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나라 이웃 나라〉를 열심히 본 너는 영국의 메리 여왕을 알 거야. 숱한 사람들을 교수대로 보낸 무서운 여왕 블러디 메리, 즉 피의 메리로 기억할지도 모르겠구나. 하지만 메리 여왕은 ‘블러디 메리’라는 별명에 정색하고 항의할지도 몰라. “왜 나만 피의 메리냐. 여동생 엘리자베스는 어떻고 아버지 헨리 8세는 나보다 더했는데.”

마크 트웨인의 〈왕자와 거지〉에 등장하는 소년 왕 에드워드 6세가 어린 나이에 병사한 후 메리는 왕위에 올라. 스페인 공주의 딸이며 독실한 가톨릭교도였던 메리를 반대하는 세력도 만만치 않았고 반란도 일어나지. 하지만 메리는 국민의 지지를 바탕으로 반란을 진압해. 영국 국민은 가톨릭이냐 신교냐를 따지기에 앞서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녀를 동정했던 거야. “얼마나 불쌍해. 저 고귀한 여인이 계모의 딸을 돌보는 하녀 역할까지 했다니!” 헨리 8세의 후처 앤 불린은 메리에게 자신의 딸 엘리자베스를 돌보라고 명령했거든.

하지만 그녀는 아버지 헨리 8세와 남동생 에드워드 6세를 거치면서 뿌리를 내린 성공회를 부정하고 가톨릭으로 나라를 되돌리려는 무리한 시도를 하지. 거역하는 사람들에게는 용서가 없었고. 결정적으로 영국인을 화나게 한 사건이 발생하는데, 바로 스페인의 왕자이자 합스부르크 왕가 출신 필리페 왕자와의 결혼이었어. 그녀는 무려 열한 살이나 아래인 필리페 왕자에게 흠뻑 빠져서(만나보지도 않고!) 그와 결혼하겠다고 선언해. 여론은 크게 반발했고 와이어트라는 사람은 아예 반란을 일으켜서 런던으로 쳐들어오지만, 메리 여왕은 의연하게 대처해 반란을 진압하고 필리페와 결혼에 골인하게 돼.

메리 여왕은 남편 필리페에게 집착해 전쟁에까지 끼어들었다. 위는 필리페와 메리 여왕의 초상.

메리 여왕은 천신만고 끝에 필리페를 남편으로 맞았지만 정작 필리페는 이 헌신적인 여왕에게 무심했어. 어차피 정략결혼이었고 열한 살 위의 큰누나쯤 되는 메리에게 별 매력을 느끼지 못한 데다가, 영국 의회가 “메리가 먼저 죽어도 필리페는 왕위 계승권이 없으며 영국의 법률을 존중해야 한다”라는 둥 까다로운 조건을 내걸자 더 정나미가 떨어져버린 거지. 1년 정도 영국에서 머무른 뒤 스페인으로 돌아간 그는 아내를 거의 돌아보지 않아. 하지만 그럴수록 메리 여왕은 필리페에게 집착한단다.

그녀는 어떻게든 필리페의 아이를 낳고 싶어 했지. 하지만 그녀는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었고, 그런 마음과 몸의 부조화는 ‘상상임신’이라는 유감스러운 상황에 그녀를 몰아넣어. 한동안 사랑하는 이의 아이를 가졌다며 구름 위를 걷듯 기뻐했던 여왕은 곧 참담하게 자신의 처지를 깨달아야 했지. 이런 일이 몇 번이나 되풀이됐다니 메리 여왕의 집착이 얼마나 제 심신을 망가뜨렸을지 짐작할 수 있지 않겠니.

영국인들이 반대했던 결혼을 강행하면서 스페인을 따라 전쟁을 벌이지 않는다고 약속했던 메리 여왕이었지만, 의회의 완강한 반대를 무릅쓰고 스페인과 프랑스의 전쟁에 덥석 끼어들고 말았어. 간만에 영국을 방문하면서까지 ‘내 귀에 캔디’처럼 달콤하게 늘어놓는 서방님의 요청을 메리 여왕이 외면하지 못해서였지. 프랑스 왕은 엉거주춤 전쟁에 끼어든 영국에 날카로운 비수를 꽂아. 중세 100년 전쟁 이래 프랑스 땅에서 영국이 유일하게 점령하고 있던 도시 칼레를 공격한 거야. 번성하는 항구로 막대한 세금을 영국 왕에게 바치던 칼레, 영국의 대륙 최후 거점이라 할 칼레는 허무하게 함락되고 말아.

