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 스토리


“역사학자 90%좌파” 발언의 뿌리


10년 전과 확 달라진 대통령의 역사인식


국정화 교과서가 수능부담 줄인다?


주체사상 가르치는 금성 교과서 뜯어보기

 

2006년 2월,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이하 ‘재인식’)이라는 책이 세상에 나왔다. 식민지 시기와 해방 후를 다룬 논문 28편을 모은 초대형 프로젝트다. 노무현 정부 시절이던 출간 때부터 ‘뉴라이트의 현대사 교과서’로 불리며 논란을 일으켰다. 분량만 1500쪽에 이르는 전문 연구서이지만, 10년이 지난 지금도 보수층에서 “좌익의 역사 왜곡을 물리치기 위한” 필독서로 꼽힌다. 연세대 김철 교수(국문학)는 이 ‘재인식’의 편집자 4인 중 한 명이다.

2015년 9월21일, 연세대 인문·사회 분야 교수 132명이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에 반대하는 연세대 교수 성명’을 냈다. 성명서는 “국정화를 추진하는 것은 학계 다수의 해석을 부정하고 권력의 해석을 강요하려는 시도”라는 단호한 표현을 썼다. 132명 명단 중에 김철 교수가 있다. 그저 이름을 올린 정도가 아니라 준비 단계부터 움직인 것으로 알려졌다.

‘뉴라이트 교과서’의 편집자가 박근혜 정부의 역사 교과서 국정화에 이름을 걸고 반대한다? 논란을 진영 대결(‘친일 독재 미화 교과서’ 대 ‘주체사상 찬양 교과서’)로 이해하면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는 이야기다. ‘전향’이라도 한 걸까.

김철 교수는 학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전향’과 같은 표현을 납득하지 못한다. 애초에 ‘재인식’을 뉴라이트 교과서라고 부르는 이들에게도 단호히 항의하던 그다. 연세대 연구실에서 만난 김 교수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저 제자리에 서 있었는데, 2006년이나 지금이나 방향만 바뀐 채로 똑같은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중요한 질문은 무엇이 ‘올바른 역사’인지 국가가 결정하도록 두어도 되느냐다.”

 

ⓒ시사IN 신선영10월12일 황우여 교육부 장관이 교과서 국정화 방안을 발표하는 기자회견장에는 “올바른 역사관 확립을 위한 교과서를 만들겠습니다”라는 문구가 걸려 있었다.

교과서 국정화를 둘러싼 여론 전선은 대체로 이념 지형을 따라 늘어서는 추세다. 진보는 교과서 국정화로 박근혜 정부가 ‘친일·독재 미화 교과서’를 만들 것이라고 주장한다. “아버지 제사상에 올릴 교과서”라는 야유도 등장했다. 보수는 현재 교과서 대부분이 북한의 주체사상을 가르치는 등 친북 색채가 강하고, 대한민국의 성취를 제대로 소개하지 않는 자학사관에 빠져 있다고 주장한다.

난제가 있다. 진보 처지에서 보면, 국정 역사 교과서가 출판은커녕 집필진도 확정되지 않았다. 2017년 도입 목표를 맞추려면 부실 집필이 예상된다는 비판은 유력하지만, 내용 논란은 현 시점에서 넘겨짚기 이상의 의미를 갖기 힘들다. 역사 교과서가 보수적이면 미래 세대가 보수적이 된다는 암묵적인 전제도 깔려 있는데, 증명이 불가능한 가설 수준의 얘기다.

진보·보수 떠나 ‘국정화 논쟁’의 핵심 맥은…

보수의 처지에서 보면, 현행 교과서가 친북 색채가 강하다는 주장의 근거가 취약하다. 정부와 새누리당이 파상 공세를 펴는 ‘교과서 왜곡 사례’를 실제로 살펴보면 앞뒤 문맥을 잘라낸 자의적인 해석이 대부분이다(교과서에 주체사상? 실제로 살펴보니 참조). 보수도 ‘좌편향 교과서 때문에 청소년이 좌편향되고 있다’라는, 역시 검증 불가능한 주장에 기댄다. 생산적인 논의가 될 리 없는 구도다. “무엇이 ‘올바른 역사’인지 국가가 결정하도록 두어도 되느냐”라는 김철 교수의 질문은 그래서 시의적절하다. 넘겨짚기와 자의적 오독을 걸러내고도 교과서 국정화 논쟁의 핵심 맥을 짚는다.

