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의에 앞서 퀴즈 하나 내겠다. 지금부터 검은색 옷 입은 여학생 3명과 흰색 옷 입은 여학생 3명이 공놀이하는 동영상을 보여드리겠다. 규칙은 단순하다. 같은 색깔 옷끼리만 패스하는 거다. 이 중 흰옷 입은 팀이 공을 몇 개나 패스하는지 세어달라. (약 40초간 동영상 상영) 모두 세어보셨나? (청중 “16개요”라고 답변) 맞다. 거의 다 정답을 맞히셨다.

그렇다면 다음 질문. 혹시 영상에서 고릴라를 보신 분? (청중 머뭇머뭇) 이런, 3분의 1 정도만 손을 드셨다. 여학생들이 공을 던지는 동안 꽤 덩치 큰 고릴라가 아주 천천히 무대 중앙을 가로질러 갔는데도 고릴라를 보지 못하신 듯하다. 실은 여학생들이 공놀이를 하는 동안 무대 뒤쪽에 있던 커튼 색깔이 붉은색에서 노란색으로 변했다. 검은 옷 입은 여학생 3명 중 1명도 어느 틈에 슬그머니 사라졌다. 그런데도 이를 알아챈 분이 거의 없다.

청중 수준에 문제가 있나? 농담이다. 알아채도 정상이고, 알아채지 못해도 정상이다. 뇌의 한계일 뿐이다. 우리 뇌는 모든 것을 볼 수 없다. 내가 지금 알고 있는 지식과 정보는 내가 보고 싶은 것만 골라서 본 결과다. 그런 만큼 내가 아는 지식과 정보를 과신하면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다. 아이를 기르는 일도 마찬가지다. 어른들은 늘 몇 가지 기준을 정해놓고 이를 통해 아이들을 보려 한다. 그렇게 해서는 전체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세상은 ‘안 보이는 고릴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시사IN 윤무영과학 저널리스트인 신성욱씨는 “지능계발에 대한 정보를 누가 생산하고 유통하는지 잘 따져볼 필요가 있다”라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모든 것을 놓치지 않고 볼 방법은 없을까? 딱 하나 방법이 있긴 하다. 옆 사람에게 물어보는 것이다. “나는 이런이런 걸 봤는데, 넌 뭘 봤어?” 묻다 보면 전체 모습을 그릴 수 있게 된다. 이것이 바로 지혜다. 성현의 위대한 말씀만이 지혜가 아니다. 지혜란 서로가 서로에게 질문을 하는 것이다. 우리가 오늘날 아이 키우는 일을 힘들어하는 것도 서로 질문할 기회가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최근 미국 잡지에 실린 특집기사가 있다. 제목이 ‘400만 달러의 교사’다. 교사 연봉이 무려 47억원이라는데, 알고 보니 한국 얘기다. 교육이 어떻게 산업이 되었는지를 조망한 기사에 한국의 사교육 강사가 소개된 것이다. 역사적으로 교사가 돈 많이 버는 직업이었던 적은 없었다. 지식을 다음 세대에 전수하고 하나의 인격을 키워내는 데서 보람을 찾았을 뿐이다. 그런데 이런 지식을 상품화해 시장에 공급하는 시스템을 한국인이 발명해낸 셈이다.

뇌 과학을 가장 많이 언급한 직업군은?

이런 시장에서 특히 인기 있는 것이 뇌 과학이다. 부모들은 시장에서 제공하는 지능개발 내지 뇌 발달에 관한 지식들을 거의 상식인 양 믿고 있다. 과연 그럴까?

‘우뇌 신화’를 예로 들어보자. 요즘 우뇌학습법 열풍이 불고 있다 한다. 좌뇌는 논리를 담당하고 우뇌는 감성을 담당한다는 둥, 초등 3학년까지는 우뇌를 개발해야 한다는 둥 온갖 학습법이 횡행한다. 1980년대까지는 과학자들도 그런 줄 알았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뇌 과학이 급속도로 발전하고 CT(컴퓨터단층촬영), MRI(자기공명영상) 등 기술 발달로 살아 있는 사람의 뇌를 들여다볼 수 있게 되면서 그전의 뇌 과학적 상식들은 대거 수정되고 있다. 지금은 어떤 과학자도 좌뇌·우뇌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다. 지나치게 과장됐다고 판단해서다. 그런데 시장에서는 과학이 아닌 사이비들이 여전히 상품으로 둔갑해서 팔리고 있다.

