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등대지기학교가 중반에 접어들면서 수강생들의 고민도 깊어진 모습이다. 교육 문제가 얼마나 복잡다단하게 얽혀 있는지, 그 속에서 부모가 중심을 잡는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새삼 깨닫기 때문이다. 4강에 나선 이는 무한경쟁 시대 대학과 대학생의 이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저작들로 사회적 반향을 일으킨 바 있는 오찬호씨다. 9월22일 사교육걱정없는세상(noworry.or.kr)에서 진행된 강좌를 지상 중계한다.

어쩌다 보니 〈진격의 대학교〉와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라는 책을 잇달아 썼는데, 한 가지는 확실히 해야 할 것 같다. 책이 사회적 반향은 일으켰을지 몰라도 부는 따라오지 않았다(웃음). 읽다 보면 마음이 무거워지는 책이어서인가 보다. 이 책들은 ‘대한민국 멘토들이 가장 싫어하는 책’ ‘대한민국 CEO들이 결코 권하지 않는 책’이기도 하다. 실제로 기업 합숙면접에서 내 책을 논리적으로 비판하라는 조별 토론 주제가 주어졌다는 얘기를 제자에게 들은 일도 있다. 왜 세상은 이런 얘기를 드러내는 걸 싫어할까? 그 이면에 대체 무엇을 감추고 있기에?

내가 책 두 권을 집필하게 된 강력한 동기가 있다. 지난 세월 동안 한국 사회의 민주주의는 어떤 식으로든 꾸물꾸물 발전해왔다. 그런데 지난 정권부터 국정원 댓글 조작, 민간인 사찰처럼 민주주의가 퇴행하는 듯한 객관적 증거가 하나둘 드러나기 시작했다. 대학교 수업 시간에 이를 가지고 학생들과 얘기를 나눠보니 ‘민주주의가 명백히 훼손됐다’는 데는 이론의 여지가 없는 듯했다. 문제는 이로 인해 심장을 칼로 찌르는 듯한 아픔을 느끼지는 않더라는 것이다. 어느 날 체중계에 올랐더니 몸무게가 5㎏ 늘어났다? 그랬다면 이렇게 반응하지는 않을 것이다. “말도 안 돼” 하면서 다음 날부터 운동을 시작하고, 다이어트 식단 짜고 난리가 났겠지. 여덟 살짜리 우리 딸도 고속도로 휴게소에 들르면 메뉴판 옆에 표시된 칼로리부터 계산한다. 따지고 보면 민주주의가 훼손된 게 살찐 것보다 백배는 중요한 사건 아닌가. 그런데 외모까지 경쟁력인 사회에 노출돼 있다 보니 사람들의 감정 촉수가 그 방향으로만 뻗어 있는 것이다.
 

ⓒ사교육걱정없는세상 제공<진격의 대학교>와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의 저자 오찬호 박사는 대학이 무엇을 추구하느냐에 따라 교육 전반도 달라진다고 말한다.
학생들과 수업을 하다가 받은 또 다른 충격 또한 이 책을 쓰게 한 원동력이 됐다. 대학 인권 수업이라는 게 본래 재미가 없다. 인종차별이 당연하다고 대놓고 말할 사람은 없을 테니까. 먹고살기 힘든 노동자들이 시위를 벌이는 것에 대해서도 동정할 만하다는 반응들을 보인다. 그런데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필요성을 얘기하는 대목에서 한 학생이 갑자기 “날로 정규직이 되려 하면 안 되는 거잖아요”라며 날카로운 반응을 보이는 것이었다. 처음에 나는 그 학생이 그런 말을 했다가 주변에서 따돌림을 당하게 되는 건 아닐까 걱정했다. 그런데 아니었다. 오히려 다른 아이들도 “그건 도둑놈 심보”라면서 동조하는 것이었다. 학생들은 비정규직인 걸 알고 입사한 노동자가 정규직화를 요구하는 건 명백한 무임승차라고 인식하고 있는 듯했다. 이는 누군가 받는 차별이 부당하지 않다는 것이니, 결국엔 차별에 찬성한다는 얘기이기도 했다.

내가 그날 만난 대학생들이 특별했던 것일까? 그 뒤 몇 년간 다른 대학생들을 만나며 경험한 바로는 그렇지 않다. 사회학자는 본시 “요즘 애들은 버릇이 없다”라고 얘기하지 않는다. 불과 몇십 년 사이에 아이들의 유전자가 달라졌을 리 없지 않나. 그보다는 어떤 시대적 변화가, 어떤 사회적 환경이 젊은 친구들의 마음을 움직였는지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는 게 사회학자가 해야 할 일이다. “사회가 병이 들면 개인도 병이 들게 마련이다”(노명우, 〈세상물정의 사회학〉)라고 했다. 그러니 병든 개인보다는 사회에 초점을 맞춰 이 사회가 왜 병들었는지 원인을 알아내고, 어떻게 하면 이 사회를 바꿀 수 있을지 궁리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생들은 왜 차별에 찬성하게 된 것일까? 나는 그 첫 번째 원인을 능력주의에서 찾는다. 자본주의는 사람들을 경쟁시켜 줄을 세운 다음 이에 걸맞은 보상을 해주는(‘성과에 따른 차등적 보상’) 능력주의 모델에 기반해 발전해왔다. 누군가 잠을 줄여가며 열심히 자기개발을 하면 그 자신도 성공하고 사회 전반도 발전할 것이라는 믿음이 자본주의를 작동시켜왔다. 그런 만큼 비정규직이 정규직화를 요구하는 것은 이 같은 능력주의에 위배된다. 사실일까? 능력주의를 한 사회에 적용할 때는 전제가 있다. 기회·과정·결과가 공정해야 한다.

