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래 나는 교육운동과 전혀 관계가 없는 평범한 영어 교사였다. 그런데 2008년 9월 우연히 사교육걱정없는세상에서 주최한 ‘영어 사교육 광풍 속에서 살아남기’라는 토론회에 청중으로 왔다가 ‘낚이고’ 말았다. 토론회 내용이 너무 마음에 와닿아 홈페이지에 길게 후기를 남긴 것이 인연이 돼 영어사교육포럼 부대표를 맡게 된 것이다. 2010년에는 아예 다니던 학교를 휴직하고 사교육걱정없는세상 상근 정책실장으로 일하면서 선행교육금지법(공교육 정상화 촉진 및 선행교육 규제에 관한 특별법)을 통과시키는 등 굵직굵직한 교육 사안을 다루는 데 함께하는 행운도 누렸다. 2013년 학교로 돌아간 뒤로는 다시 교사로서의 일상을 만끽하고 있다. 중3 아이를 키우는 평범한 부모이기도 하다. 그런 만큼 오늘은 자녀를 키우며 일상에서 부딪히게 되는 교육정책들에 대해 얘기해보려 한다.

교육정책을 얘기하기 위해서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만나게 되는, 잘못된 정보와 의식으로 인한 ‘거품 사교육’ 문제를 먼저 짚어봐야 할 것 같다. 언론을 보니 ‘유유익선(幼幼益善)’이라는 말이 나오더라. 영어를 좀 더 어린 나이에 배울수록 좋다는 뜻의 신조어다. 한 설문조사를 보니 현재 유치원생을 둔 학부모의 경우 영어 사교육을 만 3세에 처음 시작했다는 응답이 가장 높게 나왔다(35.3%). 반면 현재 고등학교에 재학 중인 자녀를 둔 학부모의 경우에는 초등 3학년 때 영어 교육을 처음 시작했다는 응답이 가장 많았다(31.3%). 유치원 시절 영어를 가르쳤다는 응답은 3.2%에 불과했다. 유치원 시기 영어 사교육을 처음 시작했다는 응답이 불과 10여 년 사이에 11배 가까이 늘어난 것이다.

 

ⓒ시사IN 윤무영김승현 교사는 “우리 아이나 다음 세대가 자라는 데 공덕을 쌓기 위해 부모 세대가 나서서 역할을 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대학생보다 많은 초등학생의 학습시간

그런가 하면 초등학교 3, 4학년께부터는 수학 사교육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지난해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이 13개 유명 학원을 조사해보니, 이들 학원의 수학 선행학습 정도가 4.2년에 달했다. 초등학교 6학년생이 중3~고1 수준의 학습을 하고 있다는 얘기다. 그 결과 아이들은 불행하다. 영국의 ‘칠드런 소사이어티’ 조사 결과에 따르면, 한국 어린이의 행복지수는 OECD 국가 중 최하위였다. 얼마 전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아동·청소년의 ‘놀 권리’ 보장방안 모색 토론회”가 열리기도 했다. 교육 문제가 결국에는 인권 의제가 된 것이다. 초등학생의 하루 평균 학습시간 또한 5시간23분으로 대학생(4시간10분)보다 많다.

이런 사교육이 효과가 있으면 또 모르겠다. EBS가 한국인·외국인 10여 명을 모아놓고 한 60대 한국인 남자가 영어로 연설하는 내용을 들려준 뒤 감상을 묻는 실험을 벌인 일이 있다(〈언어 발달의 수수께끼〉). 한국인 참가자들은 한결같이 “발음이 너무 촌스럽다”라며 연설에 40~50점을 주었다. 반면 외국인들은 “어휘가 풍부하고 문장구조가 튼튼하다”라며 90점대 점수를 주었다. 이 연설의 주인공은?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다. 유창한 발음은 보너스일 뿐 영어를 할 때 정작 중요한 것은 대화 능력과 의사전달 능력임을 부모들이 간과하는 것이다. 수학도 마찬가지다. 수학 사교육이 극성을 부리는 한편에서 수포자(수학 포기자)가 속출한다. 사교육걱정없는세상 조사에 따르면 초등학생의 36.5%, 중학생의 46.2%가 스스로를 수포자라 여긴다.

