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교육자가 아니다. 선생님을 한 적이 1초도 없다. 28년 동안 선생님들을 괴롭히기만 했다. 우리 학교 선생님들은 (이사장인) 나를 만나는 게 반가워도 꼭 좋지만은 않을 거다. 나는 ‘나만 모르지, 선생님은 알 거다’ 하고 물어보는데, 선생님들 처지에서는 이사장이 뭔가를 물어보면 기분이 별로 좋지 않을 것 아닌가. 그런데 내가 몰라서 물어보는 걸로도 자연스럽게 가르치게 되더라. 선생님들이 답을 못하는 게 싫으니까 스스로 공부한다.
요새는 재미있는 거리들이 넘쳐난다. 조금은 재미와 상관없게 살 줄도 알아야 한다. 등산은 재밌기만 기대해서는 못 한다. 숨이 차는 것을 느끼고 그것을 넘어설 때 재미가 따라온다. 수영을 할 때는 빠져죽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있다. 하지만 그것을 넘어설 때 재미있기 시작한다. 쉬운 재미의 유혹에서 견디는 건 용기밖에 없다. 자발적으로 용기를 갖도록 강제할 수밖에 없다. 자발이 아닐 때마다 구박을 하고 스스로 어른이 되도록 참고 기다려야 한다. 내가 학교에서 맡은 역할이 선생님들이 자발할 수 있도록 강압하는 거다(웃음).
역으로 생각하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초등학교 4학년쯤에는 역으로 생각하는 걸 가르쳐줘야 한다. 하지만 그런 교육은 하지 않는다. 점수 잘 따는 교육이 공부라고 선생님부터 생각하고 있다. 선생님은 초·중·고등학교 때 성적 잘 받아서 교사가 되었고 그 이상을 상상하지 않는다. 성적과 공부는 조금 관계가 있지만 전체적으로 관계 있는 건 절대 아니다. 내 자식이 남을 깔아뭉개더라도 시험 잘 쳐서 대학 잘 가고 기업에 잘 들어가길 바란다. 그러나 괴벽한 말로 들리겠지만, 기억하는 것과 아는 것은 다르다. 기억을 잘하면 아는 게 많은 걸로 아는데, 기억하는 게 다 아는 건 아니다.
자녀 교육에 대해서도 일반화할 수 없다. 나는 아이들과 긴 이야기를 해보지 않았다. 갑자기 두들겨 패고, 발로 차고, 폭발적으로 변하면서 ‘세상 무서운 줄 알라’ ‘애비부터 이렇게 고약하다’는 걸 보여주기도 했다(웃음). 다만, 꽃밭에서 호미질하고 놀아라 했기 때문에 면역성은 생겼을 거다. 사촌이 피아노를 공부했는데, 그걸 보고 딸아이가 하고 싶어 했다. 나는 옆에서 “무당 되려고 그러느냐?”라고 놀리듯 말했다. 결국 자기 욕심에 걸려서 자기가 하고 싶은 걸 찾았다. 지금 음대에서 교수한다. 자기가 하고 싶으면 좋아하고 좋아하면 잘하고 싶고 잘하면 재미가 있다. 계기를 어디서 터주느냐가 핵심이다. 이런 방식의 교육이 학부모를 설득할 길이 없다는 걸 안다. 학부모 스스로 용기를 내야 한다. 부모가 내비게이션 역할을 하려 하지 말고 자기 행복을 찾아라. 내 행복을 찾기 위해 실천하면 자녀는 저절로 행복한 인간이 된다. 무의식의 영향이다.
얼마나 자발적으로 생각하는가 돌이켜보길
우리는 남의 말로 생각하기 때문에 뭐가 뭔지 모른다. 아버지·어머니에게 배운 말 자체가 남의 말이다. 부모는 자녀가 세상의 경쟁에서 뒤처질까 봐 두려워할 게 아니라, 남의 책, 남의 생각, 남의 감정을 배운 대로 알려주는 걸 부끄러워할 일이다. 요새 엄마는 엄마대로, 아빠는 아빠대로 자녀의 인생을 내비게이션하려고 달려든다. 이미 과거의 것을 익히고 지나간 부모가 미래를 살 자녀의 내비게이션이 되겠다는 것 자체가 아무 생각이 없는 거다. 내 생각을 모르면서 남을 깔아뭉개는 게 행복인 줄 알고, 그걸 깨우쳤다고 목사·신부·스님이 되어도 사실은 모른다. 오히려 어떻게 하면 나를 속일까 하는 방어기제가 발동해서 자기합리화하기도 한다.
결국 깔아뭉개는 교육밖에 일어날 도리가 없다. 공교육이 난감하게 되었다. 현실적으로 사교육하는 사람이 출세할 수 있다. 현실을 막을 방도는 달리 없다. 누가 뭐래도 사교육을 할 사람은 한다.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이라는 단체명은 좀 과격하다. 세상을 걱정할 게 아니라 ‘나’부터 잘하면 된다. 세속에 쓸려가는 사람 중 조금 다를 뿐이다. 여러분이 자유로운 생각, 통찰력을 갖기 위한 자기 내부 혁명을 하지 않고서는 강의를 들어도 불안이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남이야 사교육을 하든 말든 무슨 상관인가. 용기가 없는 거다. 이따금 세속에 휩쓸리지 않으려고 아등바등하다가 역류까지 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역류하다 보면 쓸려가는 것보다 더한 짓을 하게 된다.
나는 행복이 권리인 줄 알았다. 아니었다. 행복은 의무더라. 행복하기 위해서 실천해야 하는 것들에 대해 징벌·도리·윤리 같은 말로 가두는데, 확실한 건 남을 못살게 굴지 말 것, 남을 짓밟지 말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수천 년 전 신석기 이후 지배자는 어떤 형식으로든 있어왔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건 악습이다. 학교에서나 사회에서 옳고 그름을 가르치려 하는 건 그래야 전체를 지배하기 편하기 때문이다. 아쇼카가 불교를 만들었지, 석가모니는 불교도가 아니다. 예수님은 기독교 신자가 아니고, 마르크스는 마르크시스트가 아니다. 이들은 그 당시 혁명가였다. 우리는 이들의 위대함을 ‘종교’ 형태로 만들어서 남을 지배하는 데 이용한다.
얼마나 자발적으로 생각하는가, 자기의 의미와 가치를 남 앞에 뻔뻔하게 드러내지 않으면서 실천할 수 있는지 돌이켜보라. 자발로 생각하기 시작하면 나와 의견이 다르다고 해서 원수가 될 일이 없다. 또 밥 한 그릇 잔뜩 먹고 나면 한 숟가락도 더 먹기 싫다. 무한한 욕망이란 없다. 자기를 잘못 알고 사기꾼이 마음마저 조정하려는 데 익숙해진 거다. 너무 오래 속아서 그렇다. 남한테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인정을 받겠다는 심보가 나를 남의 흉내 내는 사람으로 살게 한다. 살아 있는 게 얼마나 기적 같은 일인데, 사실을 사실대로 보는 능력을 키우기를 바란다. 소박하게 보기를 바란다. 실은 나도 사기꾼이다. 이런 고약한 늙은이를 보면서 귀엽다고 불러주시는데, 내가 한 짓보다 과분하게 귀여움을 받고 있으니 사기꾼이 아닐 수 없다. 내가 한 말은 잊어달라. 남에게 배운 걸로 따라가지 말아달라.
정리·송지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