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삼각지에 있는 사교육걱정없는세상 강의실이 꽉 찼다. 정혜신(정신과 전문의)·이명수(‘치유공간 이웃’ 대표) 부부의 강의로 시작된 ‘2015 등대지기학교’ 때문이다. ‘등대지기학교’는 교육시민단체인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이 매년 가을 개설하는 부모교육 강좌다. ‘학부모’에게 불안을 파는 학원 입시설명회와 달리 ‘부모’의 자아 성찰을 돕는다는 것이 역대 수강생들의 평가다. 〈시사IN〉은 9월1일~10월20일 진행되는 전 강좌를 지상 중계할 예정이다.


①입시 경쟁에 지친 마음:치유를 위한 새 길

정혜신(정):우리가 앉아서 진행해도 괜찮으시겠나?(일동 끄덕임)

이명수(이):우리가 20년째 이렇게 함께 다닌다. 장소팔·고춘자(1960~1970년대에 인기 있던 만담 콤비) 같지 않나(웃음).

:아까 사회자께서 우리가 오늘 교육에 대한 얘기를 다채롭게 풀어줄 거라 하셨는데, ‘다채롭게’는 아니고 ‘과격하게’ 풀어보려 한다. 내 성격이 공격적이거나 하지는 않은데, 교육 문제에 관한 한 굉장히 과격해지는 것 같다. 그럴 만도 한 게 현재 우리나라 교육은 전쟁터 같은 게 아니라 그냥 전쟁터다. 그런 만큼 교육에는 혁명적인 접근이 아니라 혁명 그 자체가 필요하다는 생각도 든다.

:언젠가 트위터에 이런 얘기를 올린 일이 있다. 어느 날 한 중학생 아이가 물었다. “엄마, 우리 반에 왕따당하는 아이가 있어. 그애랑 친구하고 싶어도 그랬다가는 나까지 왕따를 당할 것 같은데 어쩌지?” 그러자 엄마가 말했다. “그 친구가 안됐기는 한데 가까이 하지는 마라. 그랬다간 너도 힘들 거 아니니?” 그다음 날, 아이는 투신하고 말았다. 아이는 친구에 빗대 자신의 고민을 털어놓았던 것이다. 이 글이 5000회 넘게 리트윗(RT)됐던데, 사람들이 가장 많이 궁금해하는 게 “이게 진짜예요?”라는 것이었다. 그때 느꼈다. 사람들은 현실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한국에서 아이를 키운다는 게 지옥도라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현실을 외면하려 든다. 전쟁 영화나 첩보 영화를 보면 막다른 골목에서 마주친 두 사람이 서로의 머리에 총을 겨누지 않나. 상대가 총을 내리면 나도 내릴 수 있다. 그런데 그러지 못한다. 상대를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의 교육 현실이 꼭 그렇다. 옆집 부모가 먼저 총을 내렸으면 좋겠는데, 믿지 못하겠으니 나도 내릴 수는 없다. 이런 전쟁 상황을 끝내야 할 텐데 개인의 힘으로는 도저히 안 될 것 같으니 내 아이에게 좀 더 안전한 방탄복이나 엄폐물을 구해줄 생각만 한다. 현대전에서는 아무리 좋은 방탄복·엄폐물을 갖고 있어도 전쟁이 끝나지 않는 한 누구도 살아남을 수 없는데 말이다.

 