‘3세 신화’도 마찬가지다. 시장은 부모들을 부추긴다. 세 살 무렵이면 아이의 뇌가 거의 완성된다고, 그러니 부모가 제때 교육할 시기를 놓치면 아이의 능력을 망치게 되는 거라고. 한마디로 ‘뻥’이다. 신경망 최소 단위인 시냅스의 밀도가 일생 동안 어떻게 변하는지 살펴보면 생후 2~12개월 무렵 최고조에 달했다가 그 뒤로는 하강 곡선을 그린다. 과거에는 이것만 보고 3세 이전에 뇌가 완성되는 줄 알았다. 그러나 뇌 과학이 발달하면서 이 시기의 시냅스가 툭툭 끊어져 있음을 알게 된다. 씨에서 싹이 나면 농부가 쭉정이나 비실비실한 놈들을 골라 버리듯 뇌 또한 일단 시냅스로 가설공사만 해놓은 상태에서 끊임없이 가지치기를 해나간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가지치기를 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것이 외부와 관계를 맺는 일이다. 곧 외부로부터 적절한 경험과 자극을 받으며 가지치기를 해나갈수록 뇌의 성능은 더 좋아진다. 뇌의 성능은 오히려 40대 후반부터 50대 중반 무렵 최고조에 달한다는 것이 최근의 연구 결과다.

과학적 근거가 희박한 주장들을 과학자들은 ‘신경계 신화(Neuromyth)’라 이름 붙였다. 나는 이를 ‘뇌의 신화’라 쉽게 고쳐 부르는데, 뇌의 신화가 시장에서 유통되는 데 핵심적 구실을 하는 것이 미디어다.

1990~2010년 한국의 주요 일간지·방송 뉴스 중 ‘우뇌’라는 단어가 들어간 기사를 검색해보니 보수·진보 가릴 것 없이 모든 언론사가 의학 분야(11~24%)보다 교육 분야(54~63%)에서 이를 다루고 있었다. 뇌 과학 관련 기사를 쓰는 사람(기자 제외한 외부 필진)이 누구인지 알아본 결과도 흥미롭다. 의사? 뇌 과학자? 아니다. 뇌 과학을 가장 많이 언급한 직업군은 바로 사설 학원장이었다. 지능개발이라는 말에 넘어갈 게 아니라 이런 정보를 누가 생산하고 유통하는지 잘 따져볼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뇌의 신화가 범람하는 속에서 부모는 어떻게 해야 할까. 우선 뇌의 성장 특성을 알아야 한다. 만 12세 이전의 아이에게 “넌 누굴 닮아서 골백번을 말해도 못 알아듣느냐”라고 다그쳐봐야 소용없다. 부모·자식 간 많은 문제는 12세 이전의 아이들을 인간으로 여기는 데서 시작된다고 뇌 과학자들은 말한다(웃음). 이 나이 아이들은 ‘호모 사피엔스(지혜를 가진 사람)’라기보다 ‘호모 사피엔스 유니쿠스’로 분류해야 한다. 독특한 인간의 아종(亞種)쯤에 해당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이들은 어떻게 사람이 될까. 당대 최고의 어린이·청소년 뇌 전문가로 꼽히는 제이 기드 박사는 아이들의 뇌를 어떻게 발달시킬 수 있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누군가의 품에 안겨 이야기를 들었던 게 언제였던가”라고. 여기에는 중요한 과학적 진실 두 가지가 담겨 있다. 먼저 두 팔로 안아서 키우는 것은 인간 암컷만이 터득한 독특한 양육 방식이다. 소는 들판에서 뛰어다니며 소로 자란다. 반면 인간은 엄마 품에 안겨 인간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물론 모든 아기는 처음부터 인간으로 성장하기 위한 유전자 설계도를 가지고 태어났다. 그러나 이 설계도대로 집을 잘 짓기 위해서는 재료가 필요하다. 보고 걷고 숨 쉬고 말하는 모든 것에서 인간의 방식(human skill)을 익혀야 하는 것이다. 뇌가 1차 공사를 마무리하는 것이 18~20세 무렵이다.

토론보다 수다가 뇌를 활성화시킨다  

휴먼 스킬을 익히는 데 핵심이 되는 것이 이야기다. ‘이야기는 힘이 세다’는 말대로 인간은 이야기를 좋아하도록 타고났다. 여기서 이야기란 책에서 본 감동적인 이야기라기보다 하나 마나 한 수다에 가깝다. 미국의 한 연구소에서 흥미로운 실험을 한 일이 있다. 한 그룹은 가볍고 재미있는 수다, 다른 한 그룹은 심각한 토론을 30여 분간 나누게 한 뒤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를 측정한 것이다. 두 그룹의 뇌를 촬영한 결과 가벼운 수다를 나눈 그룹의 전전두엽은 빨갛게 활성화되어 있는 반면 토론을 나눈 그룹에는 거의 변화가 없었다. 시험을 치른 결과도 수다를 나눈 그룹이 15%포인트 가까이 높게 나왔다. 이 논문 주제를 한 언론은 이렇게 재치 있게 요약했다. “친구는 머리에 좋다”라고.
 