이렇게 거품이 낀 사교육은 멈춰야 한다. 개인이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상황이라면 법과 제도를 통해서라도 멈추게 해야 한다.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이 선행교육규제법을 추진할 때 부정적인 시선을 가진 분도 많았다. 선행교육을 규제하기에 앞서 학교 교육이 정상화되고 부모나 사회 전반의 의식이 바뀌어야 한다고들 했다. 맞는 말씀이다. 그러나 현재의 교육 상황은 전쟁터다. 극장에서 모두 일어나 영화를 보는 상황에서 어느 한 개인이 “자리에 앉자”라고 소리쳐봐야 얼마나 상황이 바뀔 수 있을까. 그러니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 이를 제도화하자는 것이다. 최소한의 규제가 있어야 학교 교육도 정상화될 수 있다. 더욱이 선행교육규제법은 법으로 제정된 만큼 정권이 바뀌어도 흔들리지 않는 안정성을 확보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유아 사교육을 규제하는 영유아특별법도 제정할 필요가 있다는 게 요즘 생각이다. 위헌 소지가 있다는 반론도 있겠지만 영유아 인권이라는 차원에서 종합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법·제도의 개선을 얘기하려면 아무래도 대입제도가 핵심이 될 것이다. 거품 낀 사교육이나 서열화된 고교 체제의 문제가 여기에서 시작하기 때문이다. 서열화된 고교 체제는 아이들을 불행하게 만든다. 동네마다 자사고가 생긴 뒤 일반고에 진학하는 중학생들이 열패감에 시달린다는 보도가 많이 나오던데, 사실 학교 현장에서 만나는 중학생들은 여전히 밝고 선하다. 문제는 지난 강의에서 오찬호 선생님이 말했듯 ‘차별에 찬성하는 대학생’ 또한 이렇게 선하게 자라난 아이들이라는 것이다. 사회가 병들면 개인도 병든다고 했다. 서열화된 고교 체제가 우리 사회에 끼치는 폐해를 돌아보고 이를 멈추게 할 방법을 찾을 필요가 있다. 힘든 것은 일반고 아이들만이 아니다. 외고 면접 문제를 보니 “동물농장에서 돼지들의 행동과 자신이 생각하는 리더의 모습을 말하시오” “외교관이 되어 기아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 말하시오” 등이 출제됐던데, 이 나이대 아이들이 왜 꼭 외교관 입장에서 기아 문제를 생각해야 하나?

서열화된 고교 체제는 정의롭지도 못하다. 외부 입상 실적을 기재하지 못하게 하는 등 특목고·자사고 입시전형이 바뀌면서 고교 진입 단계에서 벌어지던 경쟁은 크게 줄었지만 전반적인 격차는 여전히 해소되지 않고 남아 있다. 주요 상위권 대학에 진학하는 특목고·자사고 출신 비율과 일반고 출신 비율이 갈수록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빠듯하게 영어 학습지 구독하는 아이와 방학 때면 영국이나 미국에서 지내는 아이가 영어 성적 경쟁을 하면 누가 이길까요? 그건 경쟁이 아닙니다. 그걸 경쟁이라고 말한다면 사람을 조롱하는 일이죠”라고 김규항씨는 말한다. 이런 기회의 불평등, 과정의 불평등이 서열화된 고교 체제를 거쳐 대학입시 결과에 반영되면서 불평등을 더 고착화하고 있다.

자사고(자율형사립고)건 일반고건 그 학교 자체의 특성이나 선호도 때문에 해당 학교를 선택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보통은 대입 전형에 유리한지를 따져 고교 진학을 결정한다. 나도 아이가 중3이다 보니 “고등학교는 어디로 보낼 거냐?” 하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나는 개인적으로 특목고나 자사고에 아이를 보낼 생각이 없다. 일단은 빚이 좀 있어 학비가 비싼 학교는 어렵다(웃음). 특목고나 자사고 트랙을 밟으려면 부모가 각종 정보에 밝고 아이도 잘 관리해야 하는데 우리 부부 성향이 그렇지도 못하다. 더 중요한 것은 일반고 출신이 대학 갈 때 특목고·자사고 출신에 비해 유리한 전형 분야가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학생부 종합전형 등에 유리한 내신 상대평가 제도가 그것이다. 이것이 그나마 지금의 일반고를 지탱하고 있다.  

 

ⓒ연합뉴스내신을 절대평가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이 있지만 학교 간·지역 간 격차가 있는 상황에서 이는 일반고 학생의 피해로 이어질 수 있다. 위는 2015년 전국연합학력평가가 치러지는 한 고교 교실.

