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감정, 희로애락(喜怒哀樂)은 그 하나하나가 소중하단다. 기쁠 때 웃지 못하고 슬플 때 울지 못하는 것만큼 비참한 일도 없을 거야. 분노 또한 마찬가지다. 화내야 할 때 화내지 못하는 사람은 머지않아 분노마저 잃어버리게 된다. 분노하여 일어서지 못하는 사람은 노예의 삶을 살 수밖에 없어. 〈분노하라〉(돌베개, 2011)의 다음과 같은 외침은 그 자체로 진리라고 해야 할 거야. “분노할 이유를 발견하는 것은 귀중한 선물이며, 분노할 것에 분노할 때 당신은 거대한 역사의 흐름의 일부가 된다. 그 흐름이 우리를 더 많은 정의와 자유로 이끈다. 그 자유는 여우가 닭장 속에서나 맘껏 누리는 자유가 아니다.”

그런데 뭐든 지나치면 모자람만 못한 법이지. 분노 또한 그렇다.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일본 제국주의는 갖은 방법으로 식민지 조선을 수탈했고 조선 팔도의 곤궁한 백성들은 고향에서 살길을 잃고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야 했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산 설고 물 다른 고장 만주 벌판에 흩뿌려졌고, 만주 사람들의 구박 밑에서도 죽을힘을 다해 땅을 일구고 농사를 지었다. 그 와중에 독립운동도 했지. 그런데 일본은 조선을 넘어 만주를 일본의 생명선, 즉 ‘반드시 손에 넣어야 할 영토’로 간주하면서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지.

1931년 7월2일, 현재 중국 지린성 창춘 근처의 만보산이라는 곳에서 조선인과 중국인 간에 충돌이 일어났어. 농사를 위해 조선인들이 판 수로가 문제가 됐지. 그 수로 때문에 자신들의 경작지로 흘러 들어가는 물길이 막혔다고 본 중국인들은 수로 공사를 방해했고 중국 관헌도 조선인들을 구속하는 등 압박을 가했어. 그런데 일본 측이 그들 법대로 하면 ‘자국민’(自國民), 즉 일본 제국의 신민이라는 조선인들을 보호하겠다고 나선다. 이에 부아가 치민 중국인들은 조선인 정착촌으로 몰려가 수로를 파괴하며 난동을 부렸어. 그러자 일본 경찰이 출동해서 이를 저지하면서 일촉즉발의 위기가 펼쳐지지.

ⓒ한홍구 제공‘만보산 사건’에 투입된 일본 경찰. 이 사건은 조선으로 건너와 조선인 박해사건으로 둔갑했다.

이 ‘만보산 사건’은 일본 경찰이 총까지 쏘았다니 보통 사안은 아니었지만, 조선인과 중국인 양쪽에 다친 사람이 거의 없어서 별 탈 없이 마무리될 수 있었다. 그러나 몇 가지 요인들이 첨부되면서 기묘한 화학적 변화를 일으키게 돼. 당초부터 일본은 만주의 조선인이 예뻐서 보호하려던 게 아니었어. 오히려 일제의 목표는 조선인과 중국인 사이를 이간질해 서로 으르렁거리게 만드는 것이었지. 두 민족이 힘을 합친다면 일본의 만주 지배 전략에 막대한 차질이 빚어질 게 뻔했으니까. 그러던 차에 벌어진 만보산 사건은 그야말로 울고 싶은데 뺨 때려준 격이었어. 일본은 갑자기 쥐를 열렬히 보호하는 고양이로 둔갑해서 ‘조선인들이 중국인들에게 피해를 봤다’고 선전한다. 이에, 당시까지만 해도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이 주도권을 잡고 있었고 심지어 쟁쟁한 공산주의자들까지 기자로 맹활약을 펼치던 〈조선일보〉가 말려들고 말아.

창춘에 주재하던 조선인 기자 김이삼은 만보산 현지를 답사하지 않은 상태에서 일본 관헌의 말을 급보로 송고했다. 〈조선일보〉는 이 소식을 호외까지 발행하며 알렸어. 이 뉴스들은 만보산 사건을 중국인에 의한 대규모 조선인 박해 사건으로 둔갑시키게 되지. ‘200명이 죽었단다!’ 하는 식으로 말이야. 조선인들은 경악했어. ‘되놈들이 우리 동포들을 어떻게 했다고?’

중국인들이 우리 동포들을 해코지했다는 것은 분노할 만한 소식이었지. 고향 떠나 사는 것도 서러운데 텃세를 부려 사람을 해치다니! 그러나 그 진위를 확인하기도 전에 조선인들의 분노는 매우 비정상적으로 폭발하고 말았다.

ⓒ연합뉴스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일본인 사이에 퍼진 유언비어로 학살당한 조선인 시체가 땅을 뒤덮었다.

