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는 1970년생이야. 어느 통계에선가 대한민국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출생 연도가 1971년이라고 하니까 거기서 살짝 비껴난 나이지. 1970년대가 열리던 해에 아빠는 태어났어. 4·19로 열린 1960년대는 1961년 해병대를 앞세워 짧은 의회 민주주의의 시간을 끝냈던 작달막한 군인 겸 정치인의 치세 중에 막을 내렸다. 그리고 ‘대망의 1970년대’가 밝았지.

세 번째 임기의 반환점을 돈 박정희 대통령은 ‘대망의 70년대’를 강조한 신년사에서 다음과 같이 뚝뚝하게 ‘지침’을 내리고 있어. “1인당 국민소득은 500달러 선을 훨씬 넘어야 하고 수출은 적어도 50억 달러 선을 돌파해야 한다. … 우리의 상품들은 국제시장에서 당당히 경쟁하여 다른 나라 상품을 압도해야 하며 그중에서도 몇몇 산업부문은 세계 제1위를 자랑할 수 있게 돼야 한다.” 대통령이 국민에게 보내는 신년사라기보다는 전방 사단장이 휘하 병력에게 전투력 목표치를 산정하는 어투지?

맘에 안 드는 말투는 제쳐두고 그 ‘목표치’를 한번 보자꾸나. 국민소득 500달러, 수출 50억 달러. 그런데 1970년 당시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목표의 절반인 254달러에 불과했단다. 당시 일본은 1658달러였으니 비교해볼 만하겠지? 이외에도 대통령 신년사에는 몇 개의 ‘숫자’가 등장하고 이런저런 ‘기어이 실현해야 할’ 일들이 제시되고 있지. 아닌 게 아니라 1970년은 여러모로 한국 경제를 좌우할 일들이 많이 벌어진 해였어. 경부고속도로가 이해 완공됐고, 일본으로부터 받아온 식민지 배상금으로 포항의 허허벌판에 종합제철소를 차린다는 언뜻 보기엔 무모하게 보이는 야심찬 공정이 그 막을 올렸으며, 현대자동차가 미국의 포드 자동차와 50대 50의 합자회사를 차린 해이기도 하니까.

ⓒ연합뉴스서울 동대문 평화시장 인근 전태일 다리(버들다리)에는 전태일 동상이 설치돼 있다.

그런데 대통령의 신년사에서 아쉬운 점은 그 ‘숫자’를 달성하기 위해 발버둥치고 땀 흘려야 할 국민의 삶과 행복에 대한 표현은 매우 귀하다는 거였어. 딱 한 구절, “모든 사람들이 일자리를 가질 수 있고 한 사람의 노동 대가가 한 가구의 생계를 능히 꾸려나갈 수 있게 하여 서민 생활에 좀 더 여유와 윤기가 돌게 해야 하겠다”라는 문장이 간신히 디밀고 있을 뿐이지.

박정희 대통령이 이 뚝뚝한 신년사를 발표하기 한 달 전, 서울 동대문 평화시장의 한 재단사는 대통령에게 부치지 못한 편지를 다음과 같이 쓴 적이 있었어. “대통령 각하. 사회는 이 착하고 깨끗한 동심에게 너무나 모질고 메마른 면만을 보입니다. 저는 여기에서 각하께 간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저 착하디착한 동심을 좀 더 상하기 전에 보호하십시오. 저희들의 요구는, 1일 15시간의 작업 시간을 1일 10~12시간으로 단축해주십시오. 1개월 휴일 2일을 늘려서 일요일마다 휴일로 쉬기를 원합니다. … 절대로 무리한 요구가 아님을 맹세합니다.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요구입니다.”

섬유는 당시 한국의 주요 수출품 중 하나였단다. 미국 주재 한국 대사가 미국 국무차관과 차관보를 앞에 두고 “직물 수출은 한국의 사활 문제”이며 목표를 채울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읍소할 정도였지. ‘50억 달러 수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알파요, 오메가였어. 그리고 그 수출액의 달러 한 장, 센트 한 닢을 벌기 위해 평화시장의 여성 노동자들은 1주일에 하루도 쉬지 못하고 하루 15시간씩 햇빛도 보지 못하고 일했어.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요구’를 박탈당한 채 말이지. 대통령에게 편지를 썼던 재단사는 그 뒤 자신의 요구를 실현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한다. 노동청을 찾고 언론사 기자에게 머리를 조아리고 동료들을 모아 데모도 하고 ‘민중의 지팡이’라던 경찰에게 호소도 하면서. 그러나 1970년 한 해 내내 대한민국은 끝내 그를 외면하고 말았어.

