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 스토리


“내 양심을 전두환이 빼앗지는 못해”


“박정희는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정치적 M&A가 부른 유전자 조작정치


마포경찰서 정보과장 뺨을 때린 YS

 

아빠는 역사적 인물의 명암 중 어느 쪽이 큰가를 다투는 건 보통 의미 없다고 봐. 역사란 누가 잘했고 잘못했느냐를 자상하게 가르치는 도덕 선생님이 아니라 “이번 학기 네 성적은 이거다. 뭘 잘했고 뭘 잘못했는지 2학기에 보자”고 성적표를 발 앞에 톡 던지는 얄미운 ‘담탱이’에 가깝거든. 누군가의 명(明)과 암(暗) 사이 부등호를 두고 씨름하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밝음을 보전하고 그림자를 걷어버릴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게 더 유익하지 않을까. 아빠는 며칠 전 세상을 떠난 김영삼 대통령, 명과 암이 너무도 선명한 그가 한국 현대사를 밝혔던 한순간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해.

대략 4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Made in Korea’ 가운데 가장 먼저 세계 시장 점유율 1위를 차지한 품목이 뭐였을 것 같니? ‘가발’이었어. “무역공사는 우리나라 수출 상품 중에서 치열한 국제 경쟁을 통하여 처음으로 세계 1위 공급국으로 등장한 가발의 이미지를 정책적으로 육성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동아일보〉 1972년 9월9일자). 이유는 간단해. 가발 산업은 수십만 가닥의 머리카락을 일일이 손으로 심어야 하는 ‘수작업’이었으니까. 부지런하고 손재주 좋은 노동자를 수백만명 거느리고 있던 우리나라 아니었겠니.

‘세계1위’를 달성한 가발업체 가운데 YH라는 회사가 있었어. 서울 왕십리에서 달랑 직원 10명으로 시작해 몇 년 만에 대통령 훈장이며 산업포장까지 골고루 거머쥔 기업이었지. 그러나 YH는 한국인 업체끼리의 제 살 깎아먹기 경쟁과 경영 부실에 더해, 해외로 돈을 빼돌려 그곳 한인회장까지 해먹은 장용호와 그 매부라는 경영진의 숫자 놀음으로 점차 속 빈 강정이 돼갔지. 마침내 YH는 폐업 공고를 내버려. ‘공장 문 닫는다. 지금까지 수고했다. 줄 건 없고 이제 너희들 갈 길로 가라’는 얘기였지. 노동자들은 이 배신에 치를 떨며 공장을 점거하고 농성을 벌이게 돼.

ⓒ김영삼민주센터 제공1979년 김영삼 당시 신민당 총재가 당사에 들어온 여공들을 격려하고 있다.

JTBC에서 방송되고 있는 웹툰 원작의 〈송곳〉에서 노동상담소장 구고신은 이렇게 외치지. “살아 있는 인간은 빼앗으면 화내고 맞으면 맞서서 싸웁니다.” 그래, 빼앗으면 화내는 게 인간이고 한 대 맞으면 주먹 쥐고 싸우는 게 인간이지. 하지만 대한민국은 ‘법적으로’ 빼앗으면 화내는 게 불법이고 ‘법적으로’ 맞고도 받아치면 죄인이 되는 오묘한 법치국가였어. 폐업은 웬만하면 합법이었고 그에 저항하는 파업은 어지간하면 불법이었어. 오갈 데 없는 노동자들의 공장 점거는 ‘폭력’이 됐지. 공장을 ‘폭력’으로 점거하자마자 공권력은 공장을 공격한단다. 대부분 여성 노동자인 YH 공장에 혈기왕성한 경찰들이 뛰어들어 내동댕이치고 후려치고 짓밟았어. 그들은 공권력이었고, 피를 흘리면서 때리지 말라고 호소하는 여성 노동자들이 그들을 몸으로 막는 일은 ‘폭력’이 됐지.

보다 못한 몇몇 사람이 당시 야당이었던 신민당 총재 김영삼을 찾아가. “어떻게 방법이 없겠습니까.” 그때 김영삼 총재는 흔쾌히 그들의 호소를 받아들이지. “야당 당사는 언제나 열려 있십니더. 오라고 하이소.” 경영진이 떠나버린 공장에서 분노만 씹고 있던 노동자들은 1979년 8월9일 서울 마포 공덕로터리에 있던 신민당사로 집결했단다.

여성 노동자들이 제1야당 당사를 점거 농성한다는 소식이 퍼지자 그렇게도 무심하던 언론이 관심을 갖기 시작하고 신문 기사와 뉴스에도 YH의 이름이 등장했어. 그것만으로도 여성 노동자들, 이 ‘불법 폭력 분자’들은 눈물을 흘리며 기뻐했다고 해. 하지만 ‘공권력’은 그 기쁨을 연장해줄 의사가 추호도 없었지. 박정희 정권은 공권력을 동원해 이 ‘불법’ 농성을 해산시키기로 해.