조선인들이 벌인 소규모 ‘관동 대학살’

전국 곳곳에서 일상을 영위하며 살아가던 중국인들은 그야말로 조선인들의 분노 쓰나미에 휩쓸리게 돼. 그해 7월3일 새벽, 언젠가 너도 둘러봤던 인천의 차이나타운 거리가 조선인들의 습격을 받았다. 그뿐 아니라 열받은 조선인들은 서울·평양 곳곳에서 중국인들을 ‘응징’하기 시작했지. 특히 심한 곳은 평양이었어. 7월5일 시민 수백명이 중국요리집 동승루를 공격하면서 비극은 시작됐다. “차차 모여드는 군중들이 합세하야” 늘어난 군중은 중국인 가게와 거주지를 습격했어. 1931년 7월7일자 〈동아일보〉는 “평양 부내에 사는 중국인 476호는 거의 전부 습격을 당했다”라고 기록하고 있어. ‘만보산에서 너희들이 우리 동포들을 죽였다니 너희들도 죽어봐라!’ 하는 분노가 하룻밤 사이에 100여 명 가까운 목숨을 삼켜버렸지. 평양뿐 아니라 전라도 삼례, 경상도 부산, 충청도 천안, 함경도 원산 등 전국적으로 중국인 배척 운동이 일어났고, 별 탈 없이 조선 땅에서 자장면 팔고 포목 장사하며 살아가던 화교들은 별안간 생지옥에 떨어진 듯한 공포에 떨어야 했단다. 전 세계 어느 지역에서도 밀려난 적이 없다는 화교들이 이 사건 이후 대거 조선을 떠났을 만큼 그 공포는 컸어.

결국 조선인들은 소규모의 ‘관동 대학살’을 벌인 셈이었단다. 관동대학살이란 1923년 일본 관동 지역 일대를 강타한 대지진 때 ‘조선인들이 지진을 틈타 소요를 일으키고 우물에 독을 풀려 한다’는 헛소문에 사로잡힌 일본인들이 조선인들을 학살한 사건이야. 당시 일본 정부는 자신들에게 쏠리는 비난의 화살을 잠재우고자 이 소문을 방관 내지는 조장했고, 조선인 수천명이 방향 감각을 상실한 일본인들의 분노에 희생됐다. 만보산 사건 이후 조선인들이 보여준 모습은 바로 일본인의 그것이었어.

다시 돌아보자. 관동 대학살 때 일본인들과 만보산 사건 당시 조선인들의 광기에서 공통점은 무엇일까. 아빠는 그릇된 정의감, 그리고 만만하게 보이는 자에 대한 분노라고 여긴다. 당시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에게 어려운 일본어 발음 “주고엔 고짓센(15원 50전)”을 시킨 뒤 유창하지 못하면 바로 죽창을 내지르면서 ‘조선인들의 소요로부터 우리 가족을 지킨다’는 정의감으로 무장했을 것이다. 만보산 사건 때 조선인들 역시 이른바 ‘동포애’로 팔뚝을 걷어붙였을 터이다. 이에 더하여 만만하게 보이는 자에 대한 분노! 일본인들에게 조선인이란 기분 나쁠 때 배를 걷어차도 괜찮은, 마구 대하고 심지어 죽여버려도 큰 탈 입을 것 같지 않은 약자였다. 화교들 역시 조선인들에게 약자로 비쳤던 거야. 그릇된 정의감이 부른 분노가 약자에 대해 발동될 때 그 결과가 얼마나 치명적인지를, 우리는 이 두 사건으로 알 수 있단다.

하나 더하여, 이렇게 대중이 분노를 ‘소모’할 때 느긋하게 그 분노의 불길을 쳐다보며 불구경에 여념이 없는 자들도 항상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둘 필요가 있어. 관동 대학살 때 일본 정부가 그랬고, 조선인들의 항일운동에 대해서는 거의 빈틈을 보이지 않았던 조선 총독부와 경찰들도 마찬가지였다. “의지만 있었다면 유능한 경찰이 소요를 막지 못했을 리 없다(윤치호의 1931년 7월13일 일기)”라는 구절은 참 의미심장하다. 이 사건이 터진 두 달 뒤 일본은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 침략을 본격화하게 되거든.

아빠는 조선인들이 몹시도 잔인한 가해자가 되었던 만보산 사건을 네게 얘기하면서 여러 가지를 생각한다. 과연 우리는 당시의 조선인들에 비해 지혜로워졌을까? 분노하기 전에 생각할 줄 알고, 분노를 조장하는 세력에게 분노를 퍼부을 깜냥을 키우고 있을까? 글쎄, 네게 감히 대답하기 어렵구나.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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