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독립운동사는 영화 소재의 노천광과도 같단다. 온갖 영화 소재가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역사라는 뜻이야. 영화 〈암살〉을 함께 보면서 몇 번이나 물었지? “저런 사람들이 실제로 있었어?” 그때 아빠는 바람을 일으킬 듯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지. “그럼!” 실제로 있다뿐이냐? 영화보다 안타깝고 영화를 압도할 만큼 비장하며 영화처럼 부끄럽게 어처구니없고 영화 이상으로 감동적인 일들이 지천으로 널린 게 우리 독립운동사인데.

그렇다면 “영화의 주인공이 각각 누구를 모델로 한 것이냐?”라고 물으면 순간 말문이 막히네. 그건 영화 속 한 인물에도 여러 사람이 겹쳐 보이기 때문이야. 네가 크게 분노한 일본 밀정이 읊는 대사만 해도 여러 사람의 목소리가 녹아 있거든. 일본에 몸을 맡기면서 밀정이 호방하게 외치는 “물지 않으려거든 짖지도 마라”는 말은 개화의 선구자이면서도 “조선이 일본에 지배당하는 것은 당연하다”라고 했던 윤치호가 쓴 말이고, “다 민족을 위해 그런 거요”는 광복 뒤 반민특위에 끌려온 춘원 이광수가 내뱉은 변명이란다. 응징의 순간 “해방이 안 올 줄 알았지! 해방이 올 줄 알았으면 내가 그랬겠나” 하는 어이없는 항변은 바로 ‘우리말을 가장 아름답게 구사한 시인’이라는 찬사에 빛나는 미당 서정주가 한 말이기도 하거든.

영화 <암살>은 독립운동을 소재로 했다. 이정재(맨 오른쪽)는 독립군 조직에 잠입한 친일파 역을 맡았다.
오늘은 영화를 보며 무수히 스쳐 지나간 독립운동사의 영웅 가운데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려 해. 둘 다 ‘암살’을 목적으로 ‘경성’(京城)으로 스며들었던 분이란다. 먼저 김상옥이라는 분부터. 이분은 영화에 등장하는 속사포 아저씨처럼 ‘1800년대’에 태어났어. 1890년. 말발굽 만들어 팔며 가난하게 살아가면서 교회 야학에서 세상을 배우던 기독교인 중 하나였지. 그런데 나이 스물에 나라가 망하고 말았어. 1919년 3·1 항쟁에 참여했다가 여학생을 칼로 내리치려는 일본 경찰을 때려눕힌 뒤 그는 분연히 집을 떠나 만주로 향해. 그리고 바로 영화에 등장하는 약산 김원봉이 조직한 의열단에 가입하여 당시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 암살이라는 임무를 띠고 압록강을 건너온단다. “나는 자결하여 뜻을 지킬지언정 적의 포로가 되지는 않겠소” 하는 맹세를 남기고.

1923년 1월12일 밤 8시 조선 독립운동가들에게 원수의 소굴이라 할, 영화 〈암살〉에서 이정재 아저씨가 끌려간 종로경찰서에 폭탄이 떨어져. 김상옥의 거사였지. 원래 총독이 종로경찰서 앞을 지나간다는 정보를 듣고 잠복해 있었는데 총독이 나타나지 않자 폭탄을 종로경찰서에 던지고 사라져버린 거야(다른 설도 있기는 해). 이후 김상옥은 후암동의 친척집에 숨었어. 서울역에서 가까운 동네에 있다가 서울역에 행차하는 사이토 총독을 때려잡을 계획이었지. 그런데 끄나풀의 밀고로 종로경찰서 형사대에 포위돼. 경찰 14명이 집을 에워싼 상황에서 김상옥은 놀라운 사격 실력을 발휘하며 현장을 빠져나간다. 종로경찰서 유도 사범 다무라는 유도 실력을 발휘할 새도 없이 총을 맞아 죽고 두 명은 중상을 입었어.
 

ⓒ김상옥의사기념사업회김상옥(위)은 의열단에 가입해 사이토 조선 총독을 암살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나중에 자결했다.
김상옥을 잡기 위해 무장 경관 1000여 명 출동

경성은 발칵 뒤집혔어. 전 경찰력이 김상옥 하나만을 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거야. 이쯤 했으면 몸을 빼서 만주로 도망가도 좋으련만 김상옥은 오히려 사이토 총독에게 한 발 더 가까운 곳, 종로구 효제동으로 숨어들고 있었어. 하지만 안타깝게도 김상옥은 일본 경찰에 발각되고 말아. 이번에는 놓치지 않겠다는 듯 일본 경찰은 경기도 경찰부장 지휘하에 무장 경관을 무려 1000여 명이나 출동시켰단다.

