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철 박사의 여행심리학

① 사분면으로 보는 여행심리학 입문

② 액티비티-내가 감당할 수 있는 짜릿함의 한계는?

③ 역사 유적-당신이 어떤 사람이든, 틀림없이 맞는 곳이 있다

 

 

아는 만큼 보인다. 여행을 준비하는 이들이 자주 듣는 조언이다. 가는 곳의 역사와 문화와 즐길 거리를 미리 알고 떠나는 여행과 준비 없는 여행은 만족도가 다르다. 누구나 아는 상식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나 자신에 대해서도 유효하다. 나를 알고 이해하는 만큼 여행의 가치가 보인다. 하지만 우리는 여행지를 공부하는 만큼 나 자신을 들여다보지는 않는다. ‘나와 여행의 궁합’은 의외로 정확히 맞추기 어렵다.

나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나와 여행의 궁합을 연구하는 심리학의 한 갈래가 있다. ‘여행심리학’이라는 낯설면서도 흥미로운 이름으로 불린다. 2016년 새해 계획을 세우면서도 여행은 어쩐지 나랑 어울리지 않는다며 제쳐두는 당신을 위해, 〈시사IN〉이 새 연재를 준비했다.

필자인 김명철은 심리학 박사(성격심리학)다. 500여 일에 걸쳐 12개국을 여행한 경력이 있다. 심리학과 여행학, 그리고 본인의 여행 경험을 종합해 ‘김명철 박사의 여행심리학’을 연재한다.

 

 

모든 역사 유적은 독특한 매력이 있다. 여권 있는 한국인이 한 번씩은 가봤다는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는 수많은 사원과 왕궁 유적이 넓은 지역에 퍼져 있는 유적군이다. 가장 유명한 앙코르와트 사원은 검은 돌로 쌓아올린 육중한 구조물이 압권으로, 여행자는 입구 회랑에 들어서자마자 귀에서 중저음의 독경 소리가 들리는 듯 묵직한 압도감을 느낄 수 있다.

반면 앙코르와트와 가까운 위치에 있는 따프롬은 사원 돌담을 뚫고 뿌리내린 거대한 나무들이 독특하게 황폐한 분위기를 내며 ‘시간과 망각’ ‘문명의 몰락’이라는 주제를 온몸으로 표현한다. 따프롬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반띠아이 쓰레이에 가면 핑크빛 사암에 각인된 멋들어진 부조를 감상하며 미적 욕구를 충족시킬 수도 있다. 앙코르와트의 매력은 이처럼 다양한 만족을 제공하는 다양한 사원을 며칠 만에 모두 둘러볼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미얀마의 바간은 앙코르와트와는 완전히 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다. 수천 개의 탑과 사원으로 이루어졌다는 이곳 옛 파간 왕국의 수도에서는 관광객 수가 앙코르와트보다 적어서 훨씬 아늑한 느낌을 받을 수 있고, 아기자기한 사원과 탑이 많아서 어느 곳을 방문하든 그곳을 오롯하게 내 것으로 삼는 만족감을 맛볼 수 있다. 바간의 묘미는 자전거를 타고 이곳저곳 이름도 모를 사원과 탑을 마음 내키는 대로 방문하는 자유로움 그 자체다. 큰 사원의 상층부에 오르면 360°를 둘러서 광활하게 펼쳐진 바간의 아름다운 전경을 감상할 수도 있다.

ⓒEPA미얀마의 바간(옛 파간 왕국의 수도)에서는 수천 개의 탑과 사원을 볼 수 있다.

스리랑카의 시기리야는 끝없는 평원의 정글 한복판에 난데없이 솟은 절벽 바위산 꼭대기에 펼쳐진 유적지다. 요새인지 왕궁인지 정체가 불확실한 시기리야 유적에 닿으려면 먼저 나선계단으로 절벽을 돌파해 유명한 프레스코화가 그려진 벽에 이르러야 하고, 다음에는 구불구불 이어지는 돌계단과 ‘거울의 벽’을 지나 ‘사자의 발’을 거치며, 마지막에는 강풍을 뚫고 위태로운 철 계단을 올라야 한다. 평평한 꼭대기 위에 펼쳐진 시기리야 유적 자체는 사실 볼거리가 아무것도 없지만 마치 놀이공원에 다녀온 듯 “와! 재미있었다!”라고 말하게 된다.

남인도의 유서 깊은 힌두 왕국인 비자야나가르의 수도였던 함피는 또 다른 매력을 가진 유적군이다. 거의 모든 여행자들은 함피를 이렇게 평한다. “하루면 다 볼 수 있고, 나머지 날에는 기가 막힌 경치를 즐기는 거지.” 함피 유적군은 화성에 온 듯 초현실적인 풍경을 즐기기 위한 맛깔난 양념이다. 어디서든 경치만 보는 게 질린다거나 쉬고만 있기 지칠 때면 유적을 방문하면 된다.

