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이야기는 최고의 위스키에 대한 것이다. 위스키는 맥아를 원료 삼아 증류해 만드는 술로, 수백 년 전부터 증류법을 발전시킨 스코틀랜드의 스카치위스키, 옥수수를 섞어서 만드는 켄터키 버번 지역의 버번위스키 등 종류가 다양하다. 위스키는 어원상 ‘생명의 물’이라는 뜻이 있고, 오랜 세월을 거치며 서구 문명의 중요한 문화 요소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나는 위스키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고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살아오며 딱 한 번, 최고의 위스키를 만나는 신비로운 체험을 한 적이 있다.

2015년 4월25일, 나와 나의 여행 동반자 양 작가는 네팔 카트만두 계곡의 산동네인 나가르코트에 있었다. 안나푸르나 트레킹에 앞서 히말라야 풍경의 맛도 좀 보고 다리도 단련할 참이었다. 첫인사와 동시에 담배를 권하는 호탕한 중국 허난성 남자들과 함께 히말라야의 설산 풍경에 감탄하며 “시말라야! 시말라야!”를 외쳤고, 산장 주인이 내놓는 요리와 차를 맛볼 때마다 “데라이 라무로 차(정말 맛있어요)!”를 연발했다. 네팔에 온 후로 늘 그래왔듯 평온한 날들이 흘러갔다. 그리고 그날 낮 12시쯤 우리는 마을 초입에 있는 버스 정류장에서 박타푸르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갑자기 어디선가 드드드 하는 소리가 들려오더니 발밑이 출렁거리기 시작했고, 주변 건물이 요란하게 덜컹거리며 기둥이 부서지고 벽면이 무너져 내렸다. 맨 처음 우리는 그게 뭔지를 몰라 그저 아연할 따름이었다. 아마도 많은 한국 사람이 우리와 비슷한 반응이지 않았을까 싶다. 지진이 뭔지 모르고 사는 사람들이니까. 당황해서 속수무책으로 흔들거리기만 하던 우리는 5초쯤 뒤에야 조금 떨어진 널찍한 공터를 향해 허리를 숙이고 달려갔다.

ⓒ시사IN 신선영2015년 4월25일 있었던 네팔 대지진으로 카트만두에서 동쪽으로 13㎞ 떨어진 박타푸르 더바 광장 주변 건축물들이 무너지거나 부서졌다.

집을 통째로 세탁기에 넣고 돌리는 듯한 소리가 한참 동안 이어졌고, 사람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안전해 보이는 땅을 찾아 주저앉은 뒤에야 첫 진동이 멈췄다. 우리는 공터 바닥이 슬그머니 갈라지며 기다란 균열이 생겨나는 장면을 보았다. 고개를 들어 산 아래를 내려다보자 비로소 지진의 규모를 실감할 수 있었다. 무너진 건물들에서 피어오른 흙먼지가 카트만두 계곡을 자욱하게 덮고 있었다. 첫 번째 여진은 곧바로 이어서 닥쳤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리는 바닥이 점점 심하게 갈라지는 공터를 피해서 사람들이 좀 더 안전하다고 가르쳐준 둔덕 위로 피신했다. 그곳에서 우리는 스티븐을 만났다. 쓰촨성 청두 출신의 배낭여행자로, 쓰촨 대지진 때에는 대학 강의실에 있었다는 이 중국인은 우리에게 지령을 내렸다. “무조건 여기서 내려가야 해요.”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할 수가 없었던 우리는 경험자의 말을 믿기로 했다.

나는 세 명이 탈 차를 알아보러 정류장 부근을 헤매고 다녔지만, 차량은 이미 환자를 실어 나르는 데 쓰이거나 산을 빠져나가려는 사람으로 가득 찬 상태였다. 그 와중에 나는 어떤 네팔 청년에게 우스꽝스러운 질문도 던졌다.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나나요?” 그 청년은 “네, 자주 일어나요”라고 답했다. 그의 대답이 공포를 떨치려는 사람들이 내비치는 여러 가지 꾸며낸 반응 중 하나임은 향후 며칠간 사람들의 말과 행동을 관찰하며 깨닫게 되었다. 우리는 걸어서 산을 내려가기로 했다. 걸어 내려가기 시작한 지 10분 만에 우리는 지나가던 차 한 대를 멈춰 세울 수 있었다. 네팔인 부부와 세 아이가 탄 세단이었다. 운전석에 앉은 남편은 “세 명은 안 되고 두 명은 돼요”라고 말했다. 스티븐은 우리 둘이 타고 내려가라고 했다. 이런 상황에서 그토록 선선히 양보하기란 보통의 인품으로는 쉽지 않을 터였다. 네팔인 부부도 큰 친절을 베풀어주었다. 생면부지 외국인을 공짜로 차에 태워준 데다가, 지인들에게 연락해 박타푸르에서 그래도 안전한 지역을 알아보고 근처에 내려주기까지 했다.

