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인 중 한 명은 아들과 사이가 영 좋지 않다. 공부에 의지가 없는 아들을 공부하게 만들려고 이러저러한 대화와 시도를 해봤지만 별로 나아지지 않고 있다. 그가 내린 결론은 자기가 아들과 대화하며 이야기를 끌어내는 기술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상담을 ‘공부’하기로 결정했다. 얼마 전부터 부모를 위한 상담을 공부하고 있으며 그 공부가 끝나면 상황이 나아질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다.

아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학교 공부에 전념했으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아도 된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찾고 그걸 실현하면 된다. 그러기 위해서 아들이 해야 하는 것 역시 공부다. 기타를 치고 싶으면 그저 집에서 기타를 치는 것이 아니라 학원에 가든지 고수를 찾아가든지 제대로 배웠으면 좋겠다. 학교건 학교 바깥이건 아들이 했으면 하는 것이 ‘공부’라는 점에서는 마찬가지다. 그래서 아들이 뭔가 새로운 것에 호기심을 보이면 기뻐하면서 공부할 것을 권한다.

건국대 의대 정신과 하지현 교수와 몇 차례 대담을 나누며 우리는 이런 현상을 ‘공부 중독’이라 부르기로 했다. 한국 사회가 다 공부에 중독되어 있다는 것이다.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공부 중독이 아니다. 실제로 공부를 하고 있건 공부를 하고 있지 않건,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부를 하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독’이다. 문제가 생기면 공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공부를 하면 그 문제를 풀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공부를 삶의 만능키처럼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한국 사회가 공부를 만능키라고 생각하게 된 것은 실제로 공부가 삶에서 만능키 구실을 한 적이 있어서다. 특히 1960~1970년대에 태어난 사람들에게 공부는 신분을 상승시킬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이러저러한 사회적 조건에서 부모들이 그들의 공부에 ‘올인’한 경우가 많았고, 그 결과 그들은 공부를 통해 성공했다. 개인의 성공에서부터 사회를 바꾸는 데 이르기까지 ‘공부’에 대한 강력한 믿음을 갖게 되었다. 그렇게 자란 이들이 부모가 되면서 자녀들과 자신 모두에게서 공부를 통해 어떤 문제든 해결하려고 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공부 만능론’이 정점에 도달할 여러 조건이 갖추어진 셈이다.
 

ⓒ박해성 그림

문제는 그 만능키 구실을 하던 공부가 이제는 완전히 뒤집힌 효과를 내고 있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삶을 통해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준비하는 단계로 공부가 분리되어 있다. 공부를 삶의 내부 과정으로 보지 않고 삶의 바깥에 있는 어떤 것으로 여긴다. 그 공부가 끝나야 비로소 제대로 된 삶을 시작하는 것처럼 공부와 삶이 단계화되어 있다. 그 결과 공부는 삶의 문제 해결을 유예하고 그로부터 도망가는 좋은 핑계가 되고 있다. 하지현 교수의 말을 빌리자면, 아직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말로 타석에 들어서는 연습만 하지 실제 타석에 들어가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공부하느라 바빠서 공부할 시간이 없다?

사회적으로 보면 타석에 들어서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들의 등장은 권력의 처지에서도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다. 타석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자리를 확대 재생산할 능력도 의사도 없는 권력은 이 현상을 적극 활용한다. 한마디로 타석이 부족한 것을 감추고 선수의 준비 부족을 탓하기로 한다. 그들이 해야 할 것은 현장에서 필요한 능력을 갖출 수 있게 하는 공부다. 그래서 청년실업 대책의 대부분이 능력을 가질 기회, 즉 공부를 하게 하는 것이다. 이런 점 때문에 인턴 자리만 넘쳐난다. 일자리 부족을 공부 뺑뺑이를 돌리는 것으로 때우고 있다.

공부에 대한 윗세대의 절대적 믿음과 공부 말고는 아무것도 제공하지 못하는 사회적 조건이 만나 삶에서 겉도는 공부만 하는 희한한 시대가 되었다. 그래서 한 대학생이 푸념한 것처럼 “공부하느라 너무 바빠서 ‘공부’를 하지 못하는” 황당한 일이 벌어진다. 공부 만능 시대에 정작 ‘공부’가 가장 희귀하고 불가능한 것이 되어버린 것이다. 사람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면 무릎을 치면서 동의한다. 그러면서 묻는다. 그럼 무슨 ‘공부’를 해야 하나요? ‘노답’이다. 이런 방식으로는 뭘 공부해도 이전의 공부는 없어지고 앞으로의 공부도 ‘도로아미타불’하기 때문이다.

기자명 엄기호 (덕성여대 문화인류학 강사)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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