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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모자 쓴 북한의 기업가

3차 핵실험 이후 중국도 경제원조를 삭감하는 등 국제사회가 제재에 나섰지만 북한은 ‘플러스 성장’을 했다. 이 같은 경제성장의 물주 구실을 해온 세력이 있으니 시장화의 물결 속에서 북한 전역에 확산된 ‘돈주’들이다.

남문희 대기자 bulgot@sisain.co.kr 2015년 08월 11일 화요일 제41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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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모자 쓴 북한의 기업가
‘시외버스 택배’로 읽는 북한 경제
“북한은 뒤지면 다 돈이다”
돈주는 북한 시장화의 기수?




3차 핵실험(2013년 2월) 이후 북한은 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나라가 되었다. 외부 세계는 북한이 중국의 경제원조 덕분에 버티는 것으로 믿고 있었다. 이 때문에 미국은 중국을 북한으로부터 떼어놓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동안 중국이 주창해온 ‘신형 대국관계(미·중 양국이 대립 대신 협력을 강화·견지해야 한다)’를 수용할 것 같은 자세를 취하기도 했다. 이에 따라 중국은 미국 주도의 대북 제재에 동참해서 북한에 대한 경제원조를 삭감했다. 이쯤 되면 북한이 경제적으로 더 큰 어려움에 처할 것이 기대되었다. 그러나 북한 경제는 위축되기는커녕 1990년대 ‘고난의 행군’ 시기 이후 대단한 ‘플러스 성장’을 기록해왔다. 한국은행 추계에 따르면, 2013년 북한 GDP는 1.1%로 2012년(1.2%)에 이어 성장세를 유지했다.

어떻게 된 일일까. 북한 경제에 자원을 공급할 수 있는, 중국 이외의 또 다른 ‘물주’가 있다는 얘기인가? 러시아를 떠올릴 수 있지만, 북·러 관계는 아직 실질적 궤도에 오르지 못했다. 그럼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놀랍게도 ‘물주’는 북한의 바깥이 아닌 내부에 있었다. 1990년대 이후 ‘시장화 바람’을 타고 북한 사회 전역에 이미 광범위하게 포진한 ‘신흥 자본가’ 세력, ‘돈주’가 바로 그들이다.
ⓒ평양 조선중앙통신
북한은 1990년대 중반부터 시장을 허용했다. 왼쪽은 2004년 9월 평양시 통일거리시장의 내부 모습.

최근 몇 년간 한국의 북한학계는 이 돈주의 실체를 규명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어떤 이는 돈주를 북한판 고리대금업자 또는 사금융업자로 해석했다. 다른 이는 ‘사기업 경영자의 출현’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돈주가 북한 경제에서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해석이 분분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누구도 그 실체를 부인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지난 7월15일, 전경련은 여의도 전경련회관에서 열린 남북경제교류 세미나에서 이른바 ‘5대 경협 원칙(1995년 발표)’을 20년 만에 수정 발표했다. 과거의 경협 원칙은 사실상 ‘(남한의 북한에 대한) 일방적 지원과 압박’이었다. 반면 새로운 원칙은 ‘북한의 시장경제화에 입각한 자기주도적 경제개발’ 및 ‘남북한 산업의 장점 보완·발전’을 핵심으로 한다. 이날 주제 발표에 나선 최수영 한국경제연구원 연구위원은 “김정은 정권 출범 후 북한에서는 시장화와 사경제가 확산되고 있다”라며 원칙을 바꾼 이유를 설명했다. 최근 발표된 미국 의회조사국 보고서 역시 ‘북한 경제가 올해 초 약간의 성장을 보이고 있다’며 ‘김정은 정권이 비공인 소기업 및 노점상 등 지하경제를 허용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전경련과 미국 의회가 같은 시기에 북한의 사기업과 돈주를 주목하기 시작한 것이다.
ⓒ어린이의약품지원본부
휴대전화도 많이 보급돼 가입자가 300만명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


전경련과 미국 의회가 동시에 주목한 세력

지난해 10월 평화문제연구소(이사장 신영석) 주최 한·중 교류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만난 중국 훈춘시 고위 당국자한테서 귀가 번쩍 뜨이는 얘기를 들었다. 그는 함경북도 나진시의 최근 변화에 대해 언급하면서 ‘붉은 모자를 쓴 기업가’들이 많이 보인다고 했다.

중국에서 ‘붉은 모자를 쓴 기업가’란, 개혁·개방 초기인 1980년대 농촌에서 확산된 소규모 업체(7인 이하 고용) ‘향진기업’의 경영자를 가리킨다. 당시 향진기업은 명목상으로 사기업이 아니라 농촌 마을 주민들이 공동 출자해서 운영하는 ‘집체(集體)기업’이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사기업이었다. 사회주의 원칙상 당시의 중국에서는 공식적으로 ‘개인의 기업 소유’를 인정할 수 없었다. 국가(국유기업)나 마을 주민 같은 집단(집체기업)만이 기업을 소유·운영할 수 있었다. 이런 집체기업의 여러 종류 중 하나가 향진기업이었던 셈이다. 다만 중국의 평범한 마을 주민들에게는 투자할 만한 돈이 있을 턱이 없다. 어떤 방법으로든 돈을 축적하고 있었던 중국판 ‘돈주’들이 그 자금으로 사업체를 설립하고 운영하면서 형식상 집체기업으로 등록했다. 이처럼 ‘집체기업으로 위장한 민간 사기업’의 소유·경영자들을 일컬어 ‘붉은 모자를 쓴 기업가’라고 했다. 결국 위에서 나온 중국 고위 당국자의 이야기는, 북한에서도 ‘사실상의 사기업’이 확산되고 있다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었다.

