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겨울 캄보디아 여행을 떠올려보자. 앙코르와트를 구경하고 나온 뒤 들른 작은 사원 기억나니? 학교를 지으려고 땅을 파다가 나왔다는 백골 수백 구가 전시돼 있었지. 1970년대 중반 캄보디아를 다스린 폴 포트라는 사람이 캄보디아를 ‘킬링필드’, 즉 살육의 벌판으로 만들어버렸던 참혹한 과거의 흔적 가운데 하나야.  

백골 앞에서 아빠는 잠시 캄보디아의 지난 역사를 떠올렸단다. 캄보디아 땅에는 한때 동남아를 호령하는 강대국이던 크메르 제국이 있었어. 그러나 이민족의 침입과 지배자의 폭정 등 여러 이유로 앙코르와트는 버려졌고, 크메르 제국과 그 이후의 캄보디아는 점점 쪼그라들고 말았지. 특히 한때 크메르 제국의 지배하에 있었던 사이암(타이)에게 캄보디아는 허구한 날 두들겨 맞고 속국 노릇을 해야 했어. 캄보디아의 지배자들은 스스로 강해지기보다는 또 다른 외세, 인도차이나 반도 동쪽 해안가에서 세력을 떨친 베트남을 끌어들였지.

캄보디아 왕은 베트남과 혼인 동맹을 맺지만, 예나 지금이나 강한 쪽과 약한 쪽의 ‘동맹’이란 “엎드려뻗쳐서 두 손 들어” 하는 구령처럼 말이 안 되는 소리. 베트남은 거침없이 캄보디아를 잠식해 들어갔고 19세기 중반에는 아예 베트남의 일부로 만들어버리려고 해. 하지만 사이암과 베트남, 동남아시아의 두 강국은 캄보디아를 사이에 두고 티격태격하기를 그치지 않는단다. 캄보디아의 지배층도 친사이암 파와 친베트남 파로 나뉘어 서로 팔을 걷어붙였고.
 

ⓒEPA폴 포트가 이끈 크메르 루주에 의해 희생된 이들의 두개골.

기세등등하던 베트남이 프랑스의 식민지가 되면서 캄보디아의 운명도 정해졌지. 어차피 망할 거 센 놈에게 붙자는 심리였을까. 캄보디아는 1864년 프랑스의 보호령을 자처하고 1884년에는 아예 통치권을 프랑스에 넘겨버려. 제2차 세계대전 뒤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프랑스가 물러가면서 캄보디아도 해방을 맞게 돼. 그즈음 프랑스와 맞서 싸우던 베트남 공산주의자 사이에는 캄보디아 공산주의자도 끼어 있었는데 “과묵하고 예의 발랐던” 수더분한 인상의 ‘살롯 사’도 그중의 하나였어. 이 살롯 사의 가명 또는 암호명이 바로 ‘폴 포트’였지.

폴 포트는 공산주의 비밀 활동을 하다가 발각될 위기에 처하자 정글로 들어가서 게릴라전을 펼쳤는데, 이 사람의 세력을 키워준 건 다름 아닌 미국이었어. 베트남 전쟁을 치르던 미국이 캄보디아에 자신들의 꼭두각시인 론 놀 정권을 세우고, 캄보디아를 거쳐 가던 베트남 공산군, 즉 월맹군의 보급로를 맹폭격한 거야. 베트남 땅에서 벌어진 전쟁 때문에 애꿎은 캄보디아 사람들 수십만명이 죽었어. 이걸 1차 킬링필드라고 해. 수십만 동포를 폭격으로 죽인 미국에 대한 캄보디아 사람들의 감정이 좋을 리가 있겠니? 폴 포트와 그가 이끄는 ‘크메르 루주’ 조직은 이를 철저히 이용해 힘을 길러서, “론 놀이 얘기하면 부하들은 무조건 졸기 시작한다”라는 말을 들을 만큼 무능했던 론 놀 정권을 타도하고 캄보디아를 장악해. 나라 이름은 ‘민주 캄푸치아’.

그런데 한때 성실한 교사이던 폴 포트는 공산주의자이기 전에 상당히 과격한 민족주의자였어. 캄보디아 민족 제일주의라고나 할까. 그의 이상은 ‘골고루 잘사는 공산주의 낙원’도 있었지만, 앙코르와트로 대변되는 과거 크메르 제국의 영광 재현에 더 관심이 많았어. 봉건제도를 타파하겠다는 사회주의 혁명에 ‘성공’했지만 캄푸치아의 국기에 여전히 앙코르와트가 그려져 있었던 걸 보면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1975년 수도 프놈펜을 함락시킨 후 승리 연설에서 그는 이렇게 얘기했다고 해. “우리는 어떤 외부 세력과도 연계되지 않은 깨끗한 승리를 거두었다. 민주 캄푸치아는 앞으로 고립을 택할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식대로 살아가겠다”는 선언이었어. 그리고 폴 포트와 크메르 루주 간부들은 자신의 이상(理想)을 그야말로 ‘우리 식대로’ 실천에 옮겼어.