 

ⓒ시사IN 신선영2015년 4월25일 네팔 대지진으로 카트만두 시민들이 시내 라트나 파크에서 대피 생활을 했다.

박타푸르 올드시티 입구에서 만난 지진의 공포

산을 빠져나와 저지대에 도착했다는 안도감은 정말 잠시였다. 5분쯤 걸어서 박타푸르 올드시티의 입구가 되는 다리에 도착했을 무렵 상당히 큰 여진이 닥쳤다. 주변에서 걷던 사람들이 모두 공터를 향해 뛰어가며 비명을 지르는 모습에서 나는, 지진의 공포가 여러 가지 요소로 이루어지며, 군중의 집단적 공포 반응이 그중 큰 부분을 차지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다리 근처의 돌난간에 걸터앉아 호흡을 고르던 나에게 어떤 네팔 사람은 잔뜩 겁에 질린 얼굴을 하고서 “무서워요? 무서워할 것 없어요. 진정하세요”라고 말하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올드시티 쪽에서 빠져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유서 깊은 건물이 많아 마을 전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 보존되어온 박타푸르 올드시티는 강 너머로 보이는 것만 해도 참혹한 상태였다. 크고 작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대부분의 건물이 파손되었고, 직전의 여진으로 또 새로운 흙먼지가 곳곳에서 피어오르고 있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때 빠져나오던 사람들은 올드시티에서 건물 잔해를 맨손으로 치우며 매몰된 사람을 구조하던 이들이었다. 우리는 차를 태워준 네팔 부부가 가르쳐준 방향으로 눈을 돌렸다. 강 이쪽 편, 올드시티 바깥쪽에 아주 튼튼해 보이는 건물 한 채가 보였다. 우리는 그곳이 숙소이기를 바라며 걸음을 옮겼고, 헤리티지 호텔에 다다르게 되었다. 헤리티지 호텔은 박타푸르 올드시티를 조망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전통 건축양식의 4층짜리 호텔이다. 시설이나 서비스는 웬만한 고급 호텔 못지않지만 주인 가족이 직접 운영을 챙기는 덕에 아담한 게스트하우스의 안락함을 느낄 수 있는 장소다. 4월25일 늦은 오후 우리가 배낭을 메고 호텔 마당에 들어섰을 때, 건물 바깥으로 대피해 옹기종기 모여 있던 호텔 손님과 직원들, 주인집 식구의 모습은 꼭 소풍 나온 사람들 같았다. 말 그대로 두 팔을 벌려 우리를 맞아주었다. 예약한 손님이 아니라는데도 “걱정 마세요. 오늘은 마음 편히 여기 있어요”라고 말해주었다. 하지만 우리는 마냥 마음 편할 수가 없었다. 머리 위에는 하늘밖에 없는(그래서 머리 위로 무너질 것이 없는) 정원 의자에 앉아 호텔 셰프가 내어온 샌드위치와 주스와 과일을 먹으며 모처럼의 안도감을 즐기면서도, 우리는 몰래 한국말로 소곤거렸다. 여긴 하룻밤에 얼마일까? 물어봐야 하지 않아? 그냥 마음 편히 있으라는 말이 무슨 뜻이야? 얼결에 들어와서 주는 대로 먹고 마시기는 했지만, 정신을 차리고 둘러보니 이곳은 평소 우리의 숙소보다 별이 몇 개는 더 붙을 듯싶었다. 견디다 못한 나는 주인장을 찾아 물어보았다. “여기 하룻밤에 얼마인가요?”

박타푸르에 있는 헤리티지 호텔 전경. 고급 호텔 못지않은 서비스와 푸근함을 느낄 수 있다.

