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8월은 박근혜 정부 들어 남북관계가 가장 불안했던 한 달로 기록될 것 같다. 북한이 지뢰 도발에 이은 포격으로 남북관계를 초긴장 상태에 빠뜨렸고, 정부는 우왕좌왕하며 또다시 ‘컨트롤타워 부재’를 실감케 했다.

박근혜 대통령은 “진정한 광복은 통일”이라는 광복 70주년 경축사를 남기면서도 남북 경색 국면을 풀기 위한 조치는 아무것도 취하지 않았다. 일각에서는 청와대가 광복 70주년을 맞아 남북관계를 개선할 ‘이벤트’를 벌이려 했으나 북한의 지뢰 도발로 취소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결과적으로 정부와 여당은 이번 사태에 뚜렷한 해법을 내놓지 못한 채 사실상 손을 놓고 있다.

이 와중에 가장 두드러진 건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다. 천안함 사태 이후 북한과의 교류협력을 금지한 5·24 조치를 해제해야 한다고 주장해 정가에 파문을 일으켰다. 북한이 준전시 상태를 선포한 이후에도 문 대표는 북한과의 조건 없는 고위급 회담 개최를 제안하는 등 ‘담대한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문재인 대표가 5·24 조치 해제를 주장한 것은 광복절 이튿날인 8월16일이었다. 광복 70주년을 맞아 연 기자회견에서 북한과의 경제협력을 돌파구로 삼는 ‘한반도 신경제지도’ 구상을 발표했다. 이날 질의응답을 끝내려는 순간, 한 기자가 마이크를 들었다. “북한이 지뢰 도발을 해온 상태에서 남북 협력을 제안했는데, 여론의 역풍을 염려하지 않나?”

ⓒ연합뉴스8월16일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가 광복 70주년을 맞아 북한과의 경제협력을 돌파구로 삼는 ‘한반도 신경제지도’ 구상을 발표했다.

문재인 대표는 기다린 질문이라는 듯 입을 열었다. 그리고 다소 장황하다 싶게 말을 이어갔다. “우리 남북관계가 그렇다. 박정희 대통령 때 무장공비가 청와대를 습격했지만, 7·4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전두환 정부 때는 아웅산 테러가 발생했지만, 대화의 끈을 놓지 않았다. 노태우 정부도 KAL기 격추 사건이라는 엄청난 도발이 있었지만 북한과 대화해서 남북기본합의서를 만들어냈다. 지뢰 도발 사건에 단호히 대응해야 하지만, 그런 가운데에서도 북과 대화해야 한다. 그렇게 남북관계를 발전시켜야 한다.”

북한의 포격과 준전시 상태 선포를 예견이라도 한 듯한 태도였다. 웬만한 경색 국면이 아니고서는 적극적인 남북 교류협력 기조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기세였다. 북한의 준전시 상태 선포 직후에도 새정치민주연합의 핵심 당직자는 “타이밍이 안 좋긴 하지만, 오래 준비한 내용이다. 카드를 도로 집어넣는 일은 없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문 대표에게 한반도 신경제지도 구상은 ‘집권 전략’이다. 이른바 ‘경제통일론’이다. 남북 경제공동체를 기반으로 북쪽으로는 중국과 러시아, 남쪽으로는 일본을 잇는 ‘동북아 경제권’의 중심에 선다는 구상이다. 이를 통해 미국, 독일, 일본에 이어 세계에서 네 번째로 ‘3080 클럽’(인구 8000만 시장 규모에 국민소득 3만 달러)에 가입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5·24 조치 해제는 그 첫 단추다.

이는 정부·여당과의 차별화와 맞닿아 있다. 광복절 경축사에서 보듯 알맹이는 없고 레토릭(“진정한 광복은 통일”)만 있는 박 대통령과 달리 과감한 대북 조치를 주장했다.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 직후 제1야당 대표가 여봐란 듯이 대북 메시지를 던졌다는 점에서 정가의 주목도도 컸다.

