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 스토리


끝났다 뉘 말하는가


경로 이탈한 ‘막가파’ 외교의 결과


“돈을 내는 행위만으로 배상이라고 할 수 없다”


‘그 합의’에는 피해자들이 없다
 

눈치 볼 때 보더라도 ‘이것만은’…

 

 

 

 

ⓒ시사IN 신선영‘12·28 위안부 합의’가 발표된 이후 대학생들이 소녀상을 지키기 위한 밤샘 농성을 이어가고 있다.

끌려가다 / 학교 간다고 통통 뛰었는데

이옥선 할머니(89세·끌려갈 당시 15세)

1927년 음력 10월10일 부산에서 태어났다. 공부가 하고 싶어서 입학철이면 울면서 부모를 졸랐다. “한 날은 어머니가 ‘너 학교를 가지 못해 자꾸 그러는데 저기 어떤 집에서 자식이 없어 너를 수양딸로 데리고 가서 학교 보내 공부를 시켜주겠단다’ 그래 갖고 내가 얼마나 좋아요. 통통 뛰면서 학교 보내준다니 가겠다 했거든.”

그러나 할머니가 보내진 곳은 조그만 우동집이었다. 할머니는 꿈에 그리던 공부 대신 식모살이를 시작했다. 어머니나 아버지가 땋아주곤 했던 허리까지 내려오는 머리를 단발로 똑 잘라버렸다. 할머니는 아까워서 울었다고 했다. 열네 살 적 일이다. 손님 술상에 들여보내려는 걸 뿌리치니 울산에 있는 술집으로 팔아버렸다. 거기서도 허드렛일을 했다.

심부름을 다녀오는 길, 트럭 한 대가 세워져 있었다. “우리가 쪼끄만 게 남자들 힘을 감당해? 트럭에 들어 올려노니까 그저 그대로 가는 거지. 내려놔달라고 막 소리치며 야단하니까 입을 틀어막아. 위에 우리 같은 여자들 있는데 몇이나 됐는지도 몰라요.”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트럭에 실려 기차역으로 갔다. 기차를 타고 도착한 곳은 중국 길림성 도문(지린성 투먼)에 있는 비행장이었다. 일본군은 도망가지 못하도록 전깃줄을 쳐놓고 비행장 확장 공사를 시켰다.

얼마 뒤 일본군이 이동을 명령했다. “거기서 일본 놈들이 가자 그래. 이 사람들이 가자 하니까, 우리를 집에 보내주겠는가 보다 하고 좋다고 모두 나오는 거야. 나오니까 서쪽에 있다고 서시장이라고 그래. 커다란 집이 있는데, 양철집인데. 간판이 있어. 거 위안부로 데리고 갔잖아. 우리는 집에 간다고 데리고 가니까 좋다고 따라 나온 게….”

ⓒREUTERS‘위안부’ 피해자 이옥선 할머니가 경기도 광주시 ‘나눔의 집’에서 젊은 시절 사진을 들고 있다.

김화자 할머니(가명·90세·당시 16세)

언니는 시집을 일찍 갔다. 일본 군인들에게 붙들려 간다는 소문이 돌자 서둘러 결혼을 시켰다. 7남매 중 김화자 할머니가 둘째였다. 밑으로는 남동생만 다섯이었다.

‘안경쟁이 김씨’ 하면 안강(경주시 안강읍)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일본 사람 앞잡이였다. 가마니를 짜고 있는데 안경쟁이 김씨가 일본 사람과 함께 왔다. “헤따이상(일본 군인) 옷 하는 데 미싱도 배우고 하면 돈벌이도 좋고, 가마이 짜는 것보다 낫다고 그카데. 돈으로는 부쳐주냐고 물었지. ‘돈 부쳐주지. 달달이 월급 받으면 집으로 부쳐준다’고 그라데.” 할머니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전장이 커지는데 여자들도 나서서 도와야 한다고 했다. “전부 일본 사람 권리이고, 조선 사람은 똥태 망태라.” 일본인이 조선인 한 명을 죽여도 말도 못하던 때였다. 안경쟁이 김씨를 따라 부산에 가서 ‘아사마마루’라는 배를 탔다. 아사마마루는 할머니를 미싱 공장 대신 타이완에 있는 위안소 ‘가게츠’로 실어 날랐다.

