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털 검색창에 ‘권희영’을 치면 연관 검색어로 ‘수출’이 붙는다. 9월14일 한 방송에서 “일제가 조선에 돈을 지불했으므로 쌀 수탈이 아니라 ‘수출’이 맞다”라는 요지의 발언을 해서다. 그는 가장 강력하게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주장해온 학자 중 한 명이다.

교학사가 만든 〈한국사〉 교과서의 대표 집필자이기도 한 권 교수는 이미 2년 전부터 국정제를 거론했다. 2013년 11월 한 세미나에서 “검인정 제도가 낫다고는 생각하지만, 지금처럼 특정 이데올로기를 주장하는 교과서 외에는 인정하지 않는 풍토에선 차라리 국정교과서로 가야 한다”라고 말했다. 이후 각종 포럼과 TV 토론회에 참석해 역사 교과서 국정화 지지 발언을 이어가고 있다. 같은 교학사 교과서 집필진인 이명희 공주대 교수가 ‘검정제와 국정제는 일장일단이 있다’고 말한 것과 대조된다(〈시사IN〉 제418호 ‘국가주도형 교과서’ 반대하던 교수님이 지금은…’ 기사 참조). 권 교수는 아직 공개되지 않은 국정교과서 근·현대사 부문 집필자로도 거론된다.

권희영 교수는 교육부 산하 기관인 한국학중앙연구원(한중연) 소속이다. 이 연구원에는 권 교수 말고도 국정화를 지지하는 학자가 더 있다. 2012년 대선 당시 박근혜 후보 캠프에 몸담은 이배용 원장이 대표적이다. 임명될 때부터 ‘낙하산 인사’ 논란에 휩싸인 이 원장은 10월30일 한 포럼에서 “국정교과서는 국가가 책임지고 석학들의 노력을 통해 과거의 아름다운 경험을 후세들에게 전하기 위함이다”라고 말했다. 이 연구원의 정영순 교수 역시 ‘올바른 역사 교과서를 지지하는 교수 모임’ 102인에 이름을 올렸다. 정 교수는 2013년 뉴라이트재단이 펴내는 계간지 〈시대정신〉 가을호에 기고한 글에서 교학사 교과서를 옹호한 바 있다.

ⓒ대한뉴스 갈무리1978년 6월30일 한국정신문화연구원(한중연의 전신) 개원식에 박정희 당시 대통령(가운데)과 ‘퍼스트레이디’ 구실을 하던 박근혜씨(맨 왼쪽)가 참석했다. 공사를 맡았던 이명박 당시 현대건설 사장(오른쪽 두 번째)의 모습도 보인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전신은 1978년 설립된 한국정신문화연구원(정문연)이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의지로 설립됐다. 정문연 개원식에는 박 전 대통령과 함께, ‘퍼스트레이디’ 구실을 하던 박근혜 대통령도 참석했다. 초대 이선근 원장은 박 전 대통령의 ‘역사 선생’이라 불렸다. 1970년대 초반 국무회의에서 박 전 대통령과 장관들에게 역사 강의를 했기 때문이다. 한 역사학자는 “당시 한국정신문화연구원은 정권 이데올로기를 개발하고 배포하는 목적에 충실했다. 역사뿐만 아니라 국어학·정치학 등 모든 분야가 관변 학자로 채워졌다. 오죽하면 ‘정신병연구원’이라고 불릴 정도였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듬해인 1979년 박 전 대통령이 사망하면서 정문연은 정권 비호라는 ‘본래 목적’을 적극 수행하지 못했다. 외국인에게는 그저 학비가 무료라는 점 때문에 해외 학자, 학생에게 인기 있는 연구기관으로 자리 잡았다. 정부는 2005년 ‘한국학 세계화 기관’을 목표로 정문연의 명칭을 한국학중앙연구원으로 변경했다. 오랫동안 평범한 연구기관이었던 한중연이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계기로 ‘태생적 정체성’을 드러내고 있는 셈이다. 민족문제연구소 박한용 교육홍보실장은 “정문연 시절처럼 한중연이 관변 학자들로 채워질 가능성도 없지 않다”라고 말했다.

