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식씨(50)는 1년6개월 만에 전남 완도군 고금도를 찾았다. 이 섬의 염전에서 그는 10년 이상 강제 노동과 폭행에 시달렸다. 지난해 떠들썩했던 ‘염전 노예 사건’의 피해자 가운데 한 명이다. 김씨는 고금도에 내려온 해가 언제인지를 기억하지 못한다. 지적장애 3급으로 일상생활에는 지장이 없지만 날짜 개념이 확실하지 않다. 이 장애 때문에 김씨는 억울함을 구제받지 못할 위기에 놓였다.

광주지검 해남지청은 광주장애인인권침해예방센터가 김씨를 대신해 가해자인 염전 업주와 김씨를 유인한 염전 업주의 동생을 형사고발한 사건에 대해 지난 7월 불기소 처분을 내렸다. 불기소 처분서에 나오는 이유는 이렇다. ‘피해자는 피해 사실에 대해 구체적으로 진술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대략적으로라도 진술하지 못하고 있으며 이를 입증할 증거 자료나 기타 참고인의 진술 등이 없어 증거 불충분하므로 불기소.’ 지적장애인인 김씨의 진술을 일반인과 같은 잣대로 판단한 것이다.

노동력착취 목적 유인죄 등 6가지 혐의는 ‘증거 불충분’으로 혐의 없음 처분이 났다. 장애인복지법 위반은 죄가 인정됐지만 기소유예가 내려져 처벌받지 않는다. 김씨의 후견인인 사회복지사 안효철씨는 “경찰이 증거를 찾으려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다”라고 분통을 터뜨렸다. 김씨가 떠올리고 싶지 않은 고금도를 다시 찾은 건 그 때문이다. 염전과 마을을 돌아보며 사회복지사들이 김씨의 진술이 사실인지 현장검증에 나서기로 했다.
 

ⓒ시사IN 김연희고금도의 한 염전에서 강제 노동을 한 김동식씨.

완도로 출발하기 전 김씨는 급히 모자를 찾았다. 염전 주인인 “배남이(가명)” 눈에 띄지 않으려면 얼굴을 가려야 한다고 했다. 차에 코팅이 돼 있어 밖에서는 보이지 않는다고 안심시켰지만 김씨는 광주에서 고금도로 가는 2시간 동안 뒷좌석 손잡이를 꼭 붙들고 있었다.

김씨의 고향은 경기도 남양주다. 10대 때 일을 찾아 서울로 올라왔다. 을지로·신당동 일대 봉제공장에서 “아이롱(다리미질) 일을 했다.” 1997년 외환위기는 김씨에게도 가혹했다. 공장에서 해고당한 그는 서울역 앞에서 노숙자 생활을 했다. 염전 주인 이배남씨(가명·68)의 쌍둥이 동생 이배순씨(가명)를 만난 게 그때다. 이씨는 섬에 사는 형네 집에 놀러가자며 김씨를 꼬드겼다. 악몽의 시작이었다.

염전 주인에 대한 처벌은 ‘500만원 벌금형’

고금도에 도착한 다음 날부터 일을 했다. 새벽 4~5시면 일어나 밤늦은 시간까지 강제 노동에 시달렸다. 10여 년을 일하고 임금은 한 푼도 받지 못했다. 염전에서 소금을 내지 않을 때는 소를 돌보고 논농사를 지었다. 검찰이 2009년 3월부터 2014년 3월까지 최근 5년으로 기간을 한정해 추산한 체불 임금만 6000만원 가까이 된다. 광주장애인인권센터는 최소한 2003년부터 김씨가 노동 착취를 당했다고 본다. 전남 강진의료원에 2003년 8월 김씨가 6일간 입원한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김씨는 날짜를 특정하지는 못했지만 당시 상황을 또렷이 기억했다. “송대네 집 지붕 공사하는데 가라고 해서 일하다 떨어졌다. 발목에 금이 가 배 타고 강진의료원에 가서 입원했다.”
 

ⓒ시사IN 김연희김동식씨가 강제 노동을 한 염전.

