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모란봉악단이 지난해 12월12일 베이징 공연을 성황리에 잘 끝냈다면 어떻게 됐을까. 또 같은 시기에 열린 남북한 차관급 회담에서 최소한 금강산 관광 재개를 위한 모멘텀이라도 만들어졌다면 어땠을까. 그랬어도 병신년 벽두를 북한의 수소탄 실험이라는 초대형 악재 속에 시작하게 됐을까?

간단한 질문이지만 답하기는 쉽지 않다.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럴 수도 있다고 보는 입장은 이번 4차 핵실험이 5월로 예정된 7차 당 대회를 앞둔 ‘노동당의 스케줄’에 따른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안찬일 세계북한연구센터 소장이 이런 입장이다. 그는 평양 소식통의 전언이라며 “7차 당 대회 전에 4차 핵실험·잠수함발사미사일(SLBM)·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실험을 먼저 진행하는 것이 노동당의 계획이다. 따라서 이번 수소탄 실험은 당 대회로 가기 위한 징검다리다”라고 말했다. 그의 언급 중 SLBM은 이미 지난해 12월21일 동해의 신포 앞바다에서  성공적으로 발사된 것으로 알려졌다. ICBM의 경우, 수소탄 실험 이후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에 대응하기 위해 남겨놓은 카드일 수 있다.

안 박사에 따르면 김정은 비서는 이미 지난해 10월 류윈산 중국 공산당 상무위원과 만났을 때 4차 핵실험에 대한 의중을 밝혔다. “당시 3시간가량의 면담에서 김 비서가 4차 핵실험으로 북한이 핵보유국이 된 뒤 중국의 길(개혁·개방)을 걷겠다고 말했다”라는 것이다. 지난해 12월10일 모란봉악단이 베이징으로 출발하고 몇 시간 뒤 김정은 비서가 평양 평천혁명사적지를 시찰하면서 “오늘 우리 조국은 나라의 자주권과 민족의 존엄을 굳건히 지킬 수소탄(수소폭탄)의 거대한 폭음을 울릴 수 있는 강대한 핵보유국이 될 수 있었다”라며 수소탄 실험의 의중을 밝힌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읽힌다.

ⓒ평양 조선중앙통신북한은 ‘수소탄 실험’을 알린 직후 김정은 비서가 2015년 12월15일 핵실험 관련 문서에 서명하는 장면과 문서를 공개했다.

그러나 모란봉악단 공연이 성공했다면 북·중 간에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김정은 비서가 오는 3월 이전 중국을 방문해 시진핑 주석과 정상회담을 할 가능성이 있었다. 게다가 남북 차관급 회담에 이은 장관급 회담에서 금강산관광이나 5·24 조치 해제, 경원선 북측 구간 연결과 농공단지 조성 등이 협의될 수 있었다면 굳이 7차 당 대회를 앞두고 핵실험이나 SLBM·ICBM 실험 같은 무거운 분위기를 연출할 필요가 있었을까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 든다. 김 비서가 수소탄 실험 준비를 지시한 날짜가 모란봉악단 귀환 3일 뒤인 12월15이라는 점, 그리고 SLBM 발사 실험 역시 그 뒤인 12월21일이었다는 점을 볼 때, 당 대회를 앞두고 2016년을 웃으며 시작하려던 1안이 무산되자, 좀 더 험악한 2안으로 넘어갔을 가능성이 크다.

ⓒ평양 조선중앙통신북한은 ‘수소탄 실험’을 알린 직후 김정은 비서가 2015년 12월15일 핵실험 관련 문서에 서명하는 장면과 문서(위)를 공개했다.

온건파로 분류돼온 김양건 대남 비서의 의문의 죽음이 1안에서 2안으로 넘어가는 시점과 겹친다는 것도 생각해볼 문제다. 12월29일 신의주에서 평양으로 이어진 고속도로에서 군 번호판을 단 트럭과 충돌해 사망했다는 그의 사망 경위는 지난해 8월의 남북 총격전 과정에서 그가 보인 인상 깊은 활약과 오버랩된다. 대남 비서의 신분으로 군부가 주도하는 국면에 뛰어들어 무력 대치 국면을 대화 국면으로 바꿔놓은 그였다. 8월27일 조선중앙통신 기자와의 대담에서는 “북남 관계의 발전을 바라지 않는 세력들이 존재할 수 있으며 우리는 그에 대해 각성 있게 대하여야 한다”라는 발언까지 했다. 그는 자신의 운명을 예견이라도 했던 것일까.