김상옥은 그로부터 장장 3시간35분 동안 쌍권총을 들고 인근의 지붕을 타고 오르내리면서 1000대1로 총격전을 벌여. 영화라고 해도 리얼리티가 떨어진다고 핀잔을 들어 마땅한 상황에서 김상옥은 기죽지 않고 싸워. 총알 열한 발을 맞으면서도 일본 경찰 수십명을 죽이거나 다치게 한 김상옥은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짖고 마지막 총알로 목숨을 끊어. 당시 신문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어. “숨이 진 후에도 육혈포에 건 손가락을 쥐고 펴지 아니하고 숨이 넘어가면서도 손가락으로 쏘는 시늉을 했다.”(〈동아일보〉 호외)

다음으로 이동수라는 사람이야. 이 이름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을 거야. 이분은 1909년 12월22일 이재명 열사가 매국노의 대명사 이완용을 칼로 찔러 중상을 입힐 때 함께한 동료였어. 명동성당에서 열린 벨기에 황제 추도식에 이완용이 참석한다는 정보를 얻고 이재명·이동수 등은 명동성당 들머리에서 이완용을 기다린단다. 지금도 명동성당 언덕을 내려오면 갈림길이 있잖니. 어느 쪽으로 향할지 모르니 양쪽 모두를 지켜야 했던 거야. 이완용의 행차는 이재명 쪽으로 왔고 이재명의 칼이 번득였지.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완용은 목숨을 부지하고 이재명은 체포돼서 사형을 당해.

이완용의 인력거가 다른 쪽으로 갔다면 아마 이동수가 칼을 휘두르고 사형장의 이슬이 됐겠지. 이동수는 용케 체포되지 않고 궐석(결석)재판을 통해 15년 징역을 선고받아. 그러나 이동수는 일본 경찰이 눈에 불을 켜고 찾는 수배자의 몸으로 3·1운동에도 참여하는 등 독립운동을 행했고, 일설에 따르면 이완용의 집에 고용인으로 들어가 3년 동안이나 호시탐탐 그의 목숨을 노렸다고 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호랑이를 잡는다지만 정말로 호랑이를 잡으러 굴에 들어갈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렇게 매국노를 죽이고 싶었던 이동수는 1924년 12월20일 밤 11시30분, 그러니까 공소시효 만료를 단 37시간 앞두고 일본 경찰에 체포되고 말았단다. 37시간만 지나면 자유인으로 살 수 있었던 그는 변호사와 방청객, 심지어 일본 판사까지도 “참 안타깝다”라고 한숨을 쉬는 가운데에서도 태연했다고 해. 변호를 맡은 이인(후일 대한민국 초대 법무부 장관) 변호사가 “이런 사람이야말로 의혈지사(義血志士)로구나” 하고 감탄할 정도로.

흔히들 대한제국이 총칼 한번 들지 않고 일본에 고스란히 먹혔다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아. 황제는 사실 그랬고, 잘 먹고 잘살던 양반 귀족들 일부는 더 잘 먹고 잘살기 위해 나라를 팔았지. 하지만 나라에서 은혜를 받기는커녕 빼앗기기만 했던 사람들은 무수히 일어나서 일제에 맞서고 매국노를 처단하고 일본 총독을 노리고 십수 년을 숨어 살면서도 뜻을 포기하지 않으며 숨가쁜 삶을 살다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단다.

“매국노, 일본 놈 몇 놈 죽인다고 해방이 돼?” 하고 똑똑한 사람들이 냉소하는 동안 “그놈들이라도 죽이지 않고 어떻게 우리가 후손한테 사람이라 불리겠어?” 반문하며 그들은 총을 재고 칼을 갈았어. 오늘 우리가 우리말을 하고 우리 글을 쓰며 조상이 물려 준 성(姓)을 쓰면서 살아가는 건 바로 그들이 있었기 때문일 거야. 그분들이 불렀다고 전해지는 노래 하나를 들려줄게. 그분들의 마음을 천분지 일이나마 느낄 수 있을 거야.

“거센 바람 북만주 고향은 먼데.” 꿈에도 그리운 고향을 박차고 압록강 두만강 건너 춥고 낯선 땅을 헤매면서 그들은 때로 탄식했을 거야. “꿈 키운 내 젊음 어데로 갔나.” 때로는 전투와 죽음의 피비린내 속에서 쓸쓸해하기도 했겠지. “피로 물든 광야의 말 울음소리. 내 젊음 내 야망 찾을 길 없네.” 그러나 그들은 다시 광야의 말울음보다 더 크게 외쳤을 거야. 다음과 같이. “아아 뜨거운 피 뛰는 가슴 달랠 길 없네. 참을 길 없네 찾을 길 없네.” 그 피는 살아서 뜨겁고 심장은 북소리로 만주벌판을 울렸어. 결코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온기로, 그리고 소리로.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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