그런 한중연에서도 내부 반발이 나왔다. 지난 10월27일 한국사학·고문헌관리학 교수 8명이 역사 국정교과서 집필 반대 성명을 냈다. 박병호 초빙교수와 권희영·정영순 교수를 제외하면 역사 관련 학과 교수 전원이다. 이들은 성명에서 “국정교과서는 폭압이 난무하는 20세기 역사의 산물로 (중략) 박물관에서나 찾을 수 있는 구시대적 유물이다”라고 밝혔다. “국정교과서 집필은 말할 것도 없고 제작과 관련한 연구·개발·심의 등 어떤 과정에도 참여하지 않을 것이다”라면서 집필 거부 선언도 덧붙였다. 10월30일에는 연구원 내 다른 전공 교수를 포함한 29인도 국정화 반대 성명을 발표했다. 전체 교수 62명 가운데 절반 가까이가 공개적으로 원장에게 반기를 든 모양새가 됐다.

ⓒ연합뉴스10월26일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왜 필요한가’ 조찬 세미나(새누리당 국가경쟁력강화포럼 주최)에 권희영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가운데)가 참석했다.

이례적인 일이다. 한중연은 교육부 산하 기관으로, 정부 출연 기금으로 운영된다. 교육부·문화체육관광부·기획재정부 차관이 당연직 이사다. 정권의 입김이 직접 닿는 구조다. 일례로 2013년 이배용 원장 선임 당시 민주당 박혜자 의원은 “이사회 회의록 분석 결과 단 30분 만에 원장 선임이 결정됐다”라고 주장했다. 한중연의 한 교수 역시 “우리 연구원은 교육부 출연 연구기관이기에 교수들이 가능하면 정부 정책에 대해 발언을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라고 인정했다.

한중연 교수 ‘절반’과 학생·졸업생들의 반대 성명

국정교과서 움직임은 이들조차 움직이게 만들었다. 한중연의 한 교수는 “이번 반대 성명에는 이전까지 어떤 성명에도 참여하지 않은 교수도 있다. 보수로 분류되는 분도 학교 눈 밖에 날 것을 무릅쓰고 참여했다”라고 설명했다. 익명을 요구한 한중연의 또 다른 교수는 〈시사IN〉과의 통화에서 “우리 교수들은 이번 성명을 개인이나 개별 학회가 아니라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의로 냈다. 이배용 원장이나 권희영 교수의 입장은 개인 의견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리고 싶어서다. 그들에게 동조하는 교수는 극소수다. 더는 참을 수 없다고 판단한 ‘조용한 다수’가 움직였다”라고 말했다.

학생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재학생·수료생·졸업생 129명이 11월3일 역사정의실천연대를 통해 성명을 냈다. 국정교과서가 비민주적이라는 비판이 골자였다. 이들은 “우리 한국학중앙연구원은 (중략) 과거 독재정권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역할을 했다는 비판을 받은 것이 사실이나, 이제는 지난 과오를 바로잡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라고 썼다. 성명에 이름을 올린 한 재학생은 〈시사IN〉과의 통화에서 “일부 교수들 때문에 한중연 전체가 국정화 찬성 집단으로 비치는 게 우려된다. 우리 연구원은 도제식으로 운영돼 학생 처지에서 나서기에 부담스러운데도 절반 이상이 성명에 참여했다. 실제 역사 교과서 국정화에 반대하는 학생 수는 훨씬 많다”라고 말했다. 권희영 교수 같은 국정화 찬성 견해는 한중연 전체의 분위기와 거리가 있다는 말이다.

1990년대 후반 한중연(당시 정문연)에서 수학했던 한 졸업생은 〈시사IN〉과의 통화에서 “모교의 퇴행이 걱정된다”라고 말했다. 그는 “내가 다니던 정문연은 공부만 할 수 있는 곳이었다. 정치적 성향을 드러내는 교수가 없지 않았지만 심각한 정도는 아니었다. 대다수가 반대하는 역사 교과서 국정화에 뒤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부끄러운 일이다. 앞장서서 정부 입장을 대변하는 교수들은 반성해야 한다. 졸업생들이 지켜볼 것이다”라고 말했다.

기자명 이상원 기자 다른기사 보기 prode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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