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년퇴임을 앞두고 마지막 만남을 어떤 식으로 할 것인지 고민이 되었다. 때가 되어 떠나는 것이니 간단한 인사말을 하고 따뜻한 밥 한 끼 같이 나누면 될 일이긴 했다. 하지만 요즘 퇴임식조차 생략하고 훌훌 떠나는 것이 유행처럼 되다 보니 이런 세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생각이 많아졌다.

거기에 최근 들어 부쩍 학생들 문제로 힘들어하거나 마찰이 잦았던 새내기 선생님들의 모습도 자꾸만 눈에 밟혔다. 그동안 선배 교사로서 적절한 도움을 주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고 미안했다. 그렇다고 관심이 적거나 게을렀던 탓만은 아니었다. 자기 상처에 민감한 교사일수록 학생들의 상처를 바라볼 여력이 없겠기에 좋은 의미로 건넨 조언이 되레 역효과를 내지는 않을까 염려가 되기도 했던 것이다.

그런 와중에 우연히 오래전에 쓴 내 글을 읽게 되었다. 졸업 후 교통사고를 세 번씩이나 당한 특이한 이력을 지닌 제자 이야기였다. 그는 하루가 멀다 하고 말썽을 부려 학생부를 자주 드나들곤 했다. 누가 보아도 자기 잘못이 분명한데도 그 학생은 그것을 시인하지 않았다. 오기나 고집 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의 그 행동을 아픈 결핍으로 이해하기까지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그는 여섯 살이란 어린 나이에 평소 사이가 좋지 않던 부모가 큰 말다툼 끝에 어느 날 갑자기 종적을 감추어버리는 황당한 일을 겪게 된다. 졸업한 지 12년 만에 나를 찾아온 그는 부모 없이 자라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뜻밖에도 공부였노라고 털어놓았다. 그도 그럴 것이 집안에는 까막눈인 할머니뿐이어서 도움을 청할 사람이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학교에서는 상급생이 되어 글자도 못 읽는다고 혼만 낼 뿐, 그의 처지를 이해하고 자상하게 글자를 가르쳐주는 친절한 선생님이 없었다.     

ⓒ박해성 그림

그는 졸업 후 호텔 나이트클럽에서 웨이터 생활을 하면서 술 취한 손님들에게 바가지를 씌우는 수법으로 돈을 벌었다고 했다. 그런 중에 첫 번째 교통사고를 당하게 되고, 문득 그것이 손님들에게 바가지를 씌운 것에 대한 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다시는 그런 짓을 하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지만 함께 일하는 동료들이 문제였다. 양심을 지키려고 노력할수록 그들의 냉소와 비웃음은 커져만 갔던 것이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예전의 모습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고 그런 와중에 두 번째 교통사고를 당했다. 그 사고로 그동안 번 돈을 거의 다 까먹고 말았지만 돈에 대한 애착보다는 그 사고로 인해 사람답게 살고 싶은 생각이 더 강해졌다고 한다. 늦었지만 공부를 다시 해서 떳떳한 직업으로 바꾸고도 싶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런 자신의 진실한 속내를 털어놓을 친구가 없었다. 결국 너무도 큰 외로움이 다시 과거의 생활로 돌아가도록 했고, 그러다가 세 번째 교통사고를 당하게 된다.

마취에서 깨자마자 맨 먼저 떠올린 한 사람

“세 번씩이나 교통사고를 당했는데도 이상하게 조금도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더란 말입니다. 정말 진실하고 보람되게 살고 싶다는 생각밖에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선생님, 마취에서 깨자마자 맨 먼저 떠오른 사람이 누군지 아십니까? 바로 선생님입니다. 선생님만은 제 진실을 이해해주실 거라는 생각이 퍼뜩 들더란 말입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자신의 진실을 과거 담임에게 털어놓기 위해 그는 졸업한 지 12년 만에 멀리 창원에서 차를 몰고 달려왔다.

나는 퇴임식 날, 29년 동안 정들었던 교정을 떠나는 짧은 소회와 함께 그 제자 이야기를 7분짜리 파워포인트에 담아 동료 후배 교사들에게 소개했다.

“한때는 옳고 그름에 대한 기본적인 판단조차 할 수 없었던 그가 끝내 지키고자 했던 것은 진실이었고 그것을 가르쳐준 이는 교사였습니다. 저는 오늘 교단을 떠나기에 이제 더 이상 교사가 아닙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의 소중함을 여러분께 유산으로 남기고 떠납니다.”

퇴임식이 끝나자 최근 학생들과의 불화로 힘든 시간을 보냈던 한 새내기 선생님이 나에게 다가와 울먹이며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이 주신 소중한 유산 잘 간직할게요.”

기자명 안준철 (시인·순천 효산고 교사)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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