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상적 의미에서, 기업은 상품을 생산해서 판매하는 조직이다. 이 과정에서 투자자(자본)·노동자·거래처(해당 기업과 거래하는 다른 기업) 등은 각각 이윤·임금·납품대금 등의 형태로 소득을 얻는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인류는 ‘기업 그 자체’ 역시 하나의 상품으로 사고팔며 이득을 취할 수 있는 상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기업 그 자체’를 거래하는 공간이 바로 주식시장이다. 어떤 기업의 주식을 산다(판다)는 것은 그 기업의 소유권 중 일부를 매입(판매)한다는 의미다. 다만 대다수 ‘주식 매입자’들이 돈을 버는 방법은 매우 단순하다. 그냥 사놓고 해당 주식의 가치가 오를 때까지 기다린다. 그러나 상당 규모의 현금을 조달할 수 있다면, 주식거래를 통해 훨씬 높은 수익을 얻을 가능성이 생긴다. 기업의 다수 지분(주식)을 매입한 대주주로서 경영권을 획득하는 방법이다.

일단 경영권을 장악하면, 기업의 각종 자원을 마음 내키는 대로 처분할 수 있다. 설비·토지 등 자산을 매각해서 현금이 기업에 들어오게 한 뒤 고율 배당을 통해 긁어갈 수 있다. 노동자들을 대량 해고해서 주가를 올린 뒤 자신의 주식(경영권)을 팔고 나가도 된다. 심지어 자기 돈 한 푼도 들이지 않고, 빌린 돈으로 기업 경영권을 인수한 뒤 시세조작으로 주가를 높여 ‘팔고 튀는’ 방법도 가능하다. 물론 이런 과정 속에서 기업의 장기적 생산능력 악화와 거래관계 파괴 등으로 이해 관계자들(노동자·거래처 등)은 치명적인 피해를 당한다. 이처럼 경영자(대주주)와 ‘기업 그 자체’의 이익이 상반되는 경우도 있다.

ⓒ현대페인트노조 제공현대페인트 노동자와 임원들로 구성된 비상대책위원회가 2015년 12월21일 임직원 일동 명의로 한국거래소에 ‘상장폐지 청원서’를 제출했다.

금융 투기꾼들에게 연거푸 유린당한 뒤 빈사 상태에 빠진 상징적 기업이 있다. 인천광역시에 본사를 둔 현대페인트다. 오죽했으면 이 회사의 노동자와 임원들은 최근 ‘상장 철폐’를 청원하고 있다. 자기 회사의 주식이 시장에서 아예 거래되지 못하게 해달라는 것이다. 이런 극단적 요구를 할 만큼, 투기꾼들에게 시달린 지난 세월이 끔찍했다는 얘기다.

1997년 외환위기 직후 부도를 낸 현대페인트는 화의 절차를 거쳐 최규선 유아이에너지(이라크 유전개발 사업) 대표에게 인수된다. 2007년 8월이었다. 최씨는 김대중 정부 때의 대표적 권력형 비리 사건인 이른바 ‘최규선 게이트’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인물이다. 인수 당시 최씨는 유아이에너지의 자회사로 편입된 현대페인트와 함께 자원개발 사업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현대페인트는 최씨에게 거액의 자금을 제공하는 금고였을 뿐이다. 최대 주주로 경영권을 장악한 최씨는 자신에게 필요한 여러 용도의 자금을 대출받기 위해 현대페인트 법인을 연대보증인으로 내세웠다. 지급보증 규모가 무려 400억원에 이른다.

2013년 들어 최규선씨가 횡령·배임 등의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게 되면서, 그가 빌린 자금의 상환 의무가 현대페인트 법인으로 떨어졌다. 이 회사의 감사보고서(2013년 말)에 따르면, 당시 부채총계가 800억여 원으로 자본금(170억여 원)의 4배를 훌쩍 뛰어넘는다. 이 정도면 ‘완전자본잠식’ 중에서도 최악의 상태다. 금융감독 당국으로서는 이런 회사의 주식이 거래되는 걸 허용할 수 없다. 선의의 투자자들이 언제 망할지 모르는 회사에 투자했다가 손해 보도록 방치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현대페인트의 주식 거래는 최규선씨가 기소당한 2013년 7월 말부터 이듬해(2014년) 4월까지 9개월여 동안 정지되었다.