주인장은 활짝 웃으며 다시 같은 말을 반복했다. “걱정 마요. 이건 돈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살고 죽는 문제잖아요. 인간으로서의 문제라고요.” 나는 주인장과 꽤 닮은 사람 한 명을 잡고 똑같은 질문을 했다. “여기 얼마인가요?” “원래는 140달러 하는데 오늘은 상황이 상황이니까 되는 만큼만 주세요. 사람이 살고 죽는 일이니까요. 돈은 전혀 중요하지 않아요.” 충격이었다. 재난 상황에서, 닥친 재난의 규모도 파악할 수 없고 언제 상황이 수습될지도 모르는데, 가진 현금의 절반을 하루치 숙박비로 날리는 것은 아주 위험하다. 그래서 나는 140달러라는 말을 듣는 순간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들이 베풀어준 친절에 더 충격을 받았다. 돈이 없다면 그냥 자고 가라는 이야기였다. 우리는 고민했지만 박타푸르 인근에 문을 연 숙소가 달리 없었다. 결국 주인장의 친절에 기대어 하룻밤을 묵기로 했다. 네팔 화폐는 되도록 아껴야 했기에 비상금 20유로를 숙박비로 냈다. 우리는 지진 이후 이틀 동안 이곳에 체류했다.

헤리티지 호텔은 내가 가본 곳 가운데 가장 신비로운 장소로 기억에 남아 있다. 여러 직원들이 전부 가족을 보살피러 귀가한 뒤에도 이곳에 남아 24시간 로비를 지키며 여진이 올 때마다 모든 방에 인터폰을 넣어주던 매니저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이 잘생긴 친구와 또 다른 한 명의 아름다운 여성 직원은 우리가 내민 20유로를 보고 ‘그냥 묵어도 되는데’라는 듯한 눈빛을 지었다. 주변 텃밭에 피난 텐트를 친 사람들을 위해 호텔에서 비춰주던 조명도 기억난다. 주인장은 “우리가 이 주변에서 유일하게 발전기를 돌리고 있으니까요”라고 말했다. 호텔 방에서는 온수가 나왔다. 바깥에서는 온수는커녕 물도 구하기 어려운 형편인데. 내가 한평생 다시는 누리지 못할 사치였다. 이틀을 함께한 손님들도 기억에 남는다. 이스라엘에서 온 나이 지긋한 부부는 숨 좀 돌릴 만하면 찾아오는 지긋지긋한 여진 속에서도 끝까지 솔직하고 당당하고 사려 깊었다. 나와 양 작가는 이 부부와 함께 이틀 뒤 카트만두로 향할 용기를 낼 수 있었다. 미네소타에서 온 미국인 부부도 기억난다. 유머감각이 뛰어나고 담배를 좋아하는 이 부부는 우리가 카트만두로 떠나려 하자 “혹시 돈 때문에 여기서 나가려는 거면 언제든 이야기해요. 꼭이요. 알았죠?”라고 말해주었다.

지진이 났던 그날, 호텔 주인장이 내온 위스키

그리고 최고의 위스키. 헤리티지 호텔에서 보낸 첫날 밤, 우리는 여진 때문에 건물 밖으로 나와 주인장이 호텔 창고 처마 밑에 마련해준 이부자리 위에서 잠을 청하게 되었다. 묘하게 초현실적인 그 잠자리 위에서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뜬눈으로 누워 있을 때, 그날 하루 남 못지않은 스트레스를 경험했을 주인장이 위스키를 들고 나타났다.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술을 권하던 주인장은 나에게도 잔을 내밀었다. 이 위스키는 먼저 지극히 아름다운 향으로 그날의 공포와 불안을 날려주었고, 다음 순간에는 부드럽지만 뜨거운 맛으로 사그라져가던 힘과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나는 ‘앞으로 어떤 위스키를 맛보더라도 지금과 같은 향과 맛은 두 번 다시 느낄 수 없으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주인장에게 그 위스키의 이름을 묻지는 않았다. 그건 이름을 몰라야 마땅한 위스키였다.

재난은 여행에서 맞닥뜨리는 여러 위기 중에서도 가장 극단적인 사건일 것이다. 하지만 로마 기차역에서 소매치기를 만나거나, 중국의 국도변 화장실에서 볼일을 봐야 하거나, 손 세정제를 깜빡 잊고 인도 음식인 탈리(thali)를 주문하거나, 혹은 쓰나미와 지진을 만나거나 관계없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똑같다. 건강과 안전을 위협하는 상황 속에서 우리는 항상 최선을 다해 서로를 도와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불쾌하고 위험한 상황이 가져오는 스트레스와 충격을 완화할 수 있고, 사태를 슬기롭게 해결할 수도 있으며, 불쾌한 경험을 결과적으로는 특별한 경험으로 바꿀 수도 있다.

기자명 김명철 (심리학 박사)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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