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 스토리


“내 양심을 전두환이 빼앗지는 못해”


“박정희는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정치적 M&A가 부른 유전자 조작정치


마포경찰서 정보과장 뺨을 때린 YS

 

퇴임 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삶을 돌아볼 기회는 많지 않았다. ‘IMF 대통령’이라는 오명이 다른 경력을 잊게 했다. 서거 후 고인을 다양한 각도에서 재평가하려는 움직임이 나오고 있다. 60여 년간 한국 현대사의 주역이었던 김 전 대통령의 생애를 돌아본다.

ⓒ김영삼민주센터 제공1951년 9월29일 손명순 여사와 함께 찍은 김영삼 전 대통령의 서울대 졸업 기념사진.

정치 입문과 이승만 3선 개헌 반대

김영삼은 장택상 전 국무총리의 비서관으로 정치에 입문했다. 이후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자유당 후보로 당선됐다. 이때 김영삼은 만 26세로, 지금도 최연소 국회의원으로 기록되어 있다. 초선 의원 김영삼은 경무대에서 이승만 전 대통령을 만난 적이 있다. 그는 2009년 시사 주간지 〈시사오늘〉과의 인터뷰에서 “3선 개헌 소식이 보도되기 시작하던 무렵 이 전 대통령에게 ‘박사님, 개헌하시면 안 됩니다. 국부로 남으셔야 합니다’라고 말했다. 이 전 대통령은 화가 난 듯 손을 떨더니 말없이 나가버렸다”라고 말했다. 1954년 이른바 ‘사사오입’으로 초대 대통령 연임제한 철폐 개헌안이 통과되자 김영삼 의원은 자유당을 탈당했다.

민주화 투쟁의 시작

1961년 5·16 군사쿠데타 이후 야당 정치인 김영삼은 반(反)박정희 투쟁에 나섰다. 1963년에는 군정 연장 반대집회에 참여한 혐의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1969년 박정희 3선 개헌을 비판하던 와중 자택 인근에서 괴한들에게 ‘초산 테러’를 당하기도 했다. 1979년 8월9일 YH무역 사건으로 김영삼은 정국의 중심에 섰다. 가발회사인 YH무역 여성 노동자 170여 명이 생존권 보장을 요구하며 신민당 당사에서 농성을 벌였다. 그는 당시 당사를 에워싸고 까칠하게 굴던 경찰 간부의 멱살을 잡고 따귀를 올려붙였다(마포경찰서 정보과장 뺨을 때린 YS 기사 참조). 8월11일 경찰 2000여 명이 투입되어 YH무역 노동자 전원을 연행했다. 김영삼 총재는 이 일을 계기로 그해 10월 의원직을 박탈당하고 가택연금에 처해졌다. 김영삼 의원 제명은 10월13일 야당 의원 집단사퇴, 10월16일부터 20일까지 부마항쟁으로 번졌다. 2009년 인터뷰에서 김 전 대통령은 “김대중과는 화해했지만 박정희는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라고 발언했다.

ⓒ김영삼민주센터 제공1981년 가택연금 당시의 YS.

직선제 단식 투쟁, 양김 분열

1980년 전두환을 필두로 한 신군부의 쿠데타로 김영삼은 가택연금을 당했다. 1983년 5월18일부터 23일 동안 ‘언론 통제 전면 해제, 정치범 석방, 해직 인사 복직, 정치활동 규제 해제, 대통령 직선제 개헌’ 등 민주화 5개항을 주장하며 단식을 했다. 단식 12일째 전두환 정권은 가택연금을 해제하며 단식 중단을 권했으나, 김영삼은 5개 항을 재차 요구하며 단식을 이어갔다. 김영삼의 단식은 해외 언론에 먼저 보도됐고, 학생 시위가 이어졌다. 미국에 망명 중이던 김대중은 〈뉴욕 타임스〉 기고와 워싱턴 집회를 통해 김영삼을 지지했다.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신한민주당이 제1야당에 오르자 김영삼은 본격적으로 직선제 개헌을 요구했다. 1987년 전두환 대통령이 호헌을 선언하자 호헌 철폐 시위를 주도했다. 직선제 개헌 이후 8월부터 김영삼은 김대중과 대통령 후보 단일화 문제를 협의했으나 의견 일치를 보지 못했다. 결국 김영삼과 김대중은 각기 통일민주당·평화민주당 소속으로 독자 출마했고, 두 후보는 각각 28%·27%를 득표해, 36.6%를 득표한 노태우 후보에게 패했다. 김영삼 후보는 선거가 끝난 직후 “이 선거는 부정선거이며 무효임을 규정한다”라고 발표했다.

ⓒ김영삼민주센터 제공군사독재 시절 YS는 민주화 동지이자 라이벌이었던 DJ와 함께 민주화추진협의회를 결성했다.