ⓒ시사IN 신선영11월19일 ‘경찰청장 사퇴와 백남기 농민 쾌유 기원’ 시국선언 발표장에서 116개 시민사회·종교·농민 단체 등 대표들이 경찰의 진압 영상 자료를 보고 있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여성 노동자들은 공권력이 진입하면 전원 투신하겠다는 결의문을 울며 읽어 내렸어. 몇 명이 실제로 창틀에 매달리고 몇 명은 지쳐 쓰러지는 상황에서, 이들을 진정시킨 건 김영삼 총재였어. “성경에 나옵니다. ‘너희는 결코 두려워 말라. 나의 의로운 손으로 너희를 붙들리라.’ 걱정 마세요. 대한민국 역사에서 공권력이 야당 당사를 습격한 적이 없습니다. 나도 있고 국회의원 30명이 여기 여러분과 함께 있습니다.”

야당 당사에 들이닥친 경찰 앞에 선 그는…

후일 김영삼의 행적은 역사의 평가를 받아야 하겠지만 절망에 몸을 떨며 죽음을 만지작거리는 노동자들 앞에서 “결코 두려워 말라”고 부르짖던 순간은 김영삼이라는 거목이 내뿜은 가장 큰 빛줄기 중 하나일 거야. 이어서 그는 당사 안에 있던 사복 경찰들을 힘으로 내몰라고 지시한 뒤 당사 밖을 포위한 경찰 대열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 나가. “여공(女工)들이 흥분하니 물러서라.” 경찰을 지휘하던 마포경찰서 정보과장이 뻣뻣하게 나오자 김영삼은 그 뺨을 올려붙였어. “느그들이 참말로 저 여공들이 떨어져 죽게 만들 참이야?” 폭력이었지. 엄연한 공권력에 대한 도전이었지. 하지만 지켜보며 조마조마하던 여성 노동자들은 뭉클해진 가슴에 총재님 만세를 부르짖지 않았을까.

그러나 ‘질서와 안정’을 지키고 ‘법의 구현자’를 자처하는 공권력은 이 도전을 살인적인 진압으로 되갚았어. 야당 당사에 경찰력을 들이미는 ‘대한민국 역사상 초유의 일’을 벌인 거야. 국회의원이고 기자고 여성 노동자고 가리지 않고 두들겨 패고 쓰러뜨리고 끌고 갔단다. 그 와중에 김경숙이라는 여성 노동자가 목숨을 잃었어. 어떻게 죽었는지 그 설명조차 여러 번 바뀌었지만, 동생의 학비를 벌기 위해 공장에서 열심히 일하던 김경숙은 당사 4층에서 떨어진 시신으로 발견됐지. 그렇게 공권력은 ‘폭력’을 진압했어. 이제는 고인이 된 김영삼 전 대통령이 1979년 8월9일부터 11일 새벽까지 보여준 행동은, 자신의 권리를 빼앗긴 자들의 ‘불법’을 진압하려는 부당한 ‘합법’의 대변자로서, 공권력에 어떻게 맞서야 하는지 가르쳐준 것이라고 생각해.

11월14일 한 농민이 경찰의 물대포를 직사(直射)로 맞은 후 사경을 헤매는 건 알고 있겠지. 그가 불법 시위에 참여했다고 욕하기 이전에, 왜 중국인 관광객도 드나드는 청와대 앞길에서 대한민국 국민의 헌법상 자유인 집회의 자유가 제한되는지를 아빠는 묻고 싶어. ‘합법’의 이름으로, 쓰러진 사람의 얼굴을, 그를 도우려는 이들의 등짝을, 심지어 그를 병원으로 데려가려는 앰뷸런스까지 공격하던 ‘공권력’에 우선 항의하고 싶구나. 또 “미국 같으면 다 쏴 죽여도 무죄다”라고 지껄이는, 거의 북한 수준의 국회의원에게도 본때를 보여주고 싶어.

김경숙이 죽음을 맞았던 36년 전에도 “김경숙을 떨어뜨린 불순분자가 있다”라는 상상력은 발휘하지 못했지. 그런데 2015년에 수백만이 지켜본 동영상을 보고도 “물대포가 아니라 그 옆의 사람이 깔아뭉갰다”라고 생억지를 쓰고, “물대포가 아니라 ‘빨간 우비의 초절정 고수가 농민에게 치명상’” 타령을 ‘일베’가 늘어놓고, 그걸 국회의원이 받고 검찰이 맞장구치는 두꺼운 얼굴들에 대하여 헌법상 보장된 아빠의 권리를 행사하고 싶구나.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고 김영삼 대통령이 남긴 명언이야. 중무장한 경찰들 앞에서 경찰 간부의 뺨을 올려붙이던 그분이 불렀던 새벽을 위하여, 아빠는 돌아오는 12월5일에는 머릿수 하나를 채우기 위해서라도 이순신 동상 앞으로 가려고 한다. 복면금지법이 발의됐다니 30년 만에 가면도 쓰고 나가야겠다. 아빠는 자유대한 국민으로서 이런 법을 인정할 수 없다.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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