ⓒ시사IN 이명익이명수·정혜신(왼쪽부터) 부부. 이들은 교육에는 혁명적 접근이 아닌 혁명 그 자체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두 사람이 제시한 혁명의 수행법은 바로 ‘견디는 것’이었다.
:오늘은 두 가지 측면에만 집중해 말씀드리고자 한다. 관계의 본질, 그리고 견디는 것에 대해서다. 먼저 관계에 대해 얘기해보자. 부모·자식 간은 굉장히 특수한 관계다. 그런데 우리는 ‘특수성’만 남고 ‘관계’는 사라진 듯하다. 부모·자식은 핏줄로 연결된 본능적인 관계라는 특수성만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관계의 출발점은 ‘나도 있지만 너도 있는 것’이다. 요즘 문제가 되는 갑을관계의 경우 나만 있고 너는 없기에 폭력적인 관계가 된다. 이는 상대가 생각도 없고, 판단력도 부족하고, 최소한의 상식이나 합리성도 없는 존재라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니 ‘너’는 없고, 그 자리에 ‘내 판단’ ‘내 걱정’ ‘내 욕망’ 따위 ‘나’만 남게 되는 것이다. 자녀도 ‘너’다. 그런데 부모·자식 관계에서 ‘너’가 사라지는 경우가 너무 많다. ‘난 너에 대해 다 알고 있어’ ‘내 속으로 낳은 자식인데’ 하면서 상대를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부모들은 또 ‘아이가 아직 어리고 경험이 없는데 어떻게 간섭하지 않을 수 있느냐’고 반문한다. 그런데 난 지금껏 살아오면서 단 한 번도 잔소리를 한 일이 없다. 아이가 방을 치우지 않거나 할 일을 게을리할 때 “이렇게 이렇게 해야지” 하고 잔소리할 게 아니라 “너, 무슨 생각으로 그러니?” “무슨 일 있니?”라고 한번 물어보시라. 내 경험에 비춰보면 아이들이 예닐곱 살만 지나도 자기 의도나 마음을 얘기하더라. 나름의 세계가 있고, 자의식도 있다. 부모가 보기엔 아이가 아무 생각도 대책도 없는 것 같은데 막상 얘길 들어보면 아이 나름대로 더 염려하고 불안해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확인하고 나면 ‘아, 내가 말하지 않아도 다 알고 있구나’ 싶어 안심이 된다. 아이가 학교를 그만둔 채 게임에만 빠져 속이 까맣게 탔다는 엄마를 만난 일이 있는데, 아이도 게임을 하면서 스스로 불안해하고 미래를 고민하는 인격적 존재다. 부모·자식 관계에서 이를 존중하고 믿어주면 내 에너지 소모도 줄어들고 아이의 자주성도 훼손되지 않는다.

:잔소리를 하지 않는 것은 진짜다. 증언한다(웃음).

:우리는 아들 둘에 딸이 하난데, 세 아이 모두 초등학교부터 영국 서머힐 학교에 보냈다. 그때만 해도 초등과정 대안학교가 국내에 없어서 달리 갈 데가 없었다. 아이들을 보내기 전 먼저 서머힐에 가 봤더니, 책에서 본 그대로 민주적인 교육철학을 잘 유지하고 있기에 입학을 결정했다. 한글도 모르는 채 영국에 간 아이가 영어도 공부하지 않았으니, 아이는 사실상 문맹이나 다름없었다. 방학에 한국에 온 아이가 레스토랑에 갔는데 음료를 못 시키더라. 메뉴판에 씌어 있는 글씨를 몰라서. 한국에서 영어유치원 다니던 조카는 메뉴판을 척척 읽는데(웃음). 그런 아이가 크면서는 한국에 있는 또래 아이들을 보고 걱정하며 불안해하는 듯했다. 그래서 우리가 말렸다. “공부하지 말라고 서머힐 보냈는데 왜 공부를 하려고 그래?” 하면서. 아이를 풀어주면 ‘신난다’ 하면서 제멋대로 할 것 같은가? 그렇지 않다. 아이들 스스로 사회적 압박을 받으면서 자신의 미래를 걱정하고 불안해한다. 그러니 부모가 할 일은 인생을 살아가면서 중요한 과제 앞에 선 아이를 지지하고, 아이가 위축되지 않게끔 도와주는 것이다. 이것이 교육의 알파요 오메가라고 나는 생각한다. 친구와의 갈등이나 입시 문제 등 중요한 과제 앞에 선 아이한테 “너 정말 애쓰고 있구나, 훌륭해” 하면서 지지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물론 실패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앞으로 살아가다 보면 또 다른 과제를 수도 없이 만나게 된다. 이들 과제를 수행하면서 아이의 자아가 건강해지고 완전해지고 심리적인 안정감을 가질 수 있다면 아이는 무조건 잘 살 수 있다. 반면 입시나 취직 같은 물리적 목표를 달성했다 해도 자존감에 상처를 입거나 세상에 대한 막연한 공포 내지 사람에 대한 불신을 경험하면 예후가 좋지 않다.

