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학기 개학을 하자마자 묵직한 것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동료 교사가 교통사고로 입원하는 바람에 대신 담임 업무를 맡게 된 것이다. 학교에서는 담임과 비담임의 차이가 크다. 하루에도 수차례 교무실과 교실을 오가다 보면 날씨가 선선한데도 이마에 땀이 맺혀 있을 때가 많다. 하루는 손에 뭔가를 들고 바삐 걸어가는 나에게 한 후배 교사가 말을 걸었다.

“말년에 담임 하시느라 고생 많으시네요.”

“고생은 무슨? 우리 반 애들이 너무 좋아!”

그 말은 사실이었다. 남녀 혼합반인 우리 반은 ‘요즘 아이들’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심성이 곱고 사려 깊은 아이가 많다. 생각이 짧거나 이기적인 아이도 더러 있지만 편견을 버리고 비난보다는 도움을 주는 방법을 찾다 보면 생각보다 빨리 마음을 열기도 한다. ‘요즘 아이들 같지 않은 아이들이 많다’라는 말은 일종의 형용모순이다. 우린 혹시 ‘요즘 아이들’이라는 말의 함정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닐까?       
 

ⓒ박해성 그림

지난달에 학생회장단 선거가 있었다. 우리 반 A가 학생회 부회장에 출마해 당선되었다. 학생 다섯 명이 그를 도와 열심히 선거운동을 해주었다. 다섯 명까지 공식 선거운동원으로 등록해서 활동할 수 있다. B는 A의 운동원으로 등록하고 싶었지만 인원이 다 차서 그러지 못했다고 했다. B가 차선으로 선택한 학생은 부회장으로 출마한 다른 반 후보 C였다. 말하자면 A의 경쟁자를 도와준 셈이었다.

B는 선거운동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조용하고 얌전한 학생이다. 선거운동 마지막 날, 피곤한 얼굴로 교실에 앉아 있는 B에게 어떻게 선거운동을 하게 되었느냐고 물었더니, 경험 삼아 한번 해보고 싶었노라고 했다. 그런 대화 중에도 나는 B가 지지하는 후보가 누구인지 별 관심이 없었다. 그것은 우리 반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선거가 끝난 뒤에 이 문제가 터져 나왔다. 그 진원지는 교무실이었다. 몇몇 교사가 B에게 농담 삼아 던진 ‘배신자’라는 말이 화근이었다. 그 말에 상처를 받아 눈이 벌게지도록 울고 있는 B를 뒤늦게야 발견했다. 그날 수업시간에 나는 B에게 다가가 이번 선거운동을 열심히 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고 말해주었다. 같은 반이 아니더라도 선거운동을 하는 것은 당연하고, 그런 너를 비난하지 않은 A와 반 아이들도 훌륭하다고 말해주었다.

그날 종례시간이었다. 나는 B에게 해준 말을 전체 학생들 앞에서 다시 해주었다. 그런데 아이들 표정이 의외로 덤덤했다. 그거야 당연하지 않으냐는 반응이었다. 다만, 몇몇 아이가 내 말을 들으며 동공이 커지는 현상을 보이거나 의미 있는 미소를 지어 보였을 뿐.   

사진 찍히길 무척이나 싫어하던 그 아이가…

D도 그중 하나였다. D는 사진 찍는 것을 몹시 싫어했다. 지난봄 소풍 때에도 학급 단체 사진을 찍지 않겠다고 해서 적이 당황했다(나는 부담임으로 따라갔다). 내가 담임을 맡은 뒤에도 사진 찍는 것(찍히는 것)을 단호히 거부했다. 하지만 내가 주말 같은 때 단체 문자를 날리면 꼭 답장을 보내왔다. 짧지만 단정하고 진한 마음을 담아서. 얼마 전 학생회 봉사부원으로 활동하고 싶다고 해서 기쁜 마음으로 추천해주었다.     

D가 학생회 리더십 일박 캠프를 떠나던 날이었다. 나를 일부러 찾아와 잘 다녀오겠노라고 인사를 했다. 그날 밤 반 아이들에게 단체 문자를 보냈다. “리더십 캠프 간 친구들은 멋지고 유익한 시간 보내거라. 일요일에 연극 공연하는 은 맡은 엄마 역 멋지게 잘하기 바란다. 참, 소풍 장소 정하면서 사진 찍는 거 좋아하는 담임 생각해서 조금 걷더라도 바다에 가서 사진 모델도 해주자고 그랬다는 말을 듣고 눈물이 핑 돌았다. 모두 고맙고 사랑한다.”

문자를 보내기가 무섭게 휴대전화에서 신호음이 연달아 울렸다. E는 멋진 포즈로 사진까지 찍어 보냈다. 리더십 캠프에 간 학생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쌤에게 보여드리려고 찍은 사진이에요”라는 문구를 읽는 순간 감동이 확 밀려오는데 더 큰 것이 남아 있었다. 사진에서 D를 발견한 것이었다. 평소처럼 입을 꾹 다물고 있었지만 대신 눈이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마치 내게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선생님, 저도 사진 찍었어요.”

기자명 안준철 (순천 효산고 교사·시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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