문 대표의 경제통일론은 ‘오래 만진’ 작품이다. 외교안보통인 홍익표 의원, 민주정책연구원 우석훈 원장 등과 함께 여러 차례 토론을 거쳤다. 특히 한반도 신경제지도는 문 대표가 직접 구상한 것으로 알려졌다. 뚜렷한 해법이 없다는 비판을 받아온 ‘유능한 경제정당’ 비전의 핵심으로 남북경협을 들고 나온 것이다.

남북 긴장은 고조되는데… 묘수 될까?

‘사전 정지작업’도 치밀하게 진행됐다. 당 대표 취임 이후 계속된 ‘안보 행보’가 그것이다. 야당 대표로서는 처음으로 천안함 사태를 ‘북한의 폭침’으로 규정하고, 틈만 나면 군부대를 방문해 군 장병들과 호흡을 맞췄다. 당 안팎에서 ‘우클릭’이라는 비판이 나왔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지뢰 도발 사건이 발생하자 여당보다 한발 앞서 당 차원의 ‘북한 규탄 결의문’을 채택하기도 했다. 5·24 조치 해제와 한반도 신경제지도 구상은 이런 일련의 안보 행보 끝에 내놓은 승부수다.

이뿐만 아니다. 당 안팎에서는 문 대표의 경제통일론이 새정치민주연합 ‘내부’를 겨냥한 포석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무슨 뜻일까. 제1야당에는 금과옥조 같은 가치가 있다. 통일 문제다. 정치·경제·사회 이슈 등에서 의원들마다 미묘하게 의견이 갈리는 새정치민주연합이지만, 통일에서만은 예외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첫발을 뗀 남북 화해 기조는 새정치민주연합의 흔들리지 않는 ‘당론’이다. 계파 갈등으로 얼룩진 새정치민주연합이 ‘단결’할 수 있는 유일한 계기라는 이야기다.

비노계 좌장 격인 박지원 의원이 가장 먼저 문 대표의 기자회견을 두둔하고 나섰다. 특히 박 의원이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설사 이번 회견이 대권을 의식하고 한 것일지라도 당연히 할 얘기를 한 것이다”라고 말한 대목이 의미심장하다. 박 의원은 지난 2월 당 대표 선거 때부터 당권-대권 분리론을 주장하며 문 대표의 대권 행보를 집요하게 비판해왔다. 이는 비노계가 문 대표를 공격하는 주요 소재이기도 했다. 그랬던 박 의원이 문 대표의 ‘집권 전략’을 용인한 셈이다. 정부·여당이 문 대표를 공격할수록 비노계가 문 대표를 흔들 명분이 사라지게 된다. 광복절 메시지의 효과다.

문재인 대표 개인으로서도 호남과 비노계에 진 ‘빚’을 덜 기회다. 문 대표는 노무현 정부에서 대북 송금 특검을 실시할 때 청와대 민정수석을 지냈다. 문 대표는 당시 “김대중 전 대통령도 수사해야 한다”라는 견해를 밝혀 호남과 동교동계로부터 원망을 샀다. 정가에서는 친노-비노 갈등의 기원을 이 대북 송금 특검에서 찾는 이가 많다. 대북 송금 사건으로 징역형을 산 대표적인 정치인이 김대중 전 대통령의 비서실장이었던 박지원 의원이다.

남북 대립이 격화된 상황에서 나온 문재인 대표의 메시지에 대한 여론은 물론 좋지 않다. 한국갤럽이 8월21일 발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우리 정부가 먼저 5·24 조치를 해제해야 한다’고 응답한 이는 22%였다. 68%는 ‘북한의 태도 변화 이전에는 그럴 필요 없다’고 답했다. 당권과 대권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던진 문재인의 승부수가 묘수가 될 수 있을까. 두고두고 곱씹어봐야 할 정치적 국면이 될지도 모른다.

기자명 이오성 기자 다른기사 보기 dodash@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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