내신을 상대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비교육적이라는 건 누구나 동의할 것이다. 김영삼 정부의 5·31 교육개혁 이후 교육 현장에 일관되게 유지돼온 흐름이 한 가지 있다면, 그것은 점수 위주 선발제도를 탈피하자는 것이었다. 그 연장선에서 김대중 정부 때 특기자 전형이 도입됐고, 참여정부 때 입학사정관제가 논의됐으며, 이명박 정부 때 이를 도입하고 학생부 종합전형을 확대했다. 박근혜 정부 들어서는 수능 영어에 절대평가를 도입했다.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은 영어뿐 아니라 수능 전반이 절대평가로 바뀌어야 줄 세우기를 탈피할 수 있다고 주장해왔다. 그렇지만 이 때문에 내신 상대평가 또한 절대평가로 바꿔야 한다? 이는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지금처럼 학교 간·지역 간 격차가 벌어져 있는 상황에서 내신만 절대평가로 바뀌면 일반고 학생들이 피해를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내신 절대평가 도입의 대전제는 고교 체제의 변화여야 한다. 물론 고교 체제의 다양성이 보장되고, 교육 소비자의 선택권이 보장돼야 한다는 주장에도 일리는 있다. 그러나 우리는 결국 좀 더 중요한 것을 선택해야만 한다. 그런 다음 장점은 살리고 단점은 보완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 것이다. ‘수직적 다양성’에서 ‘수평적 다양성’으로, 그것이 고교 체제가 변화할 방향이라고 본다.

대입 전형 방식은 ‘3+1’로 가야 한다는 게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의 주장이다. △대학별 논술고사 △스펙 자료 △수능 최저기준이라는 세 가지 독소조항은 빼고, 한 가지(학생부 교과 심층평가전형)는 보완하라는 주장이다. 사교육 없이는 대비하기 힘든 논술고사를 치르면서 한편으로 수능 최저기준을 요구하는 방식은 바뀔 필요가 있다. 장기적으로 볼 때 수능은 절대평가화하고, 논술은 대폭 축소하거나 폐지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 대신 학생부 교과 비중은 유지해 아이들이 학교에서 배우는 시간이 좀 더 의미 있어졌으면 한다.

개인적으로는 흔히 입학사정관제 전형으로 알려진 비교과 전형도 줄여가야 한다고 본다. 학술제 같은 비교과 활동이 학교에서 개최될 때 대다수 학생은 들러리를 설 뿐이다. 교사나 학생이나 활동에 참여하는 동기 자체가 순수하지 않은 것이다. 더 근본적으로는 대학을 왜 취업하듯 진학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대학은 공부하러, 성장하러 가는 곳인데 왜 구직활동 하듯 자소서(자기소개서)를 쓰고 자기가 살아온 얘기를 분칠해야 하느냐는 것이다.

캘리포니아 주립대학(UC)이 학생들을 뽑는 시스템을 보며 감탄한 일이 있다. UC 계열 10개 학교의 경우 고교 성적이 상위 12.5% 이내면 입학 적격자로 평가한다고 한다. 곧 전교생의 8분의 1 안에 들면 UC 계열 학교 아무 데나 입학할 수 있는 것이다. 그보다 낮은 성적을 거둔 학생도 일단 초급 대학에 입학했다가 열심히 하면 UC에 편입할 수 있다. 학생들에게 다양한 기회가 열려 있는 셈이다.

인기 학과는 추첨 선발을 하는 네덜란드

그런가 하면 네덜란드의 경우 의학과·치의학과 등 지원자가 몰리는 인기 학과는 아예 추첨 선발을 한다고 한다. 일정한 자격 요건은 따지되 이들 요건을 충족한 학생들을 1점 차이로 미세하게 가르는 대신 추첨으로 입학 여부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중앙대 강태준 교수는 한 토론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타당하지 않은 커트라인을 부각시켜 대학 서열을 과장하고 학벌주의를 온존시키는 것은 반사회적이다. (중략) 대입 전형 자료는 근본적으로 부분적이며 불완전하다. 이런 자료를 근거로 매우 미세하게 사정하는 것이 결코 타당하거나 공정하다고 보장할 수 없다. 그렇다면 타당하고 공정하다고 확신할 수 있는 지점까지만 지원자들을 평정하고, 다음 단계에서는 전적으로 편견을 배제하는 결정 방식을 취하는 것이 정직하고 공평하다. 이 후자의 방식이 추첨일 수 있다.”

보수적인 교육학자마저 추첨 선발을 논할 만큼 현행 대입 전형 방식에는 문제가 많다. 그런 만큼 대학 서열 자체를 완화하는 대입 전형 방식을 새롭게 상상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평범한 개인으로서 교육정책을 바꾸기 위해 희생까지는 못하겠지만 그래도 도리는 하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전문가에게만 맡겨둘 일이 아니다. 우리 아이나 다음 세대가 자라는 데 공덕을 쌓기 위해 부모 세대가 직접 나서서 그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정리·김은남 기자

기자명 김승현 (숭실고 교사·사교육걱정없는세상 정책실장)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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