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엄마는 ‘시다’였다. 그러다 ‘미싱사’가 되었고 관리직 남자를 소개받아 결혼했다. 직접 자신의 공장을 차린 남편 덕분에 잠시 사모님 소리를 듣던 시절도 있었으나, 불행히도 그 시절이 길지 않았다. 부도와 압류, 채무와 추심이 엄마의 미래를 ‘오버로크’ 쳤다. 화장품 방문판매가 새로운 직업이 되었다. 부지런히 발품 팔아 모은 돈으로 작은 가게를 얻었다. 공장이 망한 뒤로 이렇다 할 벌이가 없던 남편 대신 그렇게 생활비를 벌었다. 자식 셋을 모두 대학에 보냈고 빠짐없이 결혼도 시켰으며 손주 여섯을 얻었다. 그러자 남편이 쓰러졌다. 병구완 5년째. 여든을 바라보는 엄마는 오늘도 낑낑대며 혼자 남편을 먹이고 입히고 앉히고 눕히고 치우고 닦는다.

다큐멘터리 〈위로공단〉을 보면서 나는 줄곧 내 엄마를 떠올렸다. 평생 쉴 틈이 없더니만 여생에도 쉴 짬이 나지 않는 당신을 생각했다. 정신없이 재봉틀 돌리는 방직공장 여공의 청춘에서 시작한 이야기가, 또래의 누군가를 간병하며 생애 마지막 노동을 이어가는 어느 요양보호사의 노년으로 마무리되는 작품. 내 엄마의 일생이 거기, 스크린 안에 담겨 있었다. ‘평생 쉴 틈이 없더니만 여생에도 쉴 짬이 나지 않는’ 모든 여성들이 거기, 스크린 안에 모여 있었다. 거기, 스크린 안에, 대한민국의 어제와 오늘이 통째로 들어 있었다.
 


임흥순 감독은 2010년부터 2년 동안 금천예술공장에 머물 때 〈위로공단〉을 구상했다. “과거 ‘구로공단’이 입지하던 서울 서남단 지역에 문화적 활기를 불어넣고자” 서울시가 마련한 예술창작공간. 한때는 인쇄공장이, 또 언제인가는 양복공장이 있던 자리에 문을 연 그곳에서 감독은 어느 날 문득 스스로에게 물었단다. “(여기에서 일한) 그 많던 여공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1978년 ‘동일방직 노동자 투쟁’ 당시 그 악명 높은 ‘오물 투척 사건’을 겪은 여공들부터 찾아 나섰다. 사람대접 해달라고 요구했다가 회사가 뿌린 똥물을 뒤집어썼던 소녀들이 담담히 그때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어서 카메라는 1980년대 구로공단 여공들의 주름진 현재 얼굴을 담고, 그 시절의 구로공단 여공들과 똑같은 대우를 받으며 일하는 동남아시아의 한국 의류업체 여성 노동자들을 찾아간다. 이윽고 기륭전자의 김소연, 한진중공업의 김진숙, 삼성 반도체 공장의 수많은 피해자 이야기를 차례로 듣는다. 콜센터와 대형마트와 항공사에서 일하는 감정 노동자에게도 공평하게 말할 기회를 준다. 위로, 위로 가자고 다그치는 세상에서 아래로, 아래로 떠밀려갔던 여성들. 그들이 말하고 영화는 듣는다. 영화가 말하고 관객이 듣는다.

나의 95분을 기쁘게 선물하는 일

“위로는 상대에게 내 시간을 선물하는 것입니다. 상대에게 아무 말 하지 못하더라도, 함께 충분히 옆에 머물면서, 당신이 내게 중요하다는 것을 시간을 통해 증명하는 것이 위로입니다. 어떤 보상이 없더라도, 당장 기분이 풀리지 않는다 해도 당신을 위해서라면 내 시간을 기꺼이 쓰겠다는 마음이 상대를 위로해줍니다.”(〈서천석의 마음 읽는 시간〉 중)

그리하여 구로공단이 아니라 ‘위로’공단. 당신들의 삶과 투쟁이 절대 무의미한 게 아니라는 감독의 증명. 이제라도 당신 곁에 함께 충분히 머물겠다는 관객의 약속. 결국 〈위로공단〉을 보러 간다는 건, 정말 위로가 필요한 그들에게 나의 95분을 기쁘게 선물하는 일이다.

이 글을 쓰기 전 전화를 걸었다. “엄마도 구로공단에서 일했어?” “아니, 난 평화시장에 있었지.” “엄마도 ‘시다’부터 시작한 거지?” “그렇지. 잠도 못 자고 일만 했지.” “그때가 몇 살이었어?” “그게 그러니까… 열네 살? 갑자기 그건 왜?” 나는 그렇게 나만의 〈위로공단〉을 만들기 시작했다. ‘잠도 못 자고 일만 했던’ 열네 살 ‘공순이’에게 나의 보잘것없는 시간을 선물하기 시작했다.

기자명 김세윤 (영화 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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