‘올바른 교과서.’ 교육부가 내놓은 역사 국정교과서 공식 명칭이다. 10월12일 교과서 국정화 방안을 발표하면서 교육부는 기자회견 제목을 “올바른 역사관 확립을 위한 교과서를 만들겠습니다”라고 뽑았다.

‘올바른 역사관’의 정의가 뭘까? 황우여 교육부 장관의 발표문을 보면, 크게 두 축이다. 첫째, 객관적 사실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 둘째, 헌법 가치에 충실해야 한다. 교육부의 국정화 추진 보도자료도 비슷하다. “역사 교과서가 검정제 도입 이후 국민을 통합하고 헌법 가치인 자유민주주의에 기초한 건전한 국가관과 균형 있는 역사 인식을 기르는 데 기여하지 못했다” “각종 사실 오류와 편향성을 바로잡아 올바른 역사관을 확립하기 위한 교과서를 보급하기 위하여 노력하였지만 (검정제로는) 근본적인 한계가 존재했다.”

정론처럼 보이지만 동어반복이다. 교육부의 논리에서는 ‘무엇이 객관적 사실인가’와 ‘헌법 가치에 맞는 역사 해석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다시 남는다. 무엇이 올바른가를 판단할 권한을 결국 누군가는 갖게 된다. 교과서 국정화라는 발상은 ‘올바른 역사’가 무엇인지를 국가가 판단하겠다는 선언이다.

학문의 영역에서 ‘무엇이 올바른가’를 판단하는 방법은 이와는 정반대다. 경쟁하는 이론과 가설이 자유롭게 부딪치고, 사실과 논리에 따른 토론이 벌어지며, 학문공동체가 합의하는 정론이 등장한다. 국가의 개입은 ‘경쟁하는 이론과 가설’의 뿌리를 뽑아버리고 국가 공인 이론 하나만 남기기 때문에, 무엇이 올바른가를 판단하는 데 방해가 된다. 교육부가 ‘경쟁하는 가설이 있으면 병기하겠다’라고는 밝혔지만, 학문 공론장에서의 경쟁과 정부의 편집을 거친 병기는 차원이 다른 얘기다.

다른 분야 학자들도 ‘국정화’에 분노하는 이유

역사학계를 넘어 다른 분야의 학자들도 교과서 국정화 문제에 관심을 갖고 분노하는 대목이 여기다. 서울대 국제대학원 이근 교수(국제정치학)는 〈경향신문〉 칼럼에서 “한국사 교과서의 국정화 발상은 ‘무오류성’을 지향하고 있다”라고 비판했다. 기타큐슈 대학 이동준 교수(국제관계학)는 〈한국일보〉 칼럼에서 국정화를 밀어붙이는 정부의 태도를 ‘반(反)지성주의’로 규정했다. “‘올바른’ 교과서를 만들자면서도 무엇이 올바른지에 대한 그 어떤 지적인 토론도 불허하겠다는 것이다. (…) 권력자들은 모든 쟁점에 대한 ‘정답’을 알고 있다는 듯 결정을 내린다.”

 

ⓒ연합뉴스현행 고교 한국사 검정교과서(위)에는 2013년 교육부가 내린 수정명령이 모두 반영된 상태다.

이 ‘정답을 알고 있다’는 태도를 박근혜 대통령이 정확히 보여주었다. 10월13일 박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올바른 역사 교육을 통해서 우리 아이들이 우리 역사를 바르게 인식하고 올바른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자긍심과 자부심을 갖고 자라나도록 가르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바르다’는 표현이 한 문장에만 세 번 등장한다.