3당 합당과 대통령 당선

13대 총선에서 통일민주당은 원내 3당으로 밀려났다. 여당인 민정당은 과반 의석을 확보하기 위해 김영삼 총재에게 합당을 제의했고, 김영삼 총재도 비밀리에 협상에 응했다. 여기에 내각제 개헌 기대를 갖고 있던 김종필의 신민주공화당도 합류하며 1990년 3당 합당이 이뤄졌다. 합당 결과 신생 민주자유당은 218개 의석을 보유한 거대 여당이 됐다. 노무현을 비롯한 통일민주당 8인은 ‘야합’이라고 비판하며 민주당(일명 꼬마민주당)을 창당했다. 김영삼은 1992년 5월 민자당 대통령 후보가 됐다. 대선에서 김영삼은 김대중을 193만 표 차이로 앞서 제14대 대통령에 당선됐다.

ⓒ연합뉴스1990년 YS가 3당 합당을 선언한 이후 통일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당시 노무현 의원이 합당을 반대했다.

취임 초기 개혁정책 실행

‘문민정부’를 표방한 김영삼 대통령은 취임 초기 획기적인 개혁안을 실행했다. 금융실명제가 대표적이다. 1993년 8월12일 김 대통령은 대통령 긴급명령인 긴급재정경제명령 제16호를 발동해 당일 오후 8시부터 ‘금융실명제 및 비밀보장을 위한 법률’을 실시했다. 이 명령 전 마지막 명령은 1972년 박정희 대통령이 발동했다. 법률은 ‘비실명 계좌의 실명 확인 없는 인출 금지’ ‘3000만원 이상 순인출 국세청에 통보, 자금 출처 조사 가능’을 담았다. 이 조치로 군사정권 인사들의 차명계좌가 동결됐고, 비리자금 추적이 용이해졌다.

김영삼 대통령은 군부 세력과 선긋기에 나섰다. 시작은 하나회 척결이었다. 하나회는 전두환과 노태우가 육사 동기·후배들과 만든 군 내부 최대 사조직이다. 하나회 출신들은 군 요직을 두루 거쳤고, 일부는 정치인으로 변신했다. 외부로 알려지지 않던 하나회 인사 명단이 1993년 4월 보도되자 대규모 숙청이 진행됐다. 하나회 출신 장교들은 진급에 불이익을 받았고, 장성들은 강제 전역을 당하기도 했다. 비밀 유지를 위해 김영삼 대통령은 최측근 몇 사람과만 하나회 척결을 논의했다. 국방부는 하나회 측의 쿠데타를 우려해 보름간 밤샘 대비를 했다. 이 무렵 대통령 지지율은 90%에 달했다.

ⓒ연합뉴스1993년 8월12일 김영삼 대통령의 긴급명령에 따라 금융실명제가 실시되었다. 위는 당시 실명 확인을 위해 은행에 몰린 이들.

5·18특별법 제정

김영삼 대통령은 1995년 대통령 명령으로 5·18특별법 제정을 지시했다. 이 법은 ‘1979년 12월12일과 1980년 5월18일을 전후하여 발생한 헌정질서 파괴범죄행위에 대한 공소시효 정지’를 담았다. 전두환·노태우를 비롯한 신군부 세력의 12·12, 5·18 사건 책임을 묻기 위해서다. 1996년 전두환과 노태우는 구속 기소되고, 1심에서 각각 사형과 징역 22년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1997년 12월20일 김대중 새 대통령 당선자와의 협의로 사면 복권됐다. 노무현·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한 이후 김영삼 전 대통령은 “살아 있는 전직 대통령은 이제 나 하나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전두환·노태우 전 대통령을 인정하지 않는 듯한 발언이다.

ⓒ연합뉴스1997년 2월25일 김영삼 대통령이 차남이 관련된 한보 사건에 대해 사과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외환위기와 퇴임

임기 마지막 해인 1997년에는 외환위기를 맞았다. 1월 한보철강을 필두로 기업이 연쇄적으로 도산하면서 대한민국 외환보유액은 급감했다.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195억 달러 구제금융을 원조받아 간신히 국가부도를 면했다. 대량 해고가 발생하면서 온 국민이 어려움을 겪었다. 또한 한보 사태 수사 중 김영삼 대통령의 차남 현철씨가 뇌물수수 혐의로 체포됐다. 이 일로 김 대통령은 대국민 사과 성명을 발표했다. 그해 대선에서 여당인 신한국당 이회창 후보는 새정치국민회의 김대중 후보에게 패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 중 퇴임 시 최저 지지율(8.4%)을 남기고 청와대를 떠났다.

퇴임 후 행보와 유훈

퇴임 후에도 김영삼 전 대통령은 ‘이슈 메이커’였다. 2000년 강연을 위해 고려대를 찾았다가 학생들에게 제지당하자, 교문 앞에 차를 세우고 14시간 동안 농성했다.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장례식에 대해 “국민장이 아니라 가족장으로 충분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김영삼 전 대통령 측은 보도가 나온 직후 ‘문맥이 거두절미됐다’라고 해명했다). 2012년 새누리당 경선 당시에는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에게 “박근혜는 아무것도 아니다. 아주 칠푼이다”라고 발언한 것이 화제가 됐다. 2009년에는 오랜 정적이었던 김대중 전 대통령을 병문안하며 “화해했다고 봐도 된다”라고 말했다. 장례 기간 김현철씨는 “아버지의 마지막 유언은 ‘통합과 화합’이다”라고 밝혔다.

기자명 이상원 기자 다른기사 보기 prode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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