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가끔 ‘재수 없어’라고 말하는 부류를 아빠는 알지. 이른바 ‘도끼병’ 환자들. 하늘과 땅 사이에서 자신만이 빛난다고 착각하는 ‘자뻑증’ 보균자들. 하지만 그래도 아빠는 네게 그런 ‘자뻑’들을 이해해주라고 말하고 싶어. 누구한테건 지구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자기 자신이며, 자긍심은 한 사람을 지탱하는 등뼈이기 때문이야.

어디 개인만 그럴까. 나라 또한 마찬가지야. 지구상 거의 모든 나라는 근거가 충실하건 미약하건 자기 나라와 역사에 자긍심을 품으려 노력하고, 안 되면 거짓말이라도 해서 만들려고 한단다. 수천 년 동안 자신들이 천하의 중심이라고 생각해왔던 중국인의 예를 들어볼까? 18세기 말, 전 세계에 해가 지지 않는 나라를 건설해가던 영국인들이 베이징에 왔어. 영국 국왕 조지 3세가 보낸 매카트니 사절단이었지.

당시 청나라 황제 건륭제는 매카트니에게 이런 답신을 준단다. “우리 문명의 자비를 얻고자 하는 갸륵한 생각으로 서신과 함께 사절을 보냈구나. 외국의 진귀한 보물 따위에는 나는 아무런 관심이 없고 영국의 예물도 마찬가지다. 이제 영국 국왕은 나의 뜻을 충실히 받들기 바라노라. 영원한 복속만이 영국의 평화와 번영을 담보하는 길이다.” 답신을 읽은 조지 3세의 표정이 어땠을지 궁금하구나. 하지만 저 오만한 편지를 쓴 건륭제 시대만 해도 청나라는 전 세계 GDP의 3분의 1 정도를 차지하는 대국이었단다.

ⓒEPA11월13일 파리 테러 때 축구장에 있던 수만 관중이 ‘라 마르세예즈’를 부르며 퇴장하고 있다.

그런데 건륭제가 영국왕 조지 3세의 얼굴에 흙탕물을 끼얹는 편지를 보낸 18세기 말을 생각해보자. 그 시기는 역사상 매우 중요한 ‘자긍심’들이 탄생했던 때란다. 아메리카 합중국, 즉 미국이 영국의 식민지에서 벗어나 공화국으로 첫발을 디딜 즈음이었고 프랑스는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세계사적 격동기를 지나고 있었지.

“모든 사람은 동등하게 창조되었으며 그들의 창조주로부터 불변의 권리를 부여받는데 여기에는 생명과 자유 그리고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포함된다. 이 권리를 보장하기 위하여 정부는 존재하며 정부의 정당한 권력은 피통치자의 동의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어떤 형태의 정부라도 정부가 그 목적을 스스로 파괴한다면 정부를 바꾸거나 폐지하거나 새로운 정부를 세우는 것은 인민의 권리이다.” 미국 독립선언문의 한 대목이야. 절대군주가 엄존하고 봉건귀족이 농민의 피눈물로 빚은 와인을 즐기고 있었던 시대에, 미국 독립선언문은 당대를 겨눈 폭탄이었고 이후 역사의 이정표가 되는 큼직한 발자국이었지.

아울러 이는 더욱더 많은 인간의 자유와 권리를 대변하는 문서로서 미국인들의 긍지가 된단다. 독립선언으로부터 200여 년 뒤 흑인 목사 마틴 루서 킹은 수십만 미국인들 앞에서 이렇게 외친다.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 언젠가는, 이 나라가 일어나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이 나라 신조의 참뜻대로 살아가는 날이 있을 것이라는 꿈.” 독립선언서의 ‘사람’에는 여자나 흑인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지만 역사를 거치며 자유와 권리의 범위가 확대된 거지.

지난 11월13일 금요일 파리에서 일어난 테러 때 축구 경기장에 있던 수만 관중이 ‘라 마르세예즈’를 부르며 질서 있게 퇴장했다는 얘기를 들었을 거야. 아빠는 그 소식에 프랑스의 자긍심을 떠올렸어. ‘라 마르세예즈’는 프랑스 혁명을 분쇄하려는 이웃 나라들,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등의 연합군이 프랑스를 위협할 때, 그에 맞선 라인 강 수비대의 대위가 만든 노래였어. 이걸 프랑스 남부의 항구도시 마르세유의 의용병들이 파리로 수백㎞를 걷는 내내 불러대는 바람에 ‘라 마르세예즈’라는 이름이 붙게 됐지.

ⓒWikipedia1963년 8월28일 마틴 루서 킹 목사가 링컨기념관 계단에서 ‘나에겐 꿈이 있다’는 연설을 했다.