월급 반납하며 살려놓은 회사가 또다시…

그러나 시장에 제품을 팔아 수익을 낼 수 있는 기업이 그대로 망하지는 않는다. ‘수익성’이란 해당 기업으로 현금이 계속 들어올 수 있다는 이야기다. 이런 현금의 배분 권리를 입증하는 자료가 바로 주식이다. 즉, 현금 유입 가능성이 있다면 해당 기업의 주식 또한 일정한 ‘가치’를 지니게 되어 시장에서 사고팔 수 있다. 그 기업의 위기 상황에서 주식을 싸게 매입할 수 있다면, 언젠가 경영 정상화로 주가가 오를 때 팔아 큰돈을 벌 수 있다. 현대페인트가 그런 기업이었다.

ⓒ현대페인트노조 제공현대페인트는 ‘투기꾼’ 경영자가 연이어 들어서며 혼란을 겪고 있다. 위는 현대페인트 공장.

그래서 투자자가 나섰다. 일본에서 면세점 및 화장품업을 영위하는 JTC라는 기업이다. 구철모라는 사업가가 JTC의 지분을 100% 보유하고 있다. 구씨와 JTC는 2014년 3월 현대페인트의 경영권을 120억원에 인수했다. 현대페인트 법인은 액면가 500원짜리 주식을 2400만 주(모두 120억원) 발행했다. 구씨가 700만 주(35억원), 구씨의 친지가 200만 주(10억원), 구씨가 100% 보유한 JTC 법인이 1500만 주(75억원)를 매입했다. 이렇게 현대페인트의 지배구조가 재정립되고, 노동자들 역시 여러 달에 걸친 급여 반납과 기업복지 축소 등 자구 노력 방안을 제출했다. 회사의 노동비용을 스스로 줄여 수익성을 높임으로써 정상화를 앞당기려는 필사의 노력이었다. 그 덕분에 인수한 다음 달(2014년 4월), 현대페인트의 기업회생 상태가 종결된다. 주식거래 정지도 풀렸다.

그때부터 2014년 말까지 8개월여 동안 현대페인트 주가는 위아래로 격렬하게 요동친다. 종가 기준으로 6600원까지 올라갔다가 50여 일 이후에는 3200원대로 바닥을 친 뒤 다시 3500원 내외로 출렁였다. 구철모씨 등 대주주들이 이 시기에 보유 주식을 내다 팔았다면 수백%의 수익률을 올렸을 것이다. 그러나 한꺼번에 주식을 내놓았다간 주가가 오히려 폭락할 위험이 크다. 더욱이 매각 자체가 법적으로 일정 기간 묶여 있었다. 구씨 본인(700만 주)과 친지(200만 주)의 주식은 인수 이후 6개월(2014년 9월), JTC 보유 주식(1500만 주) 가운데 대부분은 1년(2015년 3월) 동안 매각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투자자가 기업을 인수하자마자 주가를 올려 ‘먹튀’하는 경우를 차단하기 위한 ‘보호예수’란 제도다.

그러나 보호예수가 풀리는 족족 구철모씨 등은 부지런히 주식을 팔았다. 구씨 본인과 친지의 900만 주는 2014년 말에서 이듬해 2월 사이 주당 1500원선에 모두 매각되었다. 주당 500원에 사서 1500원에, 모두 900만 주를 팔았으니 90억원 정도의 수익을 얻었다. JTC가 보유한 주식 1400만 주는 보호예수 기간이 끝나자마자(2015년 3월) 주당 평균 1300원 선에 전광석화처럼 팔아치웠다. 주당 매각차익이 800원(500원에 매입해서 1300원에 매각)으로, 이 거래의 수익은 190억원 정도였을 터이다. 다만 구철모씨 등은 사실상의 인수 조건으로 이행해야 했던 ‘개선 계획안’에 따라 매각차익 중 일부를 현대페인트에 재투자해야 했다. 이런 사정을 감안하면, 대주주는 120억원의 투자로 1년 동안 150억원 정도의 순익을 올린 것으로 추산된다. 괜찮은 장사다.

구철모씨 등이 매각한 주식을 사들여 현대페인트를 인수(2015년 3월)한 업체는 지엔에이치(대표이사 이안)다. 인수 당시 지엔에이치는 현대페인트의 본업인 도료 사업은 물론 핀테크, 부산항 면세점 등으로 사업 영역을 넓히겠다고 기염을 토했다. 부산항만공사 측이 제시한 최저가(18억3900만원)의 두 배 이상인 40억1000만원을 연간 임차료로 제시해 면세점 사업권을 따내는 과감한 면모를 과시했다. 투자분석가들은 현대페인트가 사업 영역을 유통과 관광으로까지 넓혀 매출 신장이 기대된다는 종목 분석을 내놓았다. 그러나 인수한 지 불과 7개월여 만인 지난해 11월, 이안 당시 대표 등이 자본시장법 위반, 부당이득 취득 등의 혐의로 구속되면서 마각을 드러냈다. 면세점 사업의 진정한 목적이 현대페인트의 수익성 제고가 아니라 ‘소문 효과’를 통한 주가 급등이었다는 의혹이 제기되는 이유다.