“도시는 개조될 수 없지만 인간은 개조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땀을 흘리며 농사를 지어봐야 농사일의 진정한 가치를 알게 됩니다”(〈폴 포트 평전〉 필립 쇼트 지음, 실천문학사)라는 말대로 그들은 도시민을 모조리 농촌으로 내려보내 농사를 짓게 했어. 이에 반대하는 사람은 동료라도 죽여버렸지.
 

ⓒUPI1985년 무렵의 폴 포트.

더 이상은 캄보디아와 닮지 않기를 바라며

폴 포트의 선언은 그저 과대망상이었지만 캄보디아 사람에게는 현실로 닥쳐왔어. 온 나라에 피바람이 불었지. 농민 외에는 다 가짜라고 봤던 크메르 루주는 영어를 할 줄 안다는 이유로, 손바닥에 굳은살이 없다는 명목으로, 심지어 안경을 썼다는 이유로 사회의 장애물로 취급하고 죽여버렸어. 아이들을 나무에 패대기쳐 죽이면서 나무에 스피커를 달아 온 마을 사람들이 듣게 했다는 얘기, 유독 가시가 많은 설탕나무로 매질해서 죽였다는 사연 등등 캄보디아의 킬링필드는 그야말로 ‘상상 그 이상’이었어.

위대한 캄보디아를 재현하기 위해서는 내부와 외부의 적을 없애야 했지. 이를테면 캄보디아에 살던 참족(앙코르와트 벽에는 이 민족과의 전투 부조가 그려져 있어)은 폴 포트 치하에서 참담한 민족 말살을 당한다. 또 폴 포트는 한때 공산주의 투쟁 동지이던 베트남에도 원한이 많았어. 역사적인 이유에 더해서 현실적으로 캄보디아에 많이 살던 베트남 사람들도 ‘외세의 위협’으로 보았으니까. 인구 1000만이 안 되는 형편에 그나마 100만명 정도를(정확히는 아무도 몰라) 스스로의 손으로 죽여버린 캄보디아의 지도자 폴 포트는, 급기야 6000만 인구에 미국과의 전쟁으로 단련된 베트남을 공격하는 광기를 보여. “베트남 놈들을 정글 속 원숭이들처럼 깩깩거리며 죽게 하라.” 베트남은 여지없이 침략군을 무찌르고 과거 그들의 조상이 했던 대로 캄보디아로 밀고 들어가 크메르 루주를 몰아낸 뒤 친베트남 정권을 세우지. 크메르 루주는 정글로 쫓겨났고 그곳에서 폴 포트는 그의 죄악에 비하면 너무나 편안한 최후를 맞았단다.

캄보디아라는 나라의 역사를 길게 들려주는 이유는 기시감(旣視感)이 들 만큼 우리나라 역사와의 공통점이 많기 때문이야. 강대국 사이에 끼어서 이 눈치 저 눈치를 보다가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 역사며, 스스로 뭘 해보려 하기보다는 강대국에게 업혀가려고 친청파·친일파·친미파·친러파 하며 치고받은 일이며, 이념 갈등으로 같은 민족의 손으로 같은 민족의 수백만 생명을 앗아버린 과거부터 그렇지.

더욱이 “우리 식대로 살아가자”고 부르짖는 우리 민족 제일주의에 ‘최고 존엄’에만 몰두하고, 고모부부터 최고 서열 장군에 이르기까지 별 죄목도 없이 죽여 없애버리고, 정말 전면전이 벌어지면 자신부터 몰락할 처지인데도 기이한 도발을 감행하는 북한 지도자에게서도 캄보디아와 폴 포트의 영상이 스쳐 지나가기 때문일 거야. 물론 북한 지도자들은 폴 포트보다는 현명할 거야. 아니 그래야 해. 동시에 아빠는 남한의 지도자들도 사상 최악으로 무능한 미국의 꼭두각시였던 캄보디아의 론 놀 정권보다는 어리석지 않기를 바란다. 그리고 이건 아빠를 비롯한 어른들이 그렇게 만들어야 해. 너희들이 킬링필드에서 누군가를 죽이고 죽임을 당하지 않게 만들기 위해. 우리가 캄보디아에서 봤던 그 깊은 좌절과 슬픔의 눈망울이 다시는 이 땅을 배회하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해. 캄보디아의 발전을 기원하며. 그리고 우리가 캄보디아와 더 이상 닮지 않기를 기대하며.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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