ⓒ연합뉴스10월27일 박근혜 대통령은 국회에서 열린 시정연설에서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강조했다.

메리에게도 칼레 함락의 충격은 컸어. 시름시름 앓다가 죽으면서 그녀는 이런 유언을 남겼단다. “죽고 난 후 내 심장에는 칼레와 필리페가 새겨져 있을 것이오.” 메리는 아무도 돌보지 않는 침대 위에서 누구의 애도도 받지 못한 채 쓸쓸히 죽어간단다. 이 소식을 들은 남편의 무정한 한마디. “메리의 죽음에 대해 일정 정도의 슬픔을 느꼈소(I felt a reasonable regret for her death).”

메리가 런던 뒷골목의 평범한 여인이었다면 그녀의 집착은 개인의 불행일 뿐이었겠지만, 여왕의 집착은 한 나라를 잘못된 길로 이끌었지. 어쩌면 그녀는 필리페와의 사랑이라는 허상의 포로였는지도 몰라. 불우한 어린 시절의 상처를 강력한 남자 필리페와의 사랑을 통해 씻으려 했고, 그와의 사랑은 그녀 인생 필생의 목표가 돼버렸지. 누가 말리려고 들면 더욱 불타올랐고, 반란 앞에서도 여왕다운 자세로 런던 시민을 감동시켰던 그녀의 총기는 집착의 불길에 녹아 없어지고 말았어. 또 그녀가 가진 종교적 신념을 국민들에게 강요하면서 ‘메리 여왕 만세’를 외치던 국민들의 기대를 저버렸고 말이야. 앙드레 모루아의 표현을 빌리면 “애정과 고집과 절대권력의 융합으로 생기는 혼란의 한 예”였지.

역사는 누군가의 효도 수단이 될 수 없다

박근혜 대통령의 국회 시정 연설을 들으면서 아빠는 메리 여왕을 떠올렸어. 메리 여왕의 이복 여동생 엘리자베스 여왕을 롤모델로 삼는다는 대통령께는 죄송한 말이지만 연설 말미에 등장하는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에 대한 뜨거운 ‘소신’에서 블러디 메리의 향기를 느낀 거야. 역사학자 90%가 반대하고 심지어 정부 출연 기관인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들도 고개를 젓고 보수 정권에서 국사편찬위원장을 지낸 분까지도 강력하게 이의를 제기하는 ‘국정화 교과서’를 ‘정상화 작업’이라고 지칭하려면 걸맞은 근거를 제시하셔야 해. 그런데 아무런 설명 없이 평생을 역사와 함께한 대다수 역사학자를 ‘비정상’으로, 국정교과서에 반대하는 국민을 ‘바로잡아야 할’ 대상으로 몰고 계시지 않겠니.

또 한번 외람된 이야기지만 이건 집착으로 보여. 박근혜 대통령은 정치에 뛰어든 이유로 “아버지의 명예 회복”을 든 적이 있어. 메리 여왕만큼, 아니 어쩌면 그 이상으로 불행한 가족사를 겪은 분으로서 한국 현대사에 좋든 나쁘든 큰 족적을 남긴 아버지에 대한 강한 애착이야 어쩔 수 없겠지. 하지만 부친 시대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가 애오라지 “역사를 잘못 가르친” 결과라고 생각하거나 “역사를 잘 가르치면” 과거에 대한 ‘자긍심’을 갖게 되리라고 믿는 건, “다시 가톨릭!”을 부르짖어 종교개혁 이전의 시대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 메리 여왕만큼이나 비현실적인 얘기일 거야. 메리가 필리페 왕자라는 허상에 매달려 그에 집착한 순간 한 사람의 여자로서도 왕으로서도 불행해졌듯이 객관적인 역사의 평가에 맡겨야 할 부친의 ‘명예’ 회복에 매달린다면 그건 딸로서도, 그리고 한 나라의 대통령으로서도 비극적인 일이 아닐까?

역사란 누군가의 효도 수단이 될 수도 없고 자긍심의 재료로 쓰여서도 안 되며 명예 회복의 도구로 전락해서도 안 되는 우리 모두의 거울이란다. 우리가 거울을 보는 건 못생겼다고 좌절하려 함도 아니고 잘생겼다고 우쭐하려 함도 아니야. 단지 우리 모습을 그대로 보기 위해서란다. 대통령님도 그걸 이해하셨으면 좋겠다. 메리 여왕처럼 불행하지도 외롭지도 않으셨으면 좋겠다. 그분의 가슴에 ‘국정교과서’와 ‘아버지’가 새겨져 있다면 그건 그분만의 불행으로 끝나지 않을 테니까.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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