할머니는 어머니가 챙겨준 요깃거리를 기억했다. “봄이지 싶다, 갈 때가. 쌀도 없는데 공출 다 줘뿔고 없는데 백찜(백설기)을 요만큼하게 한 서너 덩어리 되지. 그래 쪄가지고 (엄마가) 가다가 배고프면 먹으라고. 또 까만 콩을 삶아가지고 설탕하고 섞어서 줬는데 이틀 밤 잤는가, 하룻밤 잤는가 묵을라카이 약간 쉬었더라. 이게 좀 쉬었다 싶더라. 그거는 생각나지.”

위안소 / 태워지는 처녀들

고 강무자 할머니(가명·당시 13세)

남태평양 팔라우 군도의 코롤 섬에서 할머니는 ‘마이코(舞子)’라고 불렸다. 원주민들은 입술이 빨갛고 눈만 반들반들했다. 여자들 7~8명과 같이 고사포 부대로 배정받았다. 1층짜리 야자나무 집에 방마다 커튼이 쳐져 있었다. 그 집을 ‘가네모토 빵빵가루(가창·街娼)’라고 불렀다. 가네모토는 관리자로 있었던 장교 이름이다.

혼자 누울 크기의 방에는 담요와 모기장, 경대와 세숫대야가 있었다. 가루분과 휴지, 연고, 삿쿠(콘돔)는 부대에서 배급해주었다. 옷을 홀딱 벗겨놓더니 장교들이 달려들었다. 군인들은 할머니가 죽거나 말거나 올라왔다. 반항을 하고 욕을 하면 심하게 때려서 이가 부러질 지경이었다. 귀국할 때는 이가 거의 없었다. 사이판에는 여자가 없어서 팔라우에 있는 위안부들이 10명씩 통통배를 타고 나갔다. 그곳에서는 나무 아래에 커튼을 치고 일을 치렀다.

ⓒ정대협 제공고 강무자 할머니는 남태평앙 팔라우 군도의 섬으로 끌려갔다. 위는 젊은 시절 사진.

군인들은 표를 가져왔다. 소속된 부대 이름이 적혀 있고 부대장 도장이 찍혀 있었다. 시간까지 찍혀 나왔다. 처음에는 1시간으로 나왔는데 전쟁이 나고는 30분으로 줄었다. 졸병이 오면 3분이면 끝났다. 손님이 많으면 팬티도 입지 못했다. 그렇지만 화대는 단 1엔도 받지 못했다.

일주일에 한 번, 10명씩 교대로 코롤 병원에 가서 검사를 했다. 군의관과 위생병은 있었지만 간호사는 없었다. 매독·임질 같은 성병을 예방하기 위해 한 달에 두 번 606호 주사(살바르산 주사)를 놓았다. 불임 주사도 놓았다. 가끔 아주 힘들다고 하면 잠 오는 약을 하나씩 주었다.

팔라우에는 징용된 조선인 군인도 있었다. 조선인 군인들은 밤새 얘기하며 울다가 갔다. 몸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삿쿠를 쓴 것처럼 비벼서 물에 담근 다음 쓰레기통에 넣었다. 연고약도 짜고 쓴 것처럼 해서 버렸다. 봉급을 타서 아스피린을 사줬다. 약을 먹으면 다리가 아픈 줄 모르고 아래가 터지는 줄도 몰랐다.

강일출 할머니(88세·당시 15세)

“장질부사(장티푸스)가 들렸어. 전염병이고, 옛날에 한국에서도 그 병이 나면 동네 사람이 한 솥 다 죽어요.” 위안부로 2년을 보낸 중국 목단(무단)강 위안소에 장티푸스가 돌았다. 열이 40℃까지 치솟았다. 일본군은 장티푸스에 걸린 위안부들을 산속으로 끌고 갔다. “구더기를 파고 장재기를 놓고, 휘발유를 넣고 막 타지 뭐. 나는 제일 늦게 던지께니 위에 있었지.” 할머니는 그때 일을 ‘태워지는 처녀들’이라는 제목의 그림으로 그렸다.

인근에 주둔해 있던 독립군의 도움으로 할머니는 불구덩이에서 탈출했다. 알고 보니 위안소에서 일하던 조선인 군인 김씨가 독립군이었다. 구출이 되고도 며칠을 앓았다. 정신을 차리고 물어보니 김씨는 백두산으로 갔다고 했다. “그 사람이 나를 영 생각했어. 해방되면 우리 사는 데 상주 와서 살겠다고. 근데 그다음에는 못 만나봤다고. 내 속으로는 언제라도 만날 것 같아.”

