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명의 눈동자〉라는 옛날 드라마가 있어. 독립운동가의 딸이었던 여옥이라는 여성이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면서 시작돼. 그녀는 호송되는 와중에 일본군 장교에게 성폭행을 당한 뒤 기진맥진한 채 전쟁 공포와 살육으로 눈에 핏발이 선 일본군들의 ‘성노예’로 전락하고 만단다.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그녀는 빛 하나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건 일본군에 끌려온 조선인 청년 대치와의 사랑이었어.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조선인 청년은 머나먼 동남아 전선으로 차출돼.

“나 내일 떠나.” “나는요?” “살아 있어. 살아 있으라구. 알겠지? 그 말 하려고 왔어. 살아서 내 애를 낳아줘(극중 여옥은 대치의 아이를 임신 중이었어). 그렇게 해줄 수 있겠어?” 그리고 둘은 철조망 사이로 정말로 간절하게 입맞춤을 나눠. 하지만 그건 로맨틱한 ‘프렌치키스’가 아니었어. 흙더미 속에 갇힌 사람들이 필사적으로 숨구멍을 찾고 물에 빠진 사람들이 수면에 비친 해를 바라보며 자맥질 쳐서 올라가는 것 같은 필사적인 몸부림이었지.

그런데 여옥이는 왜 그곳으로 끌려갔고 그곳에서 누군가를 만나게 됐을까. 너는 일본놈들 때문이라고 말하며 주먹을 쥐겠지. 맞아. 그런데 아빠는 전쟁이란 이름의 괴물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고 싶어. 전쟁이 빼앗는 건 사람들의 목숨만이 아니야. 전쟁이란 놈은 인간의 긍지, 존엄, 그리고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어?” 하는 하한선 모두를 무너뜨린단다. 오늘 죽을지 내일 죽을지 모르는 군인은 한순간의 즐거움에 목숨을 거는 짐승이 되기 마련이야. 전쟁을 벌이는 지도부(라고 쓰고 윗대가리라고 읽어라)는 자신의 명령에 따라 기꺼이 죽어가야 하는 병사의 동물적 본능을 충족시킬 방도를 찾기 위해 분주했고 무슨 비인간적인 상황이 빚어지든 상관하지 않았지.

ⓒ연합뉴스1991년 8월14일 고 김학순 할머니(가운데)가 국내 거주자 최초로 일본군 위안부의 실상을 증언했다.

태평양전쟁이 벌어지고 미국이 참전을 선언하자 징집에 응한 신병들이 떼로 몰려들었어. 대규모 훈련소가 설치되고 그 인근에는 어김없이 ‘군대에 필요한’ 여자들이 몰려들었지. ‘점잖은’ 시민들이 이에 항의하자 미군 장교가 했다는 말은 전쟁의 단면을 마치 수박 속 보듯 드러내준단다. “안 그러면 여러분의 딸들이 다친단 말입니다.” 일부 일본인들은 위안부 문제를 두고 위와 같이 전쟁의 역사에서 흔히 있었던 일이라며 외면하려는 것 같아.

그러나 전쟁을 일으킨 건 일본이었고 자기네 군대의 ‘사기 충전’을 위해 위안소를 운영한 것도 일본 군대였고, 여성들을 ‘공급’받고 그에 대한 대가를 지불한 것도 일본 ‘제국’이었어. 북만주와 중국 깊숙이, 그리고 남양군도까지 뻗어 있던 광대한 전선에서 수백만 대군의 욕망 ‘처리’를 위해서는 더욱 많은 여자가 필요했고 “돈 벌러 가자”는 사기와 닥치는 대로의 납치, 폭력 등등 범죄가 동반됐지.

그리고 일본이라는 제국주의 국가는 그 범죄의 수혜자였어. 언젠가 위안부 문제를 부정하는 일본 언론인들에게 김종필 전 국무총리는 이렇게 호령했단다. “‘전부 군대 나가는 바람에 생산수단이 없어 사람들이 모자란다. 그래서 여자들이 생산기관에 가서 일하면 돈 벌고 그 돈을 어머니·아버지에게 보낼 수 있고, 좋지 않으냐’ 이렇게 속였다. 이 장면들을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이렇게 모집한 여성들을 일부는 생산기관에 배치했겠지만 대부분은 즉각 강제로 중국으로 보내가지고 위안부 노릇을 시켰는데. 뭣이 어쩌고 어째.”(〈중앙일보〉 김종필 회고록)

ⓒMBC 여명의 눈동자 갈무리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의 주인공 여옥(오른쪽)과 대치. 극 중 여옥은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간다.