북한이 수소탄 실험을 해버린 마당에 직전의 상황을 되짚어보는 것은, 현재 국면이 그동안의 북핵 외교 파탄 과정을 그대로 되풀이하고 있기 때문이다. 김정은 비서 스스로 여러 차례에 걸쳐 4차 핵실험에 대해 운을 뗐건만 중국은 무얼 하고 있었고 한국 정부나 미국 또한 무얼 하고 있었던 것일까. 7차 당 대회를 앞두고 나름의 성과가 필요한 김정은 비서 등 북한 지도부 처지에서는 북·중 관계와 남북관계를 통한 출로가 막힌 상황에서 당 대회 때 북한 인민에게 과시할 선물이 사실상 핵실험밖에 남지 않았을 수도 있다. 상대의 처지를 생각하지 않고 궁지에 몬 후 그 상대가 필사적으로 마지노선을 넘어가면 그때 가서 법석을 떨어온 게 지금까지 4차례에 이르는 북한 핵실험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정은 세대와 북한 핵실험

그나마 김정일 위원장 시대에는 예측 가능성이라도 있었지만 김정은 비서 시대에는 그런 것조차 보이지 않는다. 김정은 비서 집권 이후 우리 정부의 대북 담당 부서들은 북한의 움직임이 종잡을 수 없다고 하소연한다. 김정일 위원장만 해도 국제관계를 염두에 두고 수를 두기 때문에 예측 가능한 측면이 많았으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정부 대북 부서의 한 관계자는 “김정은과 그 주변 세대는 한마디로 ‘마이 웨이’ 스타일이다. 주변이 어떻든 신경 쓰지 않고 내 갈 길을 가겠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박근혜 정부를 비롯한 한국 사회는 과연 김정은 비서와 그의 세대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을까? 그들의 실체와 핵에 대한 생각, 그들이 그리는 미래 북한의 청사진과 이번 4차 핵실험 및 당 대회가 어떤 식으로 연결되는지 진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평양 조선중앙통신1월6일 ‘수소탄 실험에 성공했다’는 북한 당국의 성명을 방송을 통해 전해 들은 평양 주민들이 거리에서 환호하고 있다.

사실 김정은 비서를 둘러싸고 있는 세대의 특징에 대해서는 2012년 그가 권좌에 오른 직후 일정한 분석이 시도됐다(〈시사IN〉 제227호 ‘김정은 세대가 꿈꾸는 조선의 미래’ 참조). 북한 내에서 김정은 세대는 일반적으로 1966년생 이하 주로 1970년대생을 뜻한다. 2012년 김정은 집권 당시 30대 후반, 40대 초반으로 당·정·군의 과장급들이 주축이다. 그 이전 세대가 박봉주 총리의 내각 상무조에 속해 7·1 조치 이후 북한의 시장경제 도입을 위해 뛰었다면, 이 세대는 그것과 전혀 다른 경험을 가지고 있다. 바로 박봉주 총리의 시장경제 개혁이 노동당과 군부의 반발로 무너지고 대신 강성대국론이라는 반동의 물결이 북한 사회를 엄습할 때 그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은 세대라는 것이다.

이들은 전 세대와 비교해서도 집안(혁명 4세대)과 학벌(김일성대학)이 좋을 뿐 아니라 거의 대부분 해외 유학 경험이 있다. 그런데 그 앞 세대가 주로 시장경제 조사를 위해 해외 유학을 갔다면 이들은 북한을 부국강병의 길로 이끌기 위한 방법을 찾으러 해외 유학을 갔다고 한다. 김정일 전 위원장조차 이들을 ‘똑똑한 세대’라고 부르며 기대했을 정도로 이들의 어깨에 북한의 미래가 달려 있었던 셈이다. 이들이 찾은 부국강병의 묘책은 무엇이었을까.

첫 번째가 바로 핵이었다고 한다. 김정일 위원장만 해도 핵에 대한 태도가 일정하지 않았다. 조건만 맞으면 협상이 가능했다. 그러나 김정은 세대에게는 핵이 자신들이 꿈꾸는 강성국가의 초석이다.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무기다. 핵무기로 외부의 간섭을 배제하고 북한에 풍부히 매장돼 있다고 확신하는 석유와 희토류 등의 지하자원, 그리고 과학기술의 발전을 통해 ‘단숨에’ 점프하겠다는 게 이들의 당시 구상이었다.

ⓒ38노스 홈페이지최근 북한 전문 웹사이트 ‘38노스’에서 공개한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 핵실험장 주변 위성사진.

김정일 위원장은 뇌졸중으로 쓰러졌다가 회복한 2008년 이후 김정은 후계체제를 준비하면서 북한 당·정·군 내에 이들 친위세력을 배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2010년 9월 당 대표자 회의 때 김정은의 후계 사실을 공표하면서 이들을 전진 배치하려 했으나 절반의 성공에 그쳤다. 그 뒤 북한 내에서 진행된 고위급 숙청 과정은 개별 인물 단위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세대교체의 관점에서 볼 필요가 있다. 특히 장성택 처형은 그가 이들의 바로 윗세대인 국장급 세대의 구심이었다는 점에서도 해석이 가능하다. 그리고 5월의 7차 당 대회야말로 이들 김정은 세대의 전면적인 전진 배치를 위한 중간결산 자리가 될 전망이다. 30여 년 만에 치러지는 당 대회를 위해 당원증을 재발급하면서 지방 당이나 군의 하급 단위까지 심사와 검열을 통해 대대적인 물갈이가 이뤄질 것으로 예상된다.

