 예전만큼 연연해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미국은 오늘날 셰일오일 생산 덕에 세계 유수의 산유국으로 떠오른 데다 에너지 자립도가 과거 어느 때보다 높다. 게다가 중동 평화의 직접적 위협인 이란의 핵 개발 노력을 최근 협상으로 무산시켰다. 이에 따라 미국은 국익 차원에서도 사우디보다 이란을 더 챙겨야 할 처지다.

다만 미국·사우디 관계가 파국으로 치달을 가능성은 크지 않다. 양국은 석유 이외에도 시리아 내전, 테러리즘, 중동 평화 등 안보적 측면에서 상대국의 도움이 여전히 필요하기 때문이다. 단적인 실례가 1월23일자 〈뉴욕 타임스〉를 통해 폭로된 미국 중앙정보국(CIA)과 사우디 간의 오랜 유착 관계다. 보도에 따르면 CIA는 2013년 오바마 대통령의 승인 아래 사우디와 손잡고 시리아 알아사드 정권에 맞서 싸우는 반군을 지원하기 시작했고, 이런 협력관계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일명 ‘뽕나무 작전’이라는 암호명 아래 사우디는 반군에 군수물자와 자금을 대고, CIA가 훈련을 맡는 역할 분담 방식이다. 사우디가 지금껏 시리아 반군의 무장과 훈련을 위해 지불한 액수는 수십억 달러로 추정된다. 이처럼 양측의 협력관계는 뿌리가 깊다. 사우디는 지난 1980년대 초에도 니카라과 반군(당시 좌익 정부에 맞선 우익 세력)에 대한 CIA의 극비 지원 공작에 3200만 달러를 제공한 것으로 알려졌다.

〈뉴욕 타임스〉는 이런 유착 관계야말로 “사우디가 인권 위반과 여성에 대한 차별을 일삼고 ‘와하비즘(이슬람 근본주의로 알카에다 등 테러 단체들의 중심 이념)’을 지지하는데도, 미국이 공개적으로 사우디를 비판해오지 못한 이유를 잘 설명해준다”라고 지적했다.

기자명 워싱턴∙정재민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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