‘어쩔 수 없지’라는 체념이 주는 면죄부

한국 사회에서 기회의 공정성이 깨졌다는 것은 이미 주지의 사실이다. 누군가 이 자리에서 “강남 3구 출신의 서울대 진학률이 더 높답니다”라고 말해봐야 아무도 놀라지 않을 것이다. 과정의 공정성도 마찬가지다. 심판이 언제나 공정한 룰을 바탕으로 평가를 해줘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다.

결과의 공정성은 가장 많이 오해받는 개념 중 하나다. 이로 인해 무임승차론이 대두되기도 한다. 그러나 결과의 평등은 누구에게나 똑같은 보상을 하라는 얘기가 아니다. 경쟁에 패배한 선수라 해도 생활이 가능한 개런티는 지급받을 수 있어야 한다. 사회적 경쟁에서 뒤처졌다 해도 인간으로서 삶의 존엄성이 침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오늘날 비정규직의 가장 큰 문제는 미래를 계획할 수 없다는 점이다. 내가 얼마를 버니까 언제 결혼하고 애를 낳고 집은 언제 사겠다는 기획을 할 수가 있어야 하는데, 당장 2년 앞을 내다볼 수 없으니 인생이 시궁창이다. 최저임금도 너무 낮고 오르는 속도 또한 느리기 짝이 없다. 이를 문제 삼으면 “그래도 먹고사는 데는 문제없잖아?” 하는 사람들이 있다. 2015년을 살아가면서 때로 영화 보고 ‘치맥’하고, 1년에 한두 번 여행 가는 게 굉장한 사치인가? 한국의 자본주의는 그런 의미에서 유달리 악질적이다. 자본주의라고 다 같은 자본주의가 아니다. 복지로 대변되는 사회안전망을 통해 누구든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하게끔 결과의 공정성을 보완하는 나라들도 있다. 그런데 한국은 외환위기를 계기로 최소한의 안전장치도 없이 신자유주의를 활짝 받아들인 뒤 개인의 경쟁력만 문제 삼았다. 자기개발에 힘쓰는 사람은 살아남고, 능력 없는 사람은 해고당해도 마땅하다는 식이었다.

자기개발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서 권장하는 자기개발은 다르다. 지금 취업하기 힘든 대학생들은 과연 자기개발이 부족해서 그런 것일까? 내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영어학원에 다니겠다니까 아버지가 무슨 초등학생이 영어학원이냐며 펄쩍 뛰셨던 게 생각난다. 그것이 1990년의 일이다. 그런데 지금은 초등학교 1학년이 영어학원에 안 다닌다고 하면 “어쩌려고?” 되물으면서 그 부모를 탓하는 세상이 됐다. 이렇게 일찍부터 영어를 배우고, 스펙 쌓기 3종 세트(학벌·학점·토익 점수)가 9종 세트(학벌·학점·토익 점수·어학연수·자격증·봉사활동·인턴·수상 경력·성형수술)로 확장됐는데도 취업의 바늘구멍은 왜 더 좁아지기만 하는가? 이런 현상에 의문을 품지 않는 사람은 어른 자격이 없다.
 

ⓒ시사IN 윤무영이화여대 포스코관(위)처럼 기업이 지어준 건물을 대학이 운영한다. 전국의 일반 4년제 대학 189곳 가운데 경영학 계열 학과 수는 686개에 이른다. 전체 재학생 중 경영학 전공자는 9.8%나 된다.
정상적인 사회라면 이런 상황에서 ‘도대체 사회가 어떻기에 우리에게 이토록 악랄한 짓을 하나’라고 물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오히려 ‘어쩔 수 없지’ 하고 체념하면서 현실에 순응하려 든다. 이렇게 아무리 잘못을 저질러도 면죄부를 얻게 되니까 자본주의는 점점 더 포악해진다. 반면 이런 문제를 따져야 할 사회적 자원은 점점 더 사라져간다. 대학이 대표적이다. 나는 비판이 사라진 대학 교육이야말로 능력주의와 함께 우리 사회가 차별을 찬성하게 만든 주요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2004년 한 재벌 기업인이 “대학이 학문의 장이라는 헛소리는 이미 옛이야기다. 이제는 ‘직업교육소’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대학은 기업이 원하는 인재를 양성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그로부터 10년. 대학은 급속도로 변했다. 대표적인 예로 전국의 일반 4년제 대학 189곳 중 경영학 계열 학과 수가 686개다. 글로벌경영학과, 디지털기술경영학과, 지식경영학과 등 이름도 다양하다. 2014년 현재 4년제 대학 재학생 중 경영학 전공자는 9.8%에 이른다. 10%에 육박하는 엄청난 숫자가 경영학이라는 단일 전공을 하고 있는 셈이다.