1922년생 김학순 할머니라는 분이 계셨어. 그분은 독립운동을 하던 아버지를 여읜 후 어렵게 살다가 1939년 양아버지에 의해 일본군에 넘겨졌고 ‘위안부’ 생활을 하게 돼. 다시 읽기조차 참혹한 그분의 회고를 잠깐만 들어보자꾸나. “여자란 것은 언제나 생리가 있는데 그때도 가리지 않아요 그 사람들은. 생리고 뭣이고가 없어요. 무슨 짐짝 끌어가듯 자기네 맘대로 쓰고 싶으면 쓰고 고장이 나서 말하자면 병이 나든가 하면 버려버려. 죽여버리고… 강제로 안 당하려고 울면서 막 쫓아나오면 안 놔줘요 붙잡고 안 놔줘요. 그래서 할 수 없이 울면서 당해요.”

우리는 얼마나 많은 위안부들이 이런 고통을 겪었는지 정확히 모른단다. 해방 후 수십 년 동안 자신의 피해 사실을 폭로하는 이도 없었어. 이유는 김학순 할머니의 과거를 보면 알아. 조선인 상인의 도움으로 위안소라는 이름의 지옥에서 탈출해 그와 결혼했지만 그녀는 다른 사람도 아닌 남편 때문에 끊임없이 그 지옥을 되새김질해야 했어. 술만 취하면 그녀를 학대했으니까. “너는 위안소 출신이지. 더러운 년.” 이런 분위기에서 누가 감히 자신의 과거를 밝히고 일본에 사과를 요구할 수 있었겠니.

그런데 1990년 6월의 어느 날, 그녀 가슴의 봉인이 찢겨져 나가게 돼. 일본 정부가 ‘일본군은 군대위안부 문제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발표했다는 소식을 들은 거야. “정말 기가 막혀서 그 자리에서 펑펑 울었어요. 혼자서 이럴 수가 있느냐. 왜 우리는 지나간 일을 이렇게도 모르고 사는지 답답하다. 살아 있는 내가 증인인데 세상에 그런 일이 없었다고 말을 하니까….” 김학순 할머니는 1991년 8월14일 광복 46주년을 하루 앞두고 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사무실을 찾아가 국내 거주자로서는 최초로 일본군 위안부의 실상을 실명으로 증언한단다. 일본군 위안부라는 추악한 빙산의 일각은 김학순 할머니의 용기에 의해 흉물스럽게 드러났지. 그리고 그로부터 또 25년이 흘렀고, 김학순 할머니는 물론 그분에 이어 위안부의 과거를 폭로한 많은 할머니들이 일본의 사죄를 요구하다가 한 많은 생을 마감하셨어.

“당신들은 나라를 팔았잖은가!”

며칠 전 일본이 “일본군의 관여와 정부의 책임을 통감”하는 성명을 낸다고 했을 때 아빠는 어떻게든 이 일이 매조지되었으면 하는 희망으로 그들의 언행을 지켜봤어. 하지만 천만의 말씀이더구나. 역사적 범죄에 대한 사과를 하면서 “다시는 이 얘기 꺼내기 없기!”를 명토 박는 것도 어이가 없는 일이다만, 일본 대사관의 ‘위엄’을 손상시키는 소녀상을 이전하라는 요구는 또 한 번 피가 거꾸로 솟을 일이었어.

위안부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소녀일 수도 있고 집안의 생계를 책임진 가장일 수도 있었고 무슨 일이든 해서 먹고살아야 했던 가난한 과부일 수도 있었어. 소녀상은 전쟁에 내몰려 원치 않는 삶을 살아야 했던 그 모두의 기억과 눈물과 아픔의 상징이야. “아저씨 왜 이러는 거예요. 나는 돈 벌러 왔어요.” 울먹이면서 일본군 장교에게 짓밟히고 하루에도 몇 번씩 들이닥치는 전쟁 기계들에게 유린당하고 곳곳의 위안소에서 엄마를 부르며 울었던 모든 ‘여성’ 그전에 ‘인간’의 피해를 증언하는 기념비라고.

그걸 보기 싫다는 일본인들의 사과를 아빠는 하나도 인정할 수 없구나. 만약 정부가 일본 대사관 앞 소녀비를 철거하려 든다면 아빠는 불법으로 처벌받을지언정 공권력에 맞서 주먹을 휘두르게 될지도 모르겠어.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에서 주인공 여옥은 해방 이후 재판정에서 ‘매춘부’로 매도돼. 그때 여옥은 눈물을 흘리며 이렇게 말해. “우리 정신대는 몸을 팔았다지만 당신들은 나라를 팔았잖아요.” 그래, 우리가 아무리 못나도 역사를 팔아넘길 수는 없지 않겠니.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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