ⓒ연합뉴스두 팔로 안아서 키우는 것은 인간만이 터득한 독특한 양육 방식이다. 비언어적인 표정과 눈빛은 아이들의 뇌를 성장시킨다.
인간의 이야기는 또 언어에 집착하지 않는다. 과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인간과 인간의 커뮤니케이션에서 언어가 차지하는 비중은 7%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보다 비언어적인 표정, 몸짓, 억양 등으로 훨씬 많은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다.

그중 특히 중요한 것이 눈빛이다. 뇌 과학자들은 “응시가 뇌를 조각한다”라고 말한다. 응시를 내 식대로 표현하면 ‘한 발 물러서서 지그시 바라보기’다. 지그시 바라볼 때 아이들의 뇌는 성장한다. 그런데 요즘 부모나 교사들이 가장 못하는 게 이것이다. “엄마가 널 보고 있어” “선생님이 이번 학기 동안 널 지켜볼 거야”라면서 ‘응시’가 아닌 ‘주시’ 내지 ‘감시’를 하려 든다. 이러면 뇌가 제대로 자라질 못한다. 스트레스 때문이다. 스트레스는 뇌가 자라는 데 천적이다. 어른도 마찬가지다. 스트레스는 뇌를 작동 못하게 만들어 사람을 바보로 만든다.

만 6세 정도면 아이들의 지능이 돌고래 수준에 도달한다. 이 단계를 넘어 인간만이 도달한 고유한 능력, 곧 다른 사람의 고통을 보고 함께 눈물 흘리는 능력, 억제하고 절제하는 능력, 미래의 일을 예측하고 판단하는 능력 등을 갖추려면 이처럼 ‘바라봄(응시)’이라는 휴먼 스킬을 익혀야만 한다. 바라볼 줄 모르면 이와 관련된 네트워크나 신경망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응시의 반대말은 외면이다. 아이들이 친구들에게 왕따당해 혼자 버려지는 것을 두려워하듯 인간 사회에서 가장 비극적인 것이 ‘생까는 것’이다. 외면하는 것, 거절하는 것, 고립시키는 것, 방치하는 것 등. 그런데도 우리 사회는 갈수록 서로 바라보지 않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다. 남이야 죽든 말든 내 갈 길만 가면 된다는 식이다. 심지어 그렇게 사는 걸 출세했다며 칭송한다.

사실 뇌는 물질로 보자면 단백질과 지방 덩어리일 뿐이다. 그런데 여기서 자라난 인간의 마음이 들꽃에 감동하고, 바흐 음악에 눈물을 흘리고, 급기야는 1000년 넘은 불상에 켜켜이 쌓인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읽어낼 수 있는 경지에까지 도달한다. 어떻게? 뇌 과학자들은 이 문제를 푸는 데 도전 중이다. 인간은 누구나 신경세포(뉴런)를 1000억여 개 갖고 태어난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서로 간에 잘 연결돼야 한다는 것이다.

유전이냐, 환경이냐를 따지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아이는 나 아닌 바깥의 다른 존재와 끊임없이 관계를 맺어야만 한다. 이 과정에서 받아들인 정보를 기억하고 처리하기 위해 신경망이 서로 연결되는 과정에서 뇌가 발달하는 것이다. 결국 밖에서 온 것들이 나를 살게 한다. 그것이 아이를 자라게 한다.

사실 우리는 우리 뇌가 하는 일의 90% 이상을 알지 못한다. 그런데도 아이를 디자인하겠다니, 얼마나 가당치 않은 일인가. 텃밭을 일구다 보니 옛 어른들이 왜 ‘자식농사’라는 표현을 썼는지 알 것 같더라. 농부가 최선을 다하되 궁극적으로는 달빛, 별빛, 비, 바람, 미생물처럼 수많은 것들이 작물을 키우듯 아이도 마찬가지다. 아이는 우리가 알 수 없는 무한한 것들과 관계를 맺으며 성장하는 존재다. 아이가 그 속에서 인간의 방식으로 관계를 맺으며 살 수 있게끔 도와주는 것이 부모나 교사의 구실이다.

2000년대 들어 미국 정부가 최신 뇌 과학 성과를 교육에 적용한 보고서를 발표했는데, 그 보고서 제목이 〈뉴런에서 이웃으로(From Neurons to Neighborhoods)〉이다. 머리 좋게 하는 교육에서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좋게 하는 교육으로 패러다임의 전환이 이뤄진 것이다. 새롭게 밝혀진 뇌 과학 사실들을 바탕으로 교육 및 각종 인력개발 정책을 세우는 나라가 많은데 한국도 이런 방향으로 갔으면 한다.

정리·김은남 기자

기자명 신성욱 (과학 저널리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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