핵무기 총괄하는 새로운 군종, 전략군의 등장

그렇다면 이들 세대의 부상과 핵실험은 어떤 상관관계가 있을까. 앞에서 언급했듯 핵문제에서 이들의 특징이 가장 잘 드러난다. 2013년 3월31일 발표한 ‘핵·경제 병진노선’이 얘기하듯이 이들에게 핵은 이미 되돌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국제적으로 검증된 핵무기 고도화의 프로세스를 끝까지 밟아 나가겠다는 의지가 확고하다. 그 결정적인 움직임이 2014년 5월29일자 북한 매체를 통해 알려진 전략군의 존재다. 북한이 보유하고 있는 단거리·중거리·장거리 미사일과 플루토늄, 고농축 우라늄, 수소폭탄 등 다종화한 핵무기를 총괄하는 새로운 군종이 등장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북한의 군 시스템은 육군·해군, 그리고 2012년 항공 및 반항공군으로 개칭한 공군에다 제4군으로서의 전략군 체제로 재편됐다. 전략군의 존재는 2012년 3월 김정은 비서의 조선인민군 전략로케트사령부 시찰 소식으로 처음 노출됐고, 그해 4월15일 열병식에서 전략로케트군으로 호명됐다가 2014년에 확대 개편된 것이다. 그 직후인 2014년 6월부터 2015년까지 북한은 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여러 번 미사일 발사 실험을 해왔다. 그리고 2015년 신년사에서는 ‘다병종의 강군화’라는 언급을 통해 전략군을 중심에 두고 육군·해군·항공 및 반항공군을 유기적으로 연계하는 전략전술의 구사(혼종적 작전술)를 당면 과제로 내세우고 있다(〈김정은 집권 이후 북한의 대내외 정책 평가와 전망〉, 통일연구원 홍민·박영자 박사 공동 집필).

ⓒ평양 조선중앙통신2015년 10월11일 평양에서 열린 모란봉악단과 공훈국가합창단의 합동 공연. 12월12일 모란봉악단의 베이징 공연이 예정되었다가 취소된 바 있다.

과거 소련과 중국의 핵·미사일 능력 고도화 과정에서 전략군이 차지한 위상을 보면 북한의 의도를 정확히 알 수 있다. 소련의 경우 1950년대 중반 핵·미사일 관련 무기 체계가 광범위하게 도입되면서 이를 총괄하는 전략로케트군을 1959년 창설했다. 중국은 1956년 전략 미사일 개발, 1964년 핵실험 성공 이후 1966년 7월 전략군에 해당하는 ‘제2포병부대’를 창설했다. 두 나라 공히 전략군 창설을 계기로 핵무기의 소형화·경량화·다종화뿐 아니라 ICBM, SLBM, MIRV(다탄두 각개 목표 재돌입 미사일)라는 전략핵무기 3원 체제를 갖춰나갔다.

북한 역시 3차에 이르는 핵실험과 인공위성 발사를 통해 얻은 ICBM 능력을 기초로 전략군 체제를 갖추고, 이를 발판으로 과거 중국과 소련이 그랬던 것처럼 핵과 미사일 능력을 획기적으로 고도화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중국과 소련에서 전략군이 기존 군부가 아닌 당 중앙 군사위원회 직속으로 편입됨으로써 당의 권력 강화의 핵심 수단이 됐던 것처럼 북한 역시 당 직속으로 전략군을 배치했다. 이 전략군을 정점으로 기존 재래식 병력이 수직 재편됨으로써 결과적으로 군에 대한 당의 지배가 강화됐다. 통일연구원 홍민 박사는 전략군 체제하의 핵·미사일 능력 고도화와 당의 권력 강화, 7차 당 대회와 SLBM·수소폭탄 실험이 하나의 연결고리로 이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과거 세대가 방어적 차원에서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 실험을 했다면 김정은 세대는 중국과 소련의 경험을 바탕으로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핵·미사일 능력의 고도화를 추진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그다음은 어떻게 될 것인가. 중국은 1967년 제2포병 부대 창설을 통해 핵과 미사일 능력을 획기적으로 증강해 체제 안팎의 안보 위협을 제거했다.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1970년대부터 닉슨의 방중을 받아들이며 개혁·개방의 길로 나서게 된 것이다. 마오쩌둥이 입버릇처럼 얘기했다는 ‘양탄일성(兩彈一星)’, 즉 원자폭탄과 수소폭탄 그리고 인공위성을 갖춘 후에야 비로소 문호를 열어젖힌 것이다. 김정은 비서 역시 이번 신년사에서 7차 당 대회를 계기로 경제 강국 건설에 총력을 집중하자고 제시했다. 중국과 마찬가지로 안보 위협을 근본적으로 차단한 뒤 경제에 올인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김정일 시대가 다분히 한 개인의 카리스마에 의존한 시대였다면 김정은 시대는 그를 둘러싼 세대의 집단지성에 입각해 조직적이고 치밀하게 자신들의 국가 목표를 추구해가는 시대라 할 것이다. 우리는 그런 김정은 키드의 시대를 맞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2012년, 그 세대가 어렴풋이 보이기 시작할 때 했던 질문을 지금 다시 하지 않을 수 없다.

기자명 남문희 대기자 다른기사 보기 bulgot@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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