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사회가, 다스리는 자와 그 통치를 받는 사람들로 나뉜 이래 양자 간에 갈등이 없던 시기는 찾아보기 어려울 거야. 역사 속에서 어질고 현명한 통치자는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현저히 적었고 부당한 대우를 받은 사람들은 불만을 표출했지. 도저히 참을 수 없게 되면 무기를 들고 일어서서 지배자들에게 맞서기도 했어. 국사나 세계사 교과서에 수도 없이 적혀 있는 ‘의 난’이 바로 그것들이야.
그런데 난이란 것이 사람들의 불만이 크다고 자동적으로 일어나지는 않아. 반드시 누군가 먼저 부당한 상황을 깨치고 ‘이렇게 살 수는 없다’ ‘내가 앞설 테니 따르시오’라고 외쳐야 해. 난이 끝나면 자신은 물론 가족까지도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던 이른바 ‘주동자’들이지. 누가 자청해서 그런 위험한 일을 할까 싶지만 인류 역사의 기이한 점은 “가장 앞에서, 가장 날카로웠다가 가장 먼저 부서져버리고 마는 송곳 같은 인간”(웹툰 〈송곳〉 중에서)들이 끊임없이 나타난다는 사실이란다. 목포 앞바다의 많은 섬 가운데 암태도라는 곳이 있어. 목포에서 25㎞ 정도 떨어져 있는데, 토지가 비옥해서 인구가 한때 1만명을 넘었다는 큰 섬이야. 일제강점기에 한때 “사람다운 사람은 다 암태에 산다”라는 말이 돌 만큼, 이 섬 주민들의 ‘사람됨’을 높이 평가해준 적이 있었다. 암태 사람들이 ‘사람다운 사람’으로 일컬어진 유래는 무엇일까.
1923~1924년에 진행된 ‘암태도 소작 쟁의’ 사건이야. 암태도에도 지주들은 어김없이 있었고 대표적인 이는 문재철이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암태도에만 약 140정보(1정보=3000평)의 농지를 보유했고 저 멀리 강원도 철원과 충청도 당진에도 토지를 가진 대지주였어. 문재철은 농민들이 생산한 소출의 70~80%를 소작료로 거둬들이고 있었다. 그래도 암태 사람들은 참아야 했지. 왜? 지주 어른이 무서우니까. 혹시 눈 밖에 나서 그나마 부쳐 먹던 땅을 빼앗기면, 오도 가도 못하고 굶어 죽을 수 있으니까. 하지만 암태도 사람들 사이에서도 송곳 같은 사람이 나타났다. 서태석이라는 사람이지. 서태석은 20대의 이른 나이에 8년 동안이나 암태면장을 했다. 그러나 일제의 앞잡이 노릇에 열성이던 여느 ‘면서기’가 아니었어. 1920년 3·1운동 1주년 행사를 준비하다가 감옥에 가기도 했으니까. 1년 동안의 옥살이를 한 뒤 돌아온 고
향은 그에게 또 다른 저항의 마당이 된다. 지주와 마름(지주의 앞잡이이자 하수인을 이르는 말이야)의 횡포가 도저히 참아줄 수 없을 만큼 심했던 거야. 서태석은 자기 소유의 땅이 있던 자작농이었다. 그러나 결국 자신보다 못한 처지인, 지주의 땅을 부쳐 먹던 소작농들을 위해 선봉에 나서게 된단다. “소작료는 4할(40%)로! 소작료 쌀 운반비는 지주가 내라!” 섬사람들은 1924년 3월27일 암태면 동와촌리에서 ‘지주 규탄 면민대회’를 연다. 지주와 정면으로 맞서게 된 거지. “분쟁이 생기면 소작료를 내지 않고 파작해버립시다! 결의를 어기는 사람하고는 모든 것을 끊어버립시다!” 그 와중에 면민들은 지주 문재철 부친의 덕을 기린다는 송덕비를 부숴버려. 이 문제로 소작민과 지주 측 청년들이 충돌하면서, 결국 소작인 13명이 목포로 끌려가 감옥에 갇힌단다.
차라리 법원 앞마당에서 굶어 죽겠다
그러나 서태석은 이후 일본 경찰로부터 집중적 감시를 받는다. 결국 농민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온갖 고문을 당한 끝에 몸과 정신이 다 망가져버려. 정신분열증까지 얻었고 대소변을 동네 꼬마에게 부탁해 내가게 했다니, 어느 정도인지 짐작하겠지. 1943년 광복을 두 해 앞둔 어느 날, 그는 논두렁에서 시체로 발견된다. 소작료 인하를 부르짖으며 소작농들 사이를 헤집고 다니던 그날의 기억을 잊지 못해서였을까? 벼 포기를 굳게 움켜쥐고 있었다. 자기 땅을 가진 농민이었지만 남의 땅 부쳐 먹는 사람들의 권리를 위해 모든 것을 걸었던 사람은 그렇게 슬프게 생을 마쳤어. 며칠 전 아빠랑 동갑내기 정도인 한 아저씨가 고시텔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다는 뉴스가 있었다. 그분은 창원 롯데백화점에서 시설 관리를 맡았던 용역업체 노동조합의 지회장이었어. 그분은 회사의 부당한 해고에 맞서 백화점 앞에서 넉 달 동안 천막을 치고 농성하며 싸웠고 해고자 10명 중 8명을 순차적으로 복직시킨다는 합의에 도달해. 그런데 지회장의 이름은 복직자 명단에서 빠져 있었지. “언제 끝날지 모르는 투쟁을 계속해 조합원들 고통이 계속되는 것보다는 노사가 조금씩 양보하는 것이 낫다”라면서 다른 사람의 복직을 조건으로 자신은 회사를 떠나기로 한 거야. 가장 날카롭게 튀어나와 회사의 두터운 고집에 구멍을 냈던 송곳 같은 지회장 아저씨가 회사를 떠나 막노동으로 삶을 이어가다가 고시텔 방에서 외롭게 세상을 떠난 것이다. 아저씨의 희생으로 직장을 다시 얻은 사람들은 그 죽음을 알았을까? 슬퍼해주었을까? 벌써 잊지는 않았을까? 그러지 않았기를 바란다. 진심으로.
우리나라는 물론이고 세계 역사에서 인간의 자유를 넓히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불평등을 줄이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던 것이 어진 임금의 선정(善政)이나 인자한 귀족들의 양보라고 하기는 어려워. 자신의 몸이 부서져가며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남을 위해 나설 줄 알았던 사람들이야말로 그런 존재였다. 솔직히 아빠는 너에게 그런 삶을 살라는 말을 하고 싶지 않다. 하지만 그런 사람들을 기억하라는 당부는 꼭 하고 싶어. 그들의 이름과 행적을 기억하는 것으로 역사는 새싹을 틔우는 법이니까. 기억해라, 암태도의 서태석, 롯데백화점 창원점 비정규직 노조 이상구 지회장. 암태도 소작쟁의 당시 서태석이 불렀고 지금은 이상구 지회장도 함께 부르고 있을지도 모를 노래 가사 한 자락을 들려줄게. “오냐 동무야 가자 가자 또 가보자. 무쇠 팔뚝 돌 팔뚝에 풀린 힘을 다시 넣어 칼산 넘고 칼물 건너 쉬지 말고 또 가보자. 이 팔과 다리 부서져 일점육일지골 다 없어질 때까지.”(장안대학교 박천우 교수의 ‘100년 편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