ⓒ나눔의 집 제공강일출 할머니가 자신의 경험을 담아 그린 그림 ‘태워지는 처녀들’.

해방 / 끝나지 않는 고통

고 이옥분 할머니(가명·납치 당시 11세·위안소 감금 당시 16세)

타이완 위안소에서 해방을 맞은 이옥분(가명) 할머니는 한동안 숨어 지냈다. 흥분한 타이완 사람들이 일본인과 조선인을 가리지 않고 때려서다. 근처에 있는 굴속에서 며칠 지냈다. 버티다 못해 굴 반대편을 향해 60리 정도 걸었다. 굴 바깥은 바다였다. 기적처럼 배 한 척이 나타났다. 할머니는 윗옷을 벗어 흔들었다. 미군 포로들을 귀국시키는 배였다.

배 안에는 조선 사람이 많았다. 고향에 간다는 기쁨에 사람들은 노래 경연대회를 열었다. 할머니의 차례가 되었는데, 아는 노래라곤 일본 노래밖에 없어서 주저했다. 사람들이 “일본 노래도 괜찮다”라고 말하자 할머니는 ‘독고타이(특공대) 노래’를 불렀다. 일본 군인들이 술을 먹고 때리며 가르친 노래다. 다른 위안부들도 울면서 따라 불렀다.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은 “고국에 도착해서는 일본 노래를 부르지 말라”고 말했다. 2004년 사망할 때까지 할머니는 강제로 배운 일본 군가 51곡을 기억했다.

고 오오목 할머니(당시 16세)

오오목 할머니는 해방 뒤 얼굴에 검정 칠을 해야 했다. 두려웠다. 러시아인들이 젊은 여자를 잡아간다는 소문이 돌았다. 할머니를 비롯한 중국 남경(난징) 위안소의 조선인들은 거지 행세를 하고 고향으로 향했다. 잠시 묵었던 신의주 여관에서 여자를 찾는 남자 소리가 들린 적이 있다. 그날은 밤새 장롱 안에 숨어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딸을 보고 어머니는 놀라서 기절했다. 9년 동안 중국에 있었기에 처음에 조선말도 잘 알아듣지 못했다. 33살에 아이 다섯 딸린 남자와 결혼했으나, 원만치 못했다. 위안부 피해 후유증으로 아이를 낳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식모가 낳은 아기를 데리고 집을 나와 자식 삼았다. 누에 치는 일을 하며 하루 2500원 정도 벌었다. 딸은 국민학교(초등학교) 6학년 때 학교를 그만두고 우산 공장에 가서 일했다. 할머니는 여생을 생활보호대상자로 살았다. 집세 걱정하지 않고 사는 것이 소원이었다. 1999년 78세로 사망했다.

고 전금화 할머니(당시 16세)

전금화 할머니는 서른세 살까지 호적이 없었다. 이름도 없었다. 딸을 ‘갓난이’라고 부르던 부모님은 일찍 돌아가셨다. 일곱 살에 식모살이하던 집에서 받은 ‘수미코’라는 이름을 중국 흑하(헤이허) 위안소에서도 썼다.

19살 많은 남편은 오랫동안 혼인신고를 하지 않았다. “1·4 후퇴 때 이북에 두고 온 첫 아내를 다시 만날 수도 있다”라는 이유였다. 남편은 목수였는데 벌이가 시원찮았다. 전금화 할머니는 행상을 해서 가족을 부양했다. 할머니는 남편에게 자주 맞았다. 맞을 때마다 할머니는 “부모 없고 갈 데 없다고 무시하지 마”라고 소리쳤다.

서른세 살에 호적을 만들면서 스스로 이름을 지었다. ‘금화’라는 이름은 ‘거만’에서 나왔다. 수줍고 내성적이던 할머니는 어린 시절 남자들과 말을 섞지 않았다. 사람들은 이런 할머니에게 무뚝뚝하고 거만하다고 곧잘 놀렸다. 이름을 지으며 그때를 떠올렸다.

남편과 자식들은 할머니가 위안부였다는 사실을 몰랐다. 스스로도, 자신이 갔던 곳의 이름이 ‘위안소’였다는 것을 모른 채 살았다. 텔레비전에서 다른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듣고서야 정대협에 신고하게 됐다.