서울남부지검 보도자료(2015년 12월3일)에 따르면, 이안씨가 현대페인트를 인수한 자금은 사채시장에서 빌린 돈이다. 이씨 본인의 돈은 거의 투자하지 않았다. 이씨는 경영권 인수에 필요한 자금을 빌리면서, 그 시점에서 보유하지 않았던 현대페인트 주식(다수 지분)을 담보로 걸었다. 이른바 ‘무자본 M&A(인수합병)’다. 이 사실을 공시하지도 않았다. 물론 공시했다면, 이씨의 인수는 허용되지 않았을 것이다. 빌린 돈만으로 경영권을 장악하는 경우 빚 갚는 데 몰두하느라 회사를 건실하게 운영하지 못하리라는 것이 불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사채 이자는 비싸고 상환 조건도 열악하다. 이씨로서도 수중에 들어온 현대페인트 주식을 빨리 현금화할 필요가 있었을 터이다. 이씨는 증권사 직원들을 매수해 현대페인트 주식을 사고팔며 주가를 올리게 했다. 증권방송 진행자는 돈을 받고 현대페인트 종목을 추천했다. 이씨 등은 이런 방식으로 주가를 올린 뒤 1900만 주를 처분해서 218억원의 부당이익을 취했다. 검찰에 따르면, 이안씨 등이 “범행 종료 후 보유한 경영권 주식은 주식담보대출에 담보로 제공된 100만 주에 불과”하다.

현대페인트는 다시 패닉에 휩싸였다. 경영권의 근거는 다수 지분(‘경영권 주식’)이다. 그런데 검찰에 따르면 이안씨는 100만 주를 남기고 모두 처분해버렸다고 한다. 원칙적으로 이씨는 경영권을 유지할 자격을 상실했다. 검찰이 이안씨에 대한 막바지 수사를 전개 중이던 지난해 10월부터 2016년 1월15일 현재까지 3개월여 동안 현대페인트의 법률적 대표이사는 다섯 차례나 교체됐다. 최 아무개와 김 아무개, 또 다른 김 아무개씨 사이에서 대표이사 자리가 어지럽게 오가는 형국이다. 현대페인트 임직원으로 구성된 ‘비상대책위’는 현 경영진이 모두 ‘이안 전 대표의 관계자로 또 다른 기회를 노리고 있다’는 의혹을 떨치지 못했다.

대부업체가 현대페인트 대주주 될 수도

이런 와중에 지난해 12월11일, 경영진이 한 대부업체에 35억원 상당의 전환사채를 발행했다. 현대페인트 법인이 대부회사에 회사채(돈을 빌렸다는 증서)를 건네고 35억원을 빌렸다는 의미다. 대부회사가 보유하게 된 이 회사채는 유사시 주식으로 전환될 수 있다(전환사채). 바꿔 말하면 대부업체가 어느 순간 현대페인트의 대주주가 될 수 있다는 얘기다. 35억원이면 현대페인트 시가총액(1월15일 현재 322억원)의 10% 정도다. 그러나 지분 구조가 불명확한 현 상황에서는 어떤 사태든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 이 회사 비상대책위의 주장이다.

비대위의 염원은 임금 인상도 기업복지 개선도 아니다. 고작 요구하는 것이 “경영권을 2년 이상 유지할 투자자”다. 현대페인트의 주식을 사고팔며 떼돈을 벌려는 것이 아니라 해당 기업의 생산 역량을 발전시켜 이익을 취하려는 건실한 자본과 경영진을 원한다는 의미다. 결국 비대위는 지난해 12월21일, 임직원 일동 명의로 한국거래소에 ‘상장폐지 청원서’를 제출했다. 자신들의 일터가 다시 투기꾼들의 돈놀이 수단이 될 수 있는 통로(주식거래) 자체를 원천 봉쇄하겠다는 선언이다. 고상인 비대위원장(상무 겸 영업본부장)은 “인천 본사의 전 임직원이 참여해서 투기자본이 다시 우리 회사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끝까지 상장폐지 투쟁을 이어나갈 것이다. 일단 상장을 폐지하고 페인트 사업에 전념할 건실한 투자자를 유치하는 것이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이번 사태와 관련해 현대페인트 경영진의 의견을 듣고자 여러 통로로 접촉했으나 기사 마감 날까지 답변을 주지 않았다.

기자명 이종태 기자 다른기사 보기 peek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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