당시 프랑스를 침공한 프로이센군은 기강이 무너지고 무기도 시원찮은 프랑스 시민군을 금세 무찌를 거라고 믿었어. 군대래야 훈련받은 군인이라기보다는 빵집 주인, 구두 수선공, 정육점 직원 등 그저 보통 시민들이 모인 오합지졸이었으니까. 하지만 이 급조된 프랑스 시민군은 라 마르세예즈의 합창 속에 프로이센군을 무찌른단다. “가자, 이 땅의 아들딸들아, 영광의 날이 왔도다! 시민이여 무기를 들어라. 함께 모여 나가자! 나가자! 적들의 더러운 피를 우리 밭고랑에 대자!”

프랑스 인민(누가 이 말을 쓴다고 시비를 걸던데, 우리 제헌헌법을 만든 유진오 박사가 참 좋은 말을 공산당에게 빼앗겼다고 통탄한 단어다. 다시 빼앗아와야지?)은 비록 혼란스럽고 때론 피비린내도 무지하게 풍기긴 했으나 혁명을 통해 자신들이 새로운 세계를 만들고 있음을,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다는 사실을 각인한 거야. 당시 프로이센군의 일원으로 참전한 괴테의 말처럼 “세계사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되고 있음을 몸으로 알았고, 그들의 노래는 단순한 가락이 아니라 마음을 흔드는 함성이고 영혼을 감아 맨 깃발이었던 거지.

200년 전 노래와 선언을 되뇌어보는 ‘지금 한국’

〈레 미제라블〉의 소년 가브로슈가 이 노래를 부르며 죽음으로 나아갔고, 세계 최초의 노동자 정부라 할 파리 코뮌이 설 때에도 이 노래가 울렸으며, 나치 점령하의 프랑스 레지스탕스들도 라 마르세예즈에 목이 메었어. 테러 직후 프랑스 사람들이 부른 라 마르세예즈는 그런 자긍심의 표출이었을 거야. 우리는 이 노래를 통해 역사를 바꾸었고 인민의 단결로 폭군을 물리쳤으며 우리 가족을 위협하는 적들을 무찔렀다는.

우리 민족이 얼마나 위대한 민족이고 어느 정도의 대제국을 이루었으며 무슨 막강한 힘으로 세계를 호령했는가 하는 기억도 자긍심의 일부를 구성할 수는 있을 거야. 물론 건륭제의 오만이고 히틀러가 독일 국민에게 심으려고 발악했던 착각이기도 했지. 하지만 진정한 한 나라의 ‘프라이드’는 보다 많은 사람의 ‘생명과 자유와 행복’을 추구해온 역사, 정의를 위해 압제자와 싸워 대개는 패하였지만 굴하지 않고 다시 일어섰던 기억, 그를 통해 역사를 바꾸는 경험을 했던 환희에서 온다고 생각해.

아빠는 네 할아버지가 힘주어 말씀하시듯 “잿더미에서 경제를 부흥시킨” 산업화의 주인공들에게 경의를 표해. 아빠가 가지는 자긍심의 일부란다. 동시에 ‘밥술이나 먹고 사는 데에’ 만족하지 않고 독재 정권에 대하여 “더 많은 인간의, 더 많은 자유와 행복”을 요구하며 기어이 이전과는 다른 세상을 만들어왔던 우리 현대사에도 무한한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단다. 그러나 요즘 들어 아빠는 격하게 슬프다. 자부심의 한 축이 무너지고 있기 때문이야.

“시위할 때 복면 쓰게 하지 말아야 한다. IS가 그러지 않느냐”라며 국민을 IS로 몰아붙이는 대통령의 놀라운 발언 이후 복면금지법이 발의되고 심지어 “이 법이 제정되기 전이라도 복면 쓰면 처벌하겠다”라는 초법적 발언이 쏟아지고, “언론·출판에 대한 허가나 검열과 집회·결사에 대한 허가는 인정되지 아니한다”라는 헌법 조항에도 불구하고 경찰청장이 “불법이 예상되는 시위를 ‘불허’하며 가담자는 전원 검거한다”라는 위헌적 발언을 서슴지 않는 판이니 어찌 그렇지 않겠니. 풀죽은 목소리로 아빠는 200년 전의 미국 독립선언문을 중얼거려본다. “생명과 자유 그리고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확보하기 위해서 정부는 존재하며 정부의 정당한 권력은 피통치자의 동의에서 비롯된다. 어떤 형태의 정부라도 정부가 그 목적을 스스로 파괴한다면 정부를 바꾸거나 폐지하거나 새로운 정부를 세우는 것은 인민의 권리다.”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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