ⓒ포스코 제공 1970년 4월1일 포항제철 1기 설비 종합착공식이 열렸다. 당시 1인당 국민소득은 254달러였다.

‘전태일 단골집’에서 우연히 듣게 된 그의 일화

언젠가 아빠는 동대문 평화시장의 오래된 감자탕 집을 촬영한 적이 있어. 이것저것 묻다 보니 아빠는 전태일이라는 재단사가 종종 들러 한 끼를 채우던 곳이었다는 걸 알게 됐어. 그런 기분 이해할지 모르겠다. 전혀 아무렇지도 않은 풍경과 사람들인데 “여기 아무개가 단골이었대” 하면 갑자기 주변에 광채가 서리고 그에 얽힌 사람들 얼굴이 다 신기해 보이는 거. 아빠가 그랬어. 그래서 주인아주머니에게 전태일의 추억에 대해 물었지.

아주머니의 대답이야. “시다(미싱사 보조들, 그러니까 평화시장의 피라미드에서 맨 아래 위치한 여성 노동자)들 데리고 와서 자기는 안 먹고 애들 사줄 때도 있었어. 그래서 내가 한 그릇 슬쩍 더 주니까 끝까지 배부르다고 안 먹어요. 그래서 난 정말 밥 먹은 줄 알았어. 근데 그 사람도 저녁 먹은 게 아니었어요. 시다 애들한테는 자기는 밥 먹었다고 그랬는데 준다고 덥석 받아먹으면 애들 무안해할까 봐 그랬다는 거야 나중에.”

인간이 위대하다는 건 꼭 세계를 정복하고 역사에 남을 위업을 남기는 일만은 아니야. 오히려 그다지 볼품도 없고 해봐야 티도 안 나는 일, 누가 볼 일도 아니고 구태여 한다고 칭찬할 것도 아닌 일을 힘겹게 하는 사람도 하늘에 닿게 위대하고 땅을 덮도록 거룩할 수 있는 거란다. 그래서 예수는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마태복음 25장 45절)고 하는 거야. 호기롭게 ‘밥 먹으러 가자’ 해서 시다들 데리고 왔는데 호주머니에 든 돈은 딱 시다들에게 감자탕 한 그릇씩 돌릴 정도였던 상황.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면서도 혹여 시다들이 마음 쓸까 봐 아이고 배불러 하면서 감자탕 냄새로만 배를 채우던 청년을 생각해봐. 감자탕 집 아주머니의 말을 더 들어보자.

“무슨 일을 계속 꾸미고 있다는 건 알았어요. 그래서 걱정도 되고 그래서 태일이가 왔길래 앉혀놓고 이야기를 했지요. ‘야 이 바보야. 네 일이나 걱정해라’고 타일렀어요. 그러니까 밑도 끝도 없이 내일이면 결판이 난대요. 결판은 뭔 결판? 그러고 말았는데 다음 날 점심 끝나고였나? 누가 와서 태일이가 죽었다고, 불타 죽었다고 엉엉 울더라고요.”

1970년 11월13일 전태일은 법치국가의 수도 한복판에서 법을 지키라고 외치며 분신했어. “근로기준법을 지켜라”는 상식적인 외침을 위해,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는 슬픈 명제를 증명하기 위해 육신을 스스로 불구덩이에 밀어넣은 거야. 아빠는 게으르고 불성실하긴 하지만 기독교인으로서 예수의 부활을 믿어. 그건 비단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난 부활이 아니라 예수처럼 죄인들을 사랑하고 낮은 자들을 위해 몸을 던지고 스스로를 죽여 더 큰 사랑을 실천한 사람들이 끊어지지 않았음을 세계 역사에서 보았기 때문이기도 해. 전태일은 곧 예수였단다. 이건 아빠만의 생각이 아니야. 한국 기독교의 큰 별이라 할 김재준·문익환 목사 등이 하나같이 하신 말씀이야.

대한민국의 역사에서 아빠가 태어난 1970년은 전태일이라는 뭉툭한 이름과 그에 걸맞은 인상을 지닌, 그 이웃을 사랑하여 자신의 목숨을 내주는 큰 사랑으로 불타오른 한 노동자의 마지막 해였어. 하지만 그의 슬픈 종말은 창대한 역사의 시작이기도 했다. 바로 예수의 부활처럼. “한국의 하늘아/ 네 이름은 무엇이냐/ 내 이름은 전태일이다.” (문익환 목사)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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