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기억하는 사람이 없겠지만,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대선 때 지역 유권자에게 특별한 애정을 보였다. 재원 조달 3대 원칙 중 하나가 ‘지방재정 부담 충분히 감안’이었다. 공약에 필요한 중앙정부의 지출만을 계산하는 상대 후보를 비판하면서 자신은 지자체 소요액까지 책임지겠다고 천명했다. 구체적으로 지방세 확대, 복지사업에 대한 국고보조율 인상 등을 명시하고, 만약 복지 확대로 지자체의 재정이 부족하면 추가 지원하겠다는 확인 문구까지 덧붙였다.

결과는 우리 모두가 아는 대로다. 인수위원회부터 기초연금, 3대 비급여, 저임금노동자 사회보험료 전액 지원, 고교 무상교육 등 핵심 공약을 축소하거나 폐기하더니 그토록 애정을 가진 듯했던 지방정부 재정 지원 약속마저 내버렸다. 지자체에 이전하는 중앙정부의 지방교부금은 취임 이후 올해까지 거의 제자리다. 가장 큰 복지 공약인 기초연금의 국고보조율도 오르지 않았다. 누리과정 예산 전체를 각 교육청에 떠맡기면서 예산 충당 요청은 계속 무시한다. 박근혜 정부에서 지자체와 교육청이 책임져야 할 복지 예산은 늘어가지만 중앙정부의 재정 지원은 그대로이니 지방정부로선 더 이상 허리띠를 졸라매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여기가 끝이 아니다. 지난 8월 박근혜 정부는 ‘지자체 유사·중복 사회보장사업 정비지침’을 발송해 지자체가 재량껏 벌이고 있는 복지 사업을 축소하거나 중단하라고 사실상 ‘명령’했다. 자체 복지사업 5891개 중 1496개, 금액으로 약 1조원에 해당하는 복지사업이 대상이다. 이에 따르지 않을 경우 지방교부금을 감액하는 내용을 담은 지방교부세법 시행령 개정안도 입법 예고했다.

여기서 핵심은 유사·중복 사업을 결정하는 잣대다. 중앙정부가 행하는 사업과 취지가 비슷한 지자체 복지사업이 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예산이 낭비되는 이중 복지인가, 빈약한 중앙정부의 복지를 보완하는 보충 복지인가? 정부는 전자라 답한다. 아니 그렇게 일방적으로 선언한다.

유사·중복 사업의 대표 사례로 제시된 지자체의 저소득 계층 건강보험료 지원을 보자. 보통 보험료가 월 1만~1만5000원 미만인 가구가 대상이다. 정부는 건강보험공단의 보험료 경감제도가 있는데 왜 지자체가 추가로 보험료를 지원하느냐고 지적한다. 하지만 사업 대상이 꼭 일치하지는 않는다. 설령 일부가 그러하더라도 이들은 남은 보험료조차 내기 어려운 사람들이다. 현재 돈이 없어서 건강보험료를 내지 못하는 생계형 체납자가 100만명에 이른다. 이러한 현실에서 지자체가 자기들 주민을 챙기겠다고 나섰는데 이것이 불필요한 일인가?

서울시는 2013년부터 ‘서울형 기초보장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기초생활보장제도 사각지대에 있는 시민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고자 서울시가 발 벗고 나선 사업이다. 최저생계비 미만 상태에 있으나 부양의무자제도 때문에 기초생활보장 수급자가 되지 못한 가구에게 일부 생계지원금을 제공한다. 경기도는 기초생활보장 수급 노인에게 동절기에 월 5만원씩 난방비를 지원한다. 겨울에 더 어려움을 겪는 빈곤 노인을 도우려는 지자체의 노력이 깃든 사업이다. 현재 중앙정부가 중증 장애인에게 제공하는 활동보조 시간은 하루 12시간으로 제한된다. 24시간 보장은 장애인들의 오랜 숙원이고 박근혜 대통령의 공약이기도 하지만 아직까지 개선되지 않고 있다. 다행히 여러 지자체가 몇 시간씩 추가로 활동보조 시간을 지원하는 사업을 벌인다.

중앙정부의 복지 틈새를 메우는 사업인데…

왜 지자체들이 저소득 계층에 건강보험료와 생계지원금을 지급하고, 동절기 난방비, 활동보조 시간 지원에 나설까? 예산에 여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중앙정부의 복지가 여전히 빈약하고 사각지대가 방치되고 있기 때문이다.

중앙정부가 지적하는 유사·중복 복지사업들은 불필요한 이중 복지가 아니라 절실한 보충 복지이다. 지방자치의 성과를 보여주는 소중한 열매이기도 하다. 지역의 어려운 주민을 위한 사업이고, 중앙정부의 복지 틈새를 메우는 사업이며, 지자체가 전액 예산을 조달하는 사업이다. 당연히 조례에 근거하거나 지방의회 예산안 심의를 거쳐 진행된다. 이 사업을 시행하는 지자체가 받을 건 벌이 아니라 상이다. 중앙정부에 제안한다. 정 폐지하고 축소하고 싶다면 지방자치에 맞게 지역주민이 결정하게 하라. 그리고 요구한다. 대선 공약대로 지자체에 복지 재정을 지원하라.

기자명 오건호 (내가만드는복지국가 공동운영위원장)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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