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홍 (법무법인 지평 변호사)
19세기 말 아일랜드에서는 소작료 인하를 놓고 소작인과 지주가 팽팽하게 대립했다. 그 중 한 지주의 마름이었던 찰스 보이콧은 소작료 인하를 요구하는 소작인을 소작지에서 모두 내쫓았다. 소작인이 폭동을 일으키면 영주의 군대가 진압할 상황이었다. 이때 소작료 인하 운동을 주도한 찰스 파넬은 폭력 대신 지역 주민에게 보이콧과는 거래를 하지 말아달라고 설득한다. 결국 전체 소작인에게 배척당한 보이콧은 영지를 떠나게 된다. 그의 이름은 다수가 공동으로 특정인에 대해 거래를 거절하는 운동을 지칭하게 되었다.

요즘 뜨거운 감자인 조선·중앙·동아일보 광고주에 대한 불매운동도 ‘보이콧’의 일종이다. 보이콧은 그 오랜 역사만큼이나 다양한 주체에 의해, 다양한 목적을 위해 행사되어 왔다. 노예 노동력을 이용하는 기업에 대한 불매운동이나, 영국에서 수입하는 차 불매운동은 노예제 폐지와 미국의 독립이라는 역사적 결과를 낳기도 했다. 반면 나치 정부의 유대인 기업 물품 불매운동처럼 인종차별적 집단행동에 이용되기도 했다.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보이콧,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 보이콧처럼 미국과 소련을 주축으로 한 동서양 진영의 냉전 수단으로도 활용됐다.

보이콧의 정당성을 두고 보수 세력과 진보 세력은 그때그때 견해를 달리해왔다. 2005년 황우석 사건을 보도한 MBC 〈PD수첩〉에 대한 광고주 불매운동이 한창일 때 보수 언론은 침묵으로 이에 동조했다. 반면 진보 언론은 언론에 대한 재갈 물리기 시도라며 염려했다.
그러나 최근 광고주 불매운동으로 큰 타격을 입은 조·중·동 등 보수 언론은 언론에 대한 ‘테러’ ‘폭력’이라고 아우성치는 반면, 진보 언론은 헌법에 보장된 소비자 운동이라며 적극 옹호한다. 똑같은 불매운동이지만 그 목적이 무엇인지와 찬반 여부에 따라서 전혀 다른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뉴시스지난 6월27일 서울중앙지검에서 열린 ‘사이버 폭력 유관기관 대책회의’.
그때그때 달랐던 보수 언론과 진보 언론

그렇다면 ‘객관적 무기’인 보이콧은 어떻게 규율해야 할까. 보이콧도 누가 어떠한 목적으로 사용하느냐에 따라 약이 되거나 독이 될 수 있다. 문제는 그것이 약인지 독인지 쉽게 판단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혹은 사람에 따라 약으로 보는 사람도 있고 독으로 보는 사람도 있다. 이것은 무엇이 진리이고 선인지 판단해줄 절대자가 없는 민주주의의 원죄다.

이같은 민주주의의 본질적 한계를 극복하는 길은 다시 민주주의로 돌아가는 방법뿐이다. 보이콧의 동기에 대해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고 시민이 참여 여부를 판단하게 하는 것이다. 그 방법이나 수단에 기망과 폭행·협박 같은 불법적 요소가 개입되지 않는 이상, 보이콧 권유는 보장되어야 한다. 물론 다수가 항상 옳을 수는 없지만 선택된 소수가 불특정 다수보다 낫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바로 민주주의의 출발점이다.

광고주 불매운동으로 조·중·동의 광고가 꽤 감소했다고 한다. 조·중·동이 시민과 광고주로부터 신뢰를 듬뿍 받았다면, 성난 누리꾼이 아무리 불매운동을 하겠다고 해도 광고가 줄어들 리 없다. 많은 시민이 동참했기에 광고를 철회한 것이고 이는 다수에 의해 보이콧의 정당성이 확인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보이콧 주창자를 처벌해서는 안 된다. 21세기의 검찰이, 중세 말 영주의 군대도 내버려두었던 보이콧을 출국 금지와 구속이라는 폭력적 수단을 동원해 진압하는 것은 시대착오이다.

기자명 김지홍 (법무법인 지평 변호사)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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