 

ⓒ치유공간 이웃세월호 유가족들의 심리치유 공간인 ‘치유공간 이웃’에서는 매달 죽은 아이들을 위해 생일 모임을 연다.
:대기업 CEO들을 상대로 동기 부여 프로그램을 진행할 때 “지금껏 당신이 살아오면서 누군가를 위해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언제 해봤느냐”라고 물어보면 대단한 답변이 나오는 게 아니다. 어릴 적 할아버지를 따라 낚시하러 갔는데 “넌 낚시도 잘하는구나” 그 한마디에 자신감이 붙어서 뭐든 잘해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고 했다. 반면 또 다른 CEO는 어릴 적 시험에서 100점을 받아 집에 갔는데 아버지한테 굉장히 두들겨 맞은 기억을 갖고 있었다. 답안지 글씨가 삐뚤빼뚤했다는 이유에서다.

:어릴 적부터 할머니 손에서 자란 아이가 있었다. 늘 전교 1등이어서 할머니가 자랑스러워하던 아이인데, 그 아이가 고등학생이 되어 요리에 관심을 갖게 됐다. 그런데 할머니는 충격이 컸던 모양이다. 판검사쯤 될 줄 알았던 손주가 요리하는 것을 용납하지 못했다. 할머니한테 애착이 컸던 아이는 그 뒤로도 자기가 정성껏 만든 요리를 할머니에게 가져가곤 했지만, 할머니는 늘 그 요리를 거절하곤 했다. 이래서는 아이가 앞으로 잘 살아가기 어렵다. 자기한테 소중한 관계에서 근본적인 상처를 지속적으로 받게 되면 자존감을 온전히 보전하기 어렵다.

:커밍아웃한 성 소수자들의 부모 모임이 있는데, 부모 대부분이 ‘아이가 스물 넘어 커밍아웃할 때까지 전혀 몰랐다’는 반응을 보인다. 사실 아이는 끊임없이 신호를 보냈을 것이다. 청소년기에 성적 정체성을 자각한 아이는 핏줄에 혈액이 흐르듯 24시간 그걸 의식하게 된다고 한다. 그런데도 부모들은 누구도 그걸 눈치채지 못한 것이다. 이럴 때 성숙한 부모는 ‘아이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를 먼저 생각하는데 미성숙한 부모는 “호적에서 파내겠다”며 펄펄 뛴다. 자신의 체면이나 가치관을 지키기 위해 자녀의 고통을 외면하는 것이다. 대학 교수인 후배 하나는 아들이 요리 공부하러 유학을 가고 싶다기에 “남자가 무슨 요리냐?” 하고 반대하다 정 가고 싶으면 딱 한 학기만 학비를 대주는 걸로 타협을 했다고 했다. 그 말 듣고 내가 후배에게 “미친×”이라고 욕을 해줬다. 우리가 살다 보면 잘못된 결정을 할 때가 많다. 아이도 유학을 갔다 ‘이게 내 길이 아니구나’ 싶어 방향을 선회할 수도 있다. 그런데 부모가 퇴로를 막아버리면 아이는 어떻게 하나. 만약 친구나 동료가 그런 어려움을 얘기한다면 후배도 그렇게 모질게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면서 자식한테만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라며 길길이 뛴다. 이건 부모가 아니라 미성숙한 인간일 뿐이다.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는 그러지 않으면서 부모·자식 간에는 관계가 아닌 특수성만 내세우는 것이다.

