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를 가나 선배 세대가 후배들에 대해 불만을 터트리는 경우가 많다. ‘청년이 서야 나라가 바로 선다’는 말을 상투적으로 읊조리며 요즘 대학생이나 후배들이 너무 보수적이라고 투덜댄다. 청년이라면 자기 자신의 삶에 안주하지 말고 과감하게 사회를 위해 들고일어나 맞부딪쳐야 하지 않느냐는 불만이다. 이들이 보기에 지금 청년들은 체제에 지나치게 순응적이다.

선배 세대가 보기에 주어진 것에 순응하기만 해서는 ‘생존’과 ‘성공’은 가능할 수 있을지언정 결코 존엄한 삶은 가능하지 않다. 인간의 존엄이란 권력으로부터의 자유에서 오는 것인데 순응은 스스로의 자유에 대한 포기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존엄은, 거부하고 싸우는 자만이 누릴 수 있는 것이지 순응하는 자의 몫이 아니다. 싸우지 않는 자가 아무리 유능하더라도 그 유능은 비겁함과 다름없으며, 성공한 삶을 살더라도 그것은 비굴한 삶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대부분의 청년들은 이런 선배들의 비판에 반발한다. 자신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이다. 순응하지 않으면 성공은커녕 생존도 할 수 없는데 뭘 저항하라는 것이냐고 항변한다. 선배들이 그렇게 거부하고 저항할 수 있었던 것도 뭔가 주어진 게 있었으니 가능하지 않았냐고 되묻는다. 자신들에게는 주어진 것이 별로 없다고 말한다. 주어진 것에 순응하는 게 아니라 주어진 것이 아예 없다는 얘기다.

무엇이 없는가? 무엇보다 ‘자리’가 없다. 무엇보다 일‘자리’가 없다. 일‘자리’가 없다는 것은 우선 생계수단, 자기 삶을 기획할 수 있는 경제적 토대가 없다는 말이다. 일‘자리’의 문제는 생계수단을 넘어선다. 자리가, 사람이, 다리를 뻗을 만한 자리가 되려면 이 자리는 사람이 살 만한 공간이어야 한다. 나와 함께 청년들의 과격화 양상에 대해 연구하는 한 청년 연구원은 일‘터’의 문제라고 불렀다.
 

ⓒ박해성 그림

자리가 없다는 것은 단지 경제적·정치적으로 ‘역할’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넘어선다. 지금까지 정부는 국가의 역할이 ‘자리’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겠지만 말이다. 그 ‘자리’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서의 ‘터’가 어떤가에 대해서는 잘 묻지 않았다. 그 연구원의 말에 따르면 터의 문제는 ‘조직문화가 어떠하며’ ‘조직이 비전을 가지고 있는가’의 문제다.

‘자리’만이 아니라 ‘터’가 문제가 된다고 했을 때 첫 번째가 조직문화를 말한다. 한국의 조직문화는 무엇보다 관계의 피로도가 너무 높다. 조직 내에서의 관계가 서로의 권한과 책임을 가급적 명확하게 규정하는 방식으로 ‘합리화’되지 못했다. 대신 ‘선후배’라거나 같이 일하는 ‘동료’ 관계라는 식이다. 이 관계에서 후배는 선배에게 감정노동을 해야 하는 것을 넘어서 그것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 때 이기적이라거나 ‘싸가지’가 없다는 등의 도덕적 비난까지 받게 된다. 노동에 대한 평가가 매우 ‘도덕화’되어 있어서 관계의 피로도가 다른 어떤 사회보다 심하다.

우울·망상·공황장애가 드러내는 문제들

또한 ‘터’가 ‘비전’의 문제라고 했을 때 그 자리가 현재의 자리만을 뜻하는 게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지금 주어진 자리가 앞으로도 계속 내 자리일 수 있는지를 되묻는다. 이 물음에 대부분의 조직은 입을 다문다. 보장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 자리를 계속 확보하는 것은 조직이 아니라 개인이 풀어야 하는 문제다. 그래서 조금씩 위로 올라갈수록 ‘희박한’ 자리를 위해 피 터지는 경쟁을 해야 하고 이것이 지금 ‘청년’들에게 우울증·망상·공황장애와 같은 심각한 정신적 문제를 만들고 있다.

그러므로 터를 바꾸지 않으면서 자리만 제공하는 것으로는 이 위기를 넘어설 수 없다. 역할을 주는 것만으로는 이 사회에 대해 젊은이들이 지닌 혐오와 적대를 해소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일‘자리’가 아니라 일‘터’를 문제 삼아야 한다. 그러지 않는다면 문제의 원인이자 해결 단위가 되어야 하는 ‘사회’는 내버려둔 채 구성원들끼리 사라지고 있는 자리를 두고 서로가 서로를 원망하고 적대하는 지옥을 만들게 될 터이다. 이미 청년들은 이곳을 ‘헬조선’이라 부르고 있지 않는가?

기자명 엄기호 (덕성여대 문화인류학 강사)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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