노동은 폭행과 폭언을 통해 강요됐다. “돌팍으로 머리를 찍었다. 소 제대로 못 돌본다고. 국자로 맞아서 이마에 피가 난 적도 있다.” 고금리 주민 역시 김씨의 진술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소송을 걸었다고 하자) 완전히 다 말해부렀구마잉. 여기서 수십 년 살았제. 배남이가 나가다가 두들겨 패고 했지.”

1년6개월이 지났지만 염전 주인은 여전히 공포의 대상이다. 염전에 이씨가 나타나자 김씨는 쿠션으로 얼굴을 가린 채 차 밑으로 몸을 숨겼다. 자신의 방문 사실을 알리고 싶어 하지 않는 김씨를 대신해 이씨를 만났다. 이씨는 폭행 사실을 전면 부인했고, 임금 체불에 대해서는 목소리를 높였다. “동식이가 하루에 담배를 네 갑씩 피운다. 커피 한 박스씩, 휴지 1개씩 꼭 사줘야지. 밥도 많이 먹고 일도 딱 시킨 것만 한다. 먹여주고 재워주고 노래방 데려가고… 그런 사람이 어디 있나.” 이씨는 남양주에 찾아가 김씨의 아버지에게 각서를 받아온 얘기도 꺼냈다. 이씨에게 아들을 위탁하며 추후 이익을 청구하지 않겠다는 내용이었다. 김씨의 아버지가 글을 몰라 동네 이장이 대신 써주었다. 김씨는 아버지가 치매에 걸렸다고 했다.  

이장과 슈퍼 주인에게 신고를 부탁해보기도 했다. 그때마다 제보는 이씨에게 전해졌다. 파출소에 가기 위해서는 김씨가 살던 마을에서 차로 15분을 더 들어가야 했다. 2004년 고금 파출소에서 근무했던 경찰관이 먼저 김씨를 알아봤다. 2004년 당시 염전 조사를 나갔을 때 김씨를 봤다고 했다. 노동 착취 사실을 몰랐느냐고 묻자 “염전 주인이 돈도 주고 있고 폭행한 적도 없다고 해서 알지 못했다”라고 답했다. 반면 김씨는 경찰이 직접 질문했고 돈을 받지 못한 사실을 알렸다고 기억했다. 고금도를 떠나며 동행했던 안효철 후견인은 착잡한 심정을 내비쳤다. “간단한 방문만으로도 김씨의 말이 사실이라는 걸 확인할 수 있지 않나.”
 

ⓒ시사IN 김연희2004년에 경찰이 염전을 조사한 적이 있었다. 당시 조사했던 경찰관(위)을 만났다.
이 사건을 담당하는 최정규 변호사(경기장애우권익문제연구소 소장)는 “수사 현장에서 장애인의 특수성이 전혀 고려되지 않고 있다”라고 말했다. 1차 증거가 피해자 진술밖에 없는 상황에서 진술이 일관되지 못하면 탐문 수사 등을 통해 추가 증거를 확보하는 대신 사건을 접어버린다는 것이다.

이배남씨는 근로기준법상 최저임금을 위반한 혐의로 지난 2월 500만원 벌금형을 받았다. 최 변호사는 “한 개인의 인격권이 말살된 범죄다. 이씨가 단순히 최저임금법을 어긴 경제사범으로만 처벌받아서는 안 된다”라고 말했다. 김씨는 이씨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청구했다. 그러나 2012년 이씨가 파산선고를 받은 바 있어서 승소를 해도 실질적 배상이 이루어질지는 알 수 없다. 광주지검 해남지청은 8월19일 광주장애인인권센터가 제기한 항고를 받아들여 재수사에 착수한다고 밝혔다.

김동식씨는 요즘 옛 경력을 살려 ‘아이롱 일’을 다시 한다. 광주의 한 사회적 기업에서 기아 타이거즈 유니폼을 만든다. 일이 끝나면 집 근처 공원에서 휴대용 라디오로 노래를 들으며 운동을 한다. 10년 넘게 유예당한 평범한 일상이다. 염전 주인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느냐는 질문에 김씨는 고개를 흔들며 답했다. “처벌만 하면 돼요. 질려가지고.”

기자명 김연희 기자 다른기사 보기 uni@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