:정신과 생활을 한 지 25년이다. 그간 만나 일대일로 상담한 사람이 1만3000명은 되는 것 같다. 수많은 사람의 속마음을 들여다보면서 임상적으로 100% 확신하는 명제가 있다. 모든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기가 살길을 찾아 떠나게 돼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무의식이 갖고 있는 근원적 건강성 내지 균형성이다. 대기업 CEO들을 상담하다 보면 어느 날 사무실에서 직원들과 커피를 마시며 깔깔대다 말고 ‘이게 다가 아닌데’ ‘내가 이렇게 살려고 했던 게 아닌데’라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는 얘기가 반복적으로 나온다. 이게 바로 무의식적 건강성이다. 이 사람 내부에서 ‘네가 살길이 그 길이 아니다’라는 신호를 보내는 것이다. 왜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드는 건지 설명할 길이 없기에 자신도 당황스럽다. 지금 하는 일을 때려치우고 다른 일을 한다는 건 상상하기도 어렵다. 이렇게 휘청할 때 ‘이러면 안 되지’ 하면서 떠오른 생각을 떨쳐버리고 하던 일에 매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하던 일을 멈추고 자신의 내면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도 있다. 결국엔 후자가 자기 살길을 찾아간다. 이런 무의식적 건강성은 아이들에게 더 잘 살아 있다. 사회적 압박이나 가치판단 때문에 혼란스러워하는 어른들보다 훨씬 더 본능적으로 제 살길을 찾아간다.

:우리가 지금 안산에서 ‘치유공간 이웃’이라는, 세월호 유가족들의 심리치유 공간을 운영 중이다. 여기서 매달 죽은 아이들을 위해 생일 모임을 연다. 그런데 주인공 없는 이 생일 모임에 여러 번 참석한 또래 아이들이 있다. “여기 온 것 엄마가 아시니?” 하면 “모른다”고 대답한다. 아침에 얘길 꺼냈는데 엄마가 “너 고3인데 언제까지 그럴래? 엄마는 네가 그만 잊고 열심히 공부해 좋은 대학에 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때 네 마음이 어땠어?” 물어보면 “쌍욕이 치밀어 오르는 걸 간신히 참았다”고 한다. 대신 “엄마 친구가 죽어서 추모 모임에 가려는데 내가 ‘나 고3이니까 밥해주고 나가’ 하면 엄마는 기분 좋겠어?” 하고 나왔다고 했다.

:무의식적 건강성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아이는 살려고 이 자리에 오는 것이다. 죽은 친구한테 미안하고 왠지 모를 죄의식도 있던 차에 생일 모임에 가게 되면 친구 엄마가 “내 아이를 기억해줘서 정말 고맙다”라며 기뻐하니까, 그래도 내가 친구를 위해 뭔가 한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거다. 이걸 두고 수험생이니 가지 말라는 것은 너무 단순한 생각이다. 아이는 이 자리에 와서 친구 엄마를 위로하며 자기 마음을 정리한다. 그런 한편으로 엄마가 자신을 걱정한다는 것도 안다. 아이가 단순히 공부하기 싫어 이 자리를 찾는 것이 아닌 것이다. 아이의 이런 무의식적 건강성을 믿으셔야 한다. 언젠가 “그래도 부모가 간섭하거나 도움을 줘야 할 때가 있지 않나요? 도움 대 간섭은 어떤 비율로 하는 것이 이상적인가요?”라고 묻는 부모님이 계시기에 내가 ‘10대0’이라고 말씀드렸다. 도움은 충분히 주되 간섭은 전혀 하지 말라는 얘기다. 도움을 준다며 과제를 대신 해주고 친구 문제에 개입하라는 게 아니다. 인생에 닥친 과제 앞에 선 아이가 위축되거나, 두려움에 떨거나, 자존심에 상처를 받지 않게끔 아이를 지지하고 강화하는 데 부모가 사력을 다해야 하다는 것이다. 강의를 시작하면서 교육에 혁명이 필요하다는 말씀을 드렸는데 관계의 본질에 집중하는 것이 혁명의 철학이라면, 혁명의 수행법은 견디는 것이다. 아이가 몇 년째 게임만 하는데 그걸 보면서도 견디기란 정말 어렵다. 그래도 견뎌야 한다. 아이도 고민하니까. 미래에 대해 불안해하니까. 부모보다 더. ‘10대0’으로 도움만 주고 개입하지 않으면서 죽을 힘을 다해 버티고 견디는 것, 나아가 왜 그래야 하는지 끊임없이 깨달아가면서 견디는 것이 부모가 실천해야 할 핵심 사항이라고 말하고 싶다.