대학 또한 모든 가치판단을 경영학적으로 하게 됐다. 비용 절감과 이윤 증가라는 잣대에 맞지 않는 학과는 없애도 무방하다. ‘이미지 메이킹’ ‘비즈니스 예절’ 과목을 개설해 웃는 법이나 나비넥타이 매는 법 같은 것은 개설하면서 철학·역사 과목은 뒷전이다. 포스코관·삼성학술정보관·SK경영관 등등 기업이 지어준 건물을 대학이 운영한다. 효율성으로 보자면 탁월한 선택이다. 그러나 이렇게 자본의 논리를 받아들일수록 대학은 자연히 자기검열에 들어간다. 심지어 누가 기업 비판이라도 할라치면 “당신 때문에 기업이 건물 안 지어주면 책임질 거냐” 하고 윽박지른다. 그러고 보면 기득권 세력은 완벽한 승리를 거둔 셈이다. 말 안 듣는 놈이 있으면 어디론가 끌고 가서 두들겨 패서 길들여야 했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그저 대학에 보내놓는 것만으로 균질화·획일화된 사고방식을 개인 스스로 갖추게 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가 권하는 능력주의나 자기개발을 개인은 생각 없이 받아들일 수도 있다. 그러나 대학조차 그래서는 안 된다. “대학은 시장의 편협한 명령에 항복하도록 내버려두기에는 너무나도 중요한 공적 기관”이라고 제니퍼 워시번은 말한다(〈대학주식회사〉). 대학이 경영학만 떠받들고 인문학은 찬밥 대접을 받게 됐다고 해서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그 결과 어떤 세상이 도래했는지 우리 스스로 성찰해보자는 것이다. 대학이 자본의 논리를 충실히 받아들였건만 청년들의 삶은 더 최악으로 치닫고 있다. 스펙 쌓기 9종 세트는 곧 10종 세트가 될 판이다.

대학이 어찌되든 나랑은 상관없는 문제라고? 결코 그렇지 않다. 여덟 살짜리 딸아이가 역사책만 파고드는 걸 보면 당장 나부터 그 책들을 불질러버리고 싶어진다(웃음). 역사 공부라는 게 대학, 나아가 이 사회가 요구하는 효율성과는 동떨어져 있음을 부모로서 충분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대학이 무엇을 추구하느냐에 따라 당장 내 아이가 읽는 책이 달라지고, 사교육 시장이 달라진다. 나와 멀리 떨어진 이야기가 어떤 식으로든 연결돼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사회가 병들면 개인도 병이 든다.

대안이 뭐냐고? 대안이 없어도 비판할 수 있다

이런 사회에서 비판적 시민으로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개인적으로는 일단 “한번 사는 인생, 인간답게 살자”라는 생각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얼마 전 광화문 교보문고 빌딩에 “우주가 내게 준 것은 서로 사랑하는 힘과 질문하는 능력”이라고 쓰인 현수막이 걸려 있던데, 바로 그것이다. 이타심, 그리고 의심하고 비판하는 능력은 인간만의 것이다. 예수가 죽은 것도 율법주의자들에 대해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반기를 들었기 때문 아닌가.

“그런다고 세상이 변하냐” 하는 태도도 버릴 일이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세상은 더 나쁘게 변해왔다. “편향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지 말라”는 말에 흔들릴 필요도 없다. 우리 사회 자체의 균형추가 압도적으로 기울어져 있는 만큼 기존 가치에 의문을 품는 것이 결코 편향된 일은 아니다. “그래서 대안이 뭔데?” “스타벅스 커피 마시면서 자본주의는 왜 비판해?” 따위 말에 주눅 들지도 말자. 대안이 없어도 비판할 수 있다. 내 몸은 현실에 순응해야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현실이 잘못돼 있기에 화가 나는 게 인간이기 때문이다. 대안이 없더라도, 언행이 다소 불일치하더라도 뭔가 잘못됐다는 걸 끊임없이 비판하다 보면 그것 자체가 정치를 압박하고 법적·제도적 개선을 이끌어내는 수단이 된다. 부당함에 대한 여론이 형성되면 대안이 마련되는 결정적 계기가 될 수도 있다. 그러니 나 자신도 누군가를 차별하는 데 찬성하며 일그러진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해온 것은 아닌지 늘 돌아보며 공부하고, 더 좋은 사회를 만들려 노력할 일이다.

정리·김은남 기자

기자명 오찬호 (사회학 박사·〈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저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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