지식의 ‘정본’을 국가가 정할 수 있다는 발상을 누구보다 혐오했던 사상가가 있다. 보수 인사들이 사상적 원조로 즐겨 인용하는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다. 주저 〈노예의 길〉에서 하이에크는 전체주의 사회를 이렇게 야유한다. “사실과 이론은 당연히 ‘공식적 교리’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지식을 전파하는 모든 기관은 당국이 정한 결정이 올바르다는 믿음을 확산시킬 것이다. (…) 전체주의에서는 정치적 견해에 직접 영향을 주는 역사, 법, 경제학과 같은 학문에서 단지 공식 견해에 대한 옹호만이 유일하게 허용될 뿐이다. 이 분야에서는 진리의 탐색조차 불가능하며, 당국이 어떤 교리를 가르치고 출판할지 결정한다.” 하이에크의 눈에 국가가 지식의 ‘정본’을 정한다는 발상은 전체주의와 동의어였다.

김철 교수는 좌우 모두에 좌절한 경험이 있다. 2006년 ‘재인식’을 출간하면서 ‘뉴라이트 교과서’라는 동의할 수 없는 딱지 붙이기에 시달렸다. 2015년에는 교과서 국정화라는 퇴행을 지켜봐야 했다. “역사가 ‘이야기’라고 한다면, 자기가 원하는 버전의 이야기만 옳고 정본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진보·보수 양쪽에 다 있다. 한쪽은 무조건 ‘친일·독재 미화 교과서’ 반대쪽은 또 무조건 ‘북한 찬양 교과서’…. 이건 학문적 대화가 아니다. 그냥 종교전쟁이다.”

국정교과서 집필 보이콧 선언이 역사학계에 번져 나가는 가운데, 김정배 국사편찬위원장이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근현대사는 역사가만이 아니라 정치사·경제사·사회·문화 전반을 아우르는 분들을 초빙해서 구성할 것이다.” 정치학이나 경제학을 전공한 사회과학자들도 필진으로 참여시키겠다는 얘기다.

이 발언은 한국의 보수 블록이 역사학계를 보는 시각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좀 더 노골적인 속내는 ‘재인식’ 2권 편집자 4인의 대담에서 드러난다. 이 대담에서, 지금은 고인이 된 성균관대 김일영 교수(정치외교학)는 “한국의 역사 연구와 서술에 스탈린주의적 편향이 아직도 남아 있다. 역사 연구가 현실 과제를 해결하는 전략·전술에 봉사해야 한다는 생각이 그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이 평가가 얼마나 적절한지를 떠나서, 이런 정서가 보수 블록에 폭넓게 퍼져 있다. ‘재인식’에 필진으로 참여한 연구자 28명 중 역사학 전공자는 열 명도 되지 않는다.

김무성 새누리당 대표나 고영주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이 내놓은 “역사학자의 90%가 좌파다”와 같은 발언은 거친 데다가 사실도 아니지만, 뿌리를 더듬어 내려가 보면 이런 정서에 기대고 있다. 언론인 류근일씨는 10월13일자 〈조선일보〉 칼럼에서 특유의 노골적인 표현으로 “관련 학계와 연구자들 등 1만5000명이 그런 쪽(자학사관)으로 한 패거리가 돼 돌아가고 있다”라고 썼다. 보수 일각의 이런 관점에서 보면, 국정화란 비상시국이기 때문에 가능한 극약처방이다. 다시 류근일 칼럼의 한 대목이다. “자율의 시장을 열었더니 자율을 파괴하는 세력이 그 공간을 독차지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이 대목에서 ‘국정화를 지지하는 강경파’와 반대 블록의 결이 결정적으로 갈라진다. 한국 역사학계가 폐쇄적이라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그에 동의하는 사람조차도 국정화 반대 전선에 설 수 있다. 국정화는 극약처방이 아니라 그 자체로 독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합리적이라는 평을 받는 보수 인사들에게는 “대안적인 검정교과서를 내실 있게 만들어서 보급하면 될 일을 왜 이렇게 무리를 하는지 모르겠다”라는 말을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다. 자신이 지지하는 이야기를 정본으로 만들겠다는 종교전쟁에, 이번에는 국가가 직접 뛰어들었다.

 

기자명 천관율 기자 다른기사 보기 yul@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