 

ⓒ서머힐 제공영국 서머힐 학교 아이들이 공놀이를 하며 자유롭게 놀고 있다.
:“두 분은 특별한 케이스죠. 우리 아인 정말 특별해서 그냥 놔둘 수가 없어요” 하는 분들이 많아서 막내 얘길 더 드려야 할 것 같다. 막내는 말문이 늦게 트이고,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했다. 중학생이 되도록 농담도 잘 알아듣지 못했다. 자폐아가 아닌지 검사를 받을 정도였다. 행동도 굼떠서 밥 한 번 먹는 데 1시간30분은 보통이었다. 그래서 식당에 갈 때면 주인에게 “아이가 밥을 늦게 먹는다. 아이 때문에 손님을 더 받을 수 없으면 내가 테이블 2개 차지한 값을 내겠다”라고 먼저 부탁해두는 게 일이었다. 아이는 지금껏 내가 그런 일을 하고 다녔는지 모른다. 아이한테 늘 “넌 머리도 좋고 똑똑해”라고 칭찬했기에 정말 그런 줄로만 안다. 막내는 중3이 돼서야 친구를 처음 사귀고 공부에도 흥미를 보였다. 그러기까지 우리는 늘 기도하는 심정으로 기다리며 견뎠다. 여러분께 보여드리지 못해 안타까운데, 그 세월 동안 성질을 죽이고 십자수 놓느라 내 허벅지가 상처투성이다(웃음). 때로는 어금니를 물고 참았다. 부모가 견딘다는 건, 비유컨대 100만 평쯤 되는 넓은 목장의 울타리가 되어주는 일인 것 같다. 평소에는 목장이 너무 커서 동물들이 울타리가 있는 줄도 모르고 지낼 것이다. 그렇지만 어쩌다 벼랑 끝에 다가설 상황이 됐을 때 ‘어, 여기 울타리가 있었네?’라고 아이가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지나고 보면, 참고 견딜 때는 힘들었지만 지금은 내가 너무 자랑스럽고 잘했구나 싶다. 결론 삼아 말하자면, 부모·자식 간의 문제를 잘 해결하려면 부모가 일단 편안해져야 한다. 비행기를 타면 비상시 산소호흡기 설명이 나오는데, 노약자가 곁에 있더라도 자신부터 호흡기를 쓰라고 말한다. 아이 먼저 호흡기를 씌웠다가는 나도 죽고 상황이 더 위험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내가 먼저 호흡기를 써서 호흡이 안정된 다음 아이를 살리려 나서야 한다. 우리(부부)는 대화하고 함께 있는 것을 정말 즐기는데, 그런 상호작용 덕분에 여기까지 온 것 같다.

:서머힐에는 전 세계에서 아이들이 온다. 그런데 개중에는 적응기가 필요하다며 서머힐 주변 마을에 집을 구해 사는 부모들도 있는 모양이다. 그러면 아이들은 주말마다 부모 집에서 지내곤 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이를 불편해한다고 한다. 기숙사에서 친구들과 마음껏 지내고 싶은데 그러질 못해 안타까운 것이다. 이를 본 우리 딸아이는 ‘적응기라는 게 아이의 적응을 위해 필요한 게 아니라 아이를 떼놓은 부모의 불안을 진정시키는 데 필요한 적응 기간인 것 같다’고 자기가 쓴 책에 적었다. 안산 단원고의 경우 새 교장 모시기가 최대 이슈였다. 생존 학생들의 불안과 두려움을 가라앉히고 학교를 안정시켜야 했기 때문이다. 단원고 부모들이 희망한 것은 혁신학교를 성공시킨 것으로 유명한 인근 학교 교장선생님이었다. 그러자 그 학교 부모들이 반발했다. 자기네 교장선생님을 뺏길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결국엔 그 교장선생님이 단원고를 선택한다. 이유는 본래 있던 학교 아이들이 “선생님이 가셔야 한다”라고 했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다 알고 있다. 다 느끼고 있다. 아이들을 아이들로만 보면 안 된다. 부모 처지에서 아이들은 어리고 어리석어 지도해줘야 할 존재라고 생각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아이들은 어른보다 더 온전하고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존재다. 가만히 보면 얼마든지 이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정리·김은남 기자 

기자명 정혜신(정신과 전문의)·이명수(‘치유공간 이웃’ 대표)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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