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돌아오는 이면도로에서 차를 멈춰야 했다. 저 앞에 새 한 마리가 죽어 있었다. 도심 주택가에서 흔히 보기 어려운 직박구리 같은 종류였다. 아마도 지나는 차에 치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 옆에 또 다른 새 한 마리가 차가 다가오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사체 주변을 종종거리고 있는 게 아닌가. 친구이거나 짝지일 듯하다. 그 몸짓이 ‘어쩌지, 이걸 어쩌지…’ 하고 황망해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 녀석마저 사고를 당할까 봐 걱정되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주변을 빙빙 돌던 그 새가 비켜줄 때까지 한동안 기다렸다 지나가는 것뿐이었다. 가족이나 친구를 잃은 슬픔은 새도 다를 바 없는 것일까. 그 애도의 몸짓은 참 작았지만 며칠 동안 마음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새의 몸짓이 세월호 엄마들의 몸부림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지난봄부터 가을에 걸쳐 딸은 고등학교 다닐 때부터 그토록 하고 싶어 했던 ‘아기 돌보기 봉사활동’을 다녔다. 입양되어 가기 전의 아기들이 머무는 곳이다. 일주일에 한 번씩 봉사활동을 마치고 올 때마다 딸아이 얼굴은 어두웠다. 서로 밥을 뺏어 먹는 아이들 때문도 아니고 한 무더기 뽑혀오는 머리카락 때문도 아니다. 안아달라고 매달리는 아이들 때문에 체력이 달려서도 아니고 똥 기저귀 갈아주는 일이 힘들어서도 아니란다. 엄마 아빠가 없는 저 어린 아이들은 봉사자들을 ‘이모’라고 부르면서 한없이 품에 파고든단다. 하지만 고작 일주일에 한 번 왔다 가는 많은 ‘이모’들에게는 책임지지 못할 스킨십은 자제해달라고 한단다. 딸아이는 엄마도 없이 아빠도 없이, 낯선 사람에게나마 사랑받고 싶어 매달리는 어린 아이들이 안쓰러워 못 견디겠다고 했다.

ⓒ박해성 그림

열아홉 살 먹은 다 큰 여자아이가 혼자 앉아 ‘난 엄마도 있는데…’ 하고 중얼거리며 한숨을 쉰다. 모성이 신성한 것은 그것이 생명을 돌볼 수 있는 엄청난 에너지의 근원이기 때문이다. 아직 어린 딸의 슬픔에서 그런 원천적인 생명력을 본다. 슬퍼할 줄 알아야 사랑할 줄 아는 것이다.

학교에 잘 오지 않는 아이들이 있었다. 3학년에 두 명, 2학년에 두 명, 그리고 복학해서 1학년에 다니는 아이 또 하나. 이 녀석들 사이에 다툼과 금품 갈취 사건이 생겨 선도위원회를 열어야 할지 말지 회의를 하게 되었다. 담임들이 전하는 그 아이들의 사연이 가관이다. 부모가 어렸을 때 이혼을 하고 엄마와 살고 있었는데 아이가 크면서 말썽을 피우니까 환경이 바뀌면 좀 달라질까 해서 아이에게 아빠한테 가서 살겠느냐고 물었단다. 그렇게 아빠에게 보내진 아이는 오랜만에 만난 아빠에게도, 새엄마에게도 적응하지 못하고 다시 엄마한테 왔다.

이런 비슷한 사연은 이제 하도 많이 들어서 화도 나지 않아야 하는데, 마음이 울컥해서 회의를 하다 말고 남 몰래 고개를 들어 천장을 쳐다봐야 했다. 이혼 가정에서 혼자 사춘기 아이를 키우는 엄마 아빠들의 고충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아이는 아이대로 상처투성이인데, 자기 스스로를 감당하지 못할 그 어린 나이에 양쪽 부모 모두로부터 ‘버림받은’ 그 상처는 또 어찌 감당하란 말인가.

아직도 노란 리본을 만들어 보내는 엄마들

슬픔을 느끼지 말아야 하는 걸까, 외면해야 하는 걸까? 하지만 슬픔은 묻어버린다고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더 깊은 슬픔으로 나아가는 일만이 슬픔을 이기는 길이 아닐까.

‘세월호’도 외면한다고 잊히는 게 아니다. 아직도 어디선가 매일 끊임없이 노란  리본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보내는 어떤 엄마들이 있다. 아직도 추운 광화문에서 돌아가며 ‘상주’를 자처하고 밤을 지새우는 어떤 아빠들이 있다.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할 수 있는 일이 가방에 노란  리본을 매달고 ‘기억교실’을 없애지 말아달라 청원서명을 하는 일밖에 없을지라도, 고개를 돌리지도 말고 흐르는 눈물도 닦지 말 일이다. 아직은 그렇다. 어쩌면 앞으로도 한참은 그래야 할지 모른다. 4·16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 1차 청문회 소식을 들으니 더더욱 ‘아직’ 멀었다.

기자명 안정선 (경희중학교 교사)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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