전금화 할머니는 1994년 3월12일 숨졌다. 2남 1녀를 뒀는데 아들들은 왕래가 거의 없었다. 숨지기 전날 밤 딸과의 통화에서 할머니는 “억울해서 눈 못 감는다. 사과 받고 보상 받고 싶다”고 말했다.

ⓒ연합뉴스1994년 3월 용산역 앞에서 열린 전금화 할머니 영결식(위)에서 김학순 할머니가 추도사를 읽었다.

진상 규명 / 투사가 된 할머니들

김복동 할머니(90세·당시 14세)

김복동 할머니는 열네 살부터 5년 동안 위안부로 살았다. 광둥·홍콩·싱가포르·인도네시아 등지로 끌려 다녔다. 해방 뒤 만난 남편이 죽고,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혼자 가게를 했다. 후유증으로 아이는 낳을 수 없었다.

1992년 1월 텔레비전에 김문숙 부산 정대협 이사장이 나왔다. 거기서 ‘정신대 신고를 하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언니에게 의논을 하자 “조카들을 생각해서 제발 하지 말라”고 말했다. 며칠을 고민하다 결국 신고를 했다. 그 뒤로 언니는 할머니에게 발길을 끊었다. TV에 출연하게 되면서 조카들(작은아버지의 손자들)도 할머니가 위안부였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들 역시 더는 왕래하지 않았다. 신고의 대가는 외로움이었다.

할머니는 좌절하지 않고 정대협 활동에 매진했다. 세계 곳곳을 돌며 위안부 피해를 증언했다. 1993년에는 빈에서 열린 유엔 세계인권대회에 참석했다. 1995년에는 전후 50년을 맞아 개최된 일본 전국 증언집회에 가서 발언했다. 1998년에는 미국 의회에 출석해, 일본 정부의 ‘위안부 문제 공식 사죄와 배상을 위한 결의안’에 대해 증언했다. 2000년 일본군 성노예 전범 여성국제법정에 원고로 참석하기도 했다.

할머니는 ‘나비기금’의 공동 창설자이다. 나비기금은 2012년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창설된 기금으로, 전시 성폭력 피해 여성들을 위해 쓰인다. 길원옥 할머니와 함께 언젠가 일본 정부에게서 받을 법적 배상금을 걸었다. 기금은 이들의 뜻을 따르는 사람들의 기부로 조성된다. 2012년 정대협은 나비기금으로 콩고의 한 피해자 단체를 지원했다. 국가인권위원회는 지난해 12월10일 김복동 할머니에게 ‘2015 대한민국 인권상 국민훈장’을 수여했다.

ⓒ시사IN 신선영1월6일 이용수 할머니가 24주년 수요집회에 참석해 최근 위안부 합의에 대해 규탄했다.

이용수 할머니(88세·당시 17세)

이용수 할머니는 지금도 겁이 많다. 타이완 위안소에 끌려간 이후부터다. 당시 열일곱 살이었던 할머니는 군인을 받지 않으려고 저항했다. 위안소 주인은 욕설을 내뱉으며 전기고문을 했다. 정신을 잃었다 깨어나니 온몸이 축축했다. 그 뒤로 할머니는 항상 몸을 움츠리고 있었다. 해방 뒤에는 혼자 살다가 1989년 일흔다섯 살의 할아버지와 결혼을 했다. 남자가 무서워 일부러 나이 많은 할아버지와 인연을 맺었다.

겁 많던 할머니는 정대협에 신고한 뒤 ‘투사’가 됐다. 수요집회에 가장 활발히 참여하는 할머니 중 한 사람이다. 첫 수요 집회 때 60대였던 할머니는 이제 아흔을 바라본다. 이용수 할머니는 1월6일 24주년 수요집회에도 참석했다. 1991년 위안부 피해를 공식적으로 처음 증언한 김학순 할머니의 석상 옆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만약에 내가 해결하지 않으면 또다시 어린 학생들, 후손들에게 (피해가) 돌아가니까 후손들에게 책임을 떠넘기지 않기 위해 해결하겠습니다. 내 나이 여든아홉입니다. 운동하기 딱 좋은 나이입니다.”

참고 문헌:〈증언집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1, 2, 3〉(정대협, 한국정신대연구회, 한울), 〈증언집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4〉(정대협, 풀빛), 〈증언집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들 5〉(정대협, 한국정신대연구소, 풀빛), 〈역사를 만드는 이야기 증언집 6〉 (정대협 부설 전쟁과여성인권센터, 여성과인권〉

 

기자명 김연희·이상원 기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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