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면 하나. 18세기 초 청나라와의 영토 경계선을 논의하던 함경도 관찰사 이선부는 측정을 위해 조정에 천리경(망원경)을 요청했으나 거부당했다. 책임 소재를 가릴 수 없는 불명확한 도구를 가지고 영토 문제와 같은 중차대한 사안을 다룰 수는 없다는 이유였다. 결국 이선부는 당시 최신 기기인 육분의와 천리경을 가지고 경계를 정밀히 그려온 청나라 대표의 안을 그대로 조정에 올릴 수밖에 없었다.

장면 둘. 금융위원회의 권고에 따라 국내 금융기관 대부분이 선제적으로 사기 거래를 포착할 수 있는 이상거래 감지 시스템(FDS)을 도입했지만, 여전히 금융 소비자는 액티브엑스와 공인인증서로 도배된 환경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다. 액티브엑스 기반 보안 시스템은 금융 소비자 개인의 컴퓨터나 스마트폰에 설치되기 때문에, 여기서 문제가 생겼다는 것은 금융 소비자 개인이 보안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다는 뜻이 된다. 즉 FDS만 있다면 보안 사고의 책임은 금융기관이 지지만, 도배된 액티브엑스가 있다면 보안 사고의 책임을 소비자에게 돌릴 수 있다. 이런 이유로 감독기관과 금융기관들은 FDS가 있는데도 사용자 경험을 현격히 악화시키는 보안 모듈을 고수한다.

몸과 마음을 다해 열심히(誠意正心) 사물의 이치에 대해 공부해(格物致知) 소양을 갖춘 군자(君子)만이 남을 다스릴 수 있었던(修己治人) 유교적 질서가 국가 정치철학으로 확립된 것은 아무리 늦게 봐도 조선이 건국된 600년 전이다. 군자를 평가해 국가 운영에 참여시키는 과정이었던 과거시험은 무려 1200년 동안 지속된 전통이다. 이렇게 뽑힌 군자들은 일반 백성을 유교적으로 교화해야 하는 사명을 지고 국가를 운영했다. 백성은 섬기고 봉사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깨우치고 보살펴야 할 대상이었다. 규제와 감독은 필수였다.

ⓒ연합뉴스2015년 2월3일 열린 한 토론회에서 신제윤 당시 금융위원장이 ‘금융권 FDS 구축’을 강조했다.

최신 기술 가져다 ‘옥상옥 프로세스’ 만드는…

과거제는 국가고시라는 형태로 변형되어 민주공화국 체제까지 연장되어왔다. 그래서인지 비슷한 패턴이 우리 제도 곳곳에서 목격된다. 지장이나 도장을 믿지 못해 인감도장을 만들고, 인감도장이 맞는지를 증명하기 위해 인감증명서를 발급한다. 온라인과 모바일에서 전자서명 효력을 주기 위해 만든 공인인증서에도 암호를 넣는다. 최근에는 지문인식 등의 생체인증 기술을 곧바로 전자서명으로 쓰지 않고, 공인인증서의 암호 입력에 활용하려는 등 옥상옥 프로세스를 만들려 하고 있다. 증명을 위한 단계가 하나씩 더 생길수록, 그 전 단계의 담당자는 책임을 면한다. 600년 된 ‘책임 회피’와 ‘혁신 저항’의 어두운 전통의 그림자가 이토록 깊고 넓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독재자나 제왕적 대통령이 책임을 지고 혁신 드라이브를 거는 것이 거의 유일한 혁신 방법이었다. 박정희 대통령 때의 산업화가 그러했고, 김대중 대통령 시절의 정보화가 그러했다. 최근 박근혜 정부가 강한 의지로 금융 혁신을 밀어붙이고 있으나, 남은 임기가 그리 길지 않다. 이렇게 되면 공무원들이나 사회 각 주체들은 복지부동한다. 이런 시스템에서 지속적인 파괴적 혁신(disruptive innovation)이 일어나는 건 불가능하다.

새로 뜨는 기술이 무엇인지, 그런 기술과 관련한 산업경쟁력에서 얼마나 밀리고 있는지만 열심히 다루는 학계와 언론의 스탠스가 아쉽다. 지금 중요한 것은 책임 회피에 골몰하는 전통적 주체, 전통적 국가 거버넌스에 대한 비판적 성찰과 대안 모색이다. 혁신의 적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새로운 주체를 모색하고 실천하지 않은 채, ‘눈치’만 보며 책임을 회피하려는 우리 모두가 혁신의 적이다.

기자명 이종대 (옐로데이터웍스 전략담당)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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