그 끝없는 다양성 덕분에, 역사 유적은 여러 자극을 받으려는 개방적인 사람에게도 어울리고 흥분을 추구하는 외향적 여행자에게도 만족스럽다. 아늑하게 옛 사람의 손길을 느끼려는 내향적 여행자에게 어울리기도 하고, 문화 충격을 주지 않기 때문에(유적을 먹거나 입거나 유적과 대화해야 하는 게 아니니까) 개방성 낮은 사람에게도 즐거움을 준다. 요컨대 역사 유적은 심리 특성을 크게 타지 않는, 사실상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여행지이다.

우리가 역사 유적을 좋아하는 것에는 심리적 뿌리가 있다. 우리는 흔히 멋진 역사 유적에 대해 동화나라에 들어가는 듯하다고 말하기도 하고 마법과 같은 매력이 있다 하기도 한다. 그런데 역사 유적과 유물에서 매력을 느끼는 심리 메커니즘은 실제로도 마법에 혹하게 되는 심리 메커니즘과 맞닿아 있다.

제임스 G. 프레이저의 유명한 인류학 시리즈인 〈황금가지〉는 마법의 작동 방식을 밝히는 이론서이기도 하다. 프레이저는 특히 마법의 ‘유사성 원리’와 ‘감염 원리’에 주목한다. 유사성 원리는 “유사한 행동이나 현상이 유사한 결과를 부른다”라는 인간의 원초적 믿음에 바탕을 둔다. 우리나라에서는 가뭄이 들었을 때 땅이나 강에 물을 뿌리는 행동(비가 오는 것과 유사하다)으로 기우제를 대신한다. 부채질(바람만 씽씽 부는 가뭄과 유사하다)을 금지하기도 했다.

감염 원리란 “한번 접촉한 것은 영원히 접촉된 것이다”라는 믿음을 뜻한다. 세종대왕이 만졌던 물건은 그가 죽고 사라진 뒤 수백 년이 흘러도 여전히 세종대왕의 터치가 남아 있다고 여겨진다. 여러 문화권의 마법사들은 누군가를 저주하기 위해 그 사람에게 닿았던 물건이나 신체의 일부(머리카락·손톱 등)를 사용했다. 만약 어떤 사람의 옷자락이나 머리카락을 이용해서 닮은 인형을 만들어 목을 싹둑 잘라버리며 저주를 내린다면 이는 감염 원리(‘신체의 일부’)와 유사성 원리(‘닮은 인형’)를 모두 충족하는 무시무시한 마법이다.

폴 로진과 같은 심리학자들은 우리가 여전히 유사성 원리와 감염 원리 같은 미신적 사고의 영향을 받는다고 말한다. 우리는 빠르게 쭉쭉 자라는 콩나물을 먹으면 키도 쭉쭉 자랄 것이라 생각하고, 성기를 닮은 음식을 먹거나 정력 좋은 동물을 먹으면 정력이 좋아질 것이라 믿는다. 시험을 보기 전에는 물건이 떨어지는 게 싫고 미끌미끌한 미역국도 먹기 싫다. 또한 누군가가 “이 옷은 살인범 유영철이 범행 중 입었던 것이고 이 옷은 살인범 오원춘이 범행 중 입었던 옷인데 둘 다 아주 깨끗하게 세탁했으니 네가 입도록 해”라고 말한다고 해서 선뜻 받아 입을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역사 유적의 아름다움을 전하는 ‘감염 원리’

이런 생각과 느낌은 모두 비합리적이다. 하지만 인류는 이런 비합리성을 아름다운 문화로 승화시킨다. 감염 원리는 우리에게 위대한 역사 유적과 고귀한 유물을 선물한다. 우리는 경주 토함산 석굴암에서 장엄함과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신라 사람의 숨결과 손길을 느낄 수 있다. 우리는 이런 연결의 느낌을 바탕으로 유적에 역사적·사회적·철학적 의미를 부여한다. 이제 석굴암은 신라의 역사와 신라 사람들의 수학적 능력과 한국인의 자부심을 상징하는 장소가 된다.

게티즈버그, 진주만, 스탈린그라드 등 역사적 전투가 벌어졌던 전적지는 장엄한 유적이나 압도적인 기념물 없이도 그 전투의 역사적 의미를 상기하고 우리 공동체를 돌아보게 만드는 힘이 있다. 우리나라의 서대문형무소나 캄보디아 프놈펜의 킬링필드는 잔혹한 역사를 상기시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게 만든다. 독일 본의 베토벤 생가, 제주 서귀포의 이중섭 가옥, 조지 오웰이 근무했던 미얀마 양곤의 관공서 건물, 런던의 애비로드 횡단보도(비틀스가 앨범 〈애비로드〉의 표지를 찍은 장소), 간디가 물레를 돌렸던 인도 아마다바드의 집 등은 위대한 예술가와 사회 지도자들의 업적 및 자취로 여행자의 발길을 사로잡는다.

역사 유적은 감염 원리에 따라 강한 힘을 부여받는 만족 요인이다. 시각적 경외감, 판타지 세계에 들어온 느낌, 역사적 의미, 지적 흥미 등의 다양한 만족을 제공한다. 모든 역사 유적이 각기 다른 매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꼭 기억해두자. 어떤 성격 특성을 가진 여행자라도 자신에게 맞는 유적 여행지를 찾을 수 있다는 점이야말로 역사 유적이 제공하는 독특한 축복이다.

기자명 김명철 (심리학 박사)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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