감회가 새로웠다. 20여 년 전 ‘북한의 붉은 자본가’를 기사화한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1996년 6월, 북한의 김정우 대외경제협력추진위원회 위원장이 일본 도쿄에서 ‘나진선봉 경제특구 투자’ 관련 기자회견을 연 바 있다. 당시 기자회견을 취재하며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대한 북한의 높은 관심을 실감했다.

ⓒ시사IN 신선영
북·중 접경지역인 신의주에 거주하던 북한 내 화교들은 도강증만 있으면 수시로 중국에 드나들 수 있었다. 위는 중국 단둥에서 신의주로 들어갈 수 있는 ‘중국과 북한의 우의교’.

한국으로 돌아와 보충 취재를 하다 북한 당국이 시장경제에 적응하기 위해 ‘붉은 자본가’ 1000명을 육성할 계획이라는 정보를 접했다. 이때의 붉은 자본가는 해외에 파견해 시장경제를 몸으로 익히고 돌아오게 할 엘리트 요원을 일컫는 말이었다. 그런데 최근 확인해보니, ‘붉은 모자 기업가’를 뜻하는 돈주가 북한 대중에게 처음으로 의식되기 시작한 시점 역시 바로 그 무렵이었다. 북한학 연구자 이종겸은 자신의 논문 <북한 신흥 상업자본가의 출현에 관한 연구>(2008년 동국대 대학원)에서, “예전에는 ‘백두산 줄기(김일성과 함께 항일투쟁에 참여한 사람들과 그 가족)’가 잘살았는데 1995년부터는 돈 많은 사람이 잘살고 있다”라는 탈북자 인터뷰를 전하며, ‘돈주’라는 집단이 드러난 시기를 1995년으로 특정했다. 1990년대 중반 북한에서는 어떤 사회·경제적 변화가 전개되고 있었던 것일까.

당초의 북한 사회주의 경제 시스템에서는 원칙적으로 ‘돈주’라는 집단이 성립할 수 없었다. 기본적으로 국가가 식량 등 각종 생필품의 종목과 양 등을 결정해서 국영기업(공산품)과 협동농장(농산품)에 생산을 ‘명령’한다. 생산에 필요한 원자재와 에너지도 국가가 책임지고 공급해준다. 생산자들(국영기업과 협동농장)은 국가의 명령대로 만든 제품을 국유 상점에 보낸다. 국유 상점들은 정해진 가격으로 인민들에게 ‘판매’한다. 이 같은 사회주의 국가 특유의 생산·분배 시스템에서는, 돈을 좀 가졌다고 해서 투자하고 여기서 수익을 얻을 만한 여지 자체가 없다.

그런데 북한 사회주의 시스템이 서서히 삐걱거리다 1990년대 들어 사실상 멈추고 만다. 국유기업들은 국가로부터 원자재와 에너지를 공급받지 못하게 되면서 생산을 중단했다. 노동자들은 출근해봤자 할 일이 없었다. 배급이 중단되고, 국영상점에서도 살 수 있는 물건이 없었다. 이 같은 국가 부문의 쇠퇴와 더불어 ‘돈주’는 점차 강력한 경제 집단으로 등장하게 된다. ‘돈주’ 집단의 발전은 대략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다.

ⓒ평양 조선중앙통신
남포시에 있는 천리마제강연합기업소. 천리마 구역은 의류 가공, 담배 생산으로도 유명하다.



첫 단계(~1980년대 말)

‘돈주’의 기본 조건은 북한 돈, 즉 ‘조선 원화’를 많이 가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돈을 축적할 수 있었을까? 바로 북송 재일동포다.

북한은 1949년 공업 국유화를 마친다(제조업체 국유화). 1958년에는 유통업체의 국유화가 완료된다(국영상점). 같은 해, 한국전쟁 때 투입되어 북한 경제 재건을 지원해온 중국 인민해방지원군이 철수하면서 노동력 공백이 발생했다. 북한 당국은 이를 메우기 위해 재일동포 북송사업을 시작한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재일동포들이, 생산·유통을 국유화한 사회주의 북한에 시장경제의 숨구멍을 뚫는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이들이 들여온 일본제 옷과 시계, 전자제품 등을 사고팔 암시장이 형성된 것이다. 더욱이 재일동포들은 일본의 부모·친척 등으로부터 송금받은 외화를 상당히 유리한 조건으로 조선 원화와 바꿀 수 있었다. 북한 당국이 설립한 ‘외화 상점’의 고급 상품들은 외화로만 살 수 있었기 때문에 외화의 인기가 하늘을 찔렀다. 재일동포들은 북한의 노동자로서 공식적으로 받는 임금 이외에 별도로 대량의 조선 원화를 보유할 수 있었던 셈이다. 다만 돈이 있어봤자 쓸 데가 없기 때문에 재일동포들의 조선 원화는 장롱에 차곡차곡 쌓일 뿐이었다.

한편 중국의 문화혁명(홍위병들은 김일성 일가 역시 ‘반동’으로 몰아붙였다)으로 소원해졌던 북·중 관계가 1982년 재개되면서 두 번째 돈주 집단이 등장한다. 바로 중국에 친척을 둔 북한 화교들이다. 특히 이들은 1984년 중국 국무원이 친척 방문을 허용하면서 양국 간 교역의 전면에 등장하게 된다. 북·중 접경지역인 신의주에 주로 거주하던 북한 내 화교들은 도강증만 있으면 수시로 중국에 드나들 수 있었다. 이들은 북송 재일동포들이 들여온 일본산 상품을 중국으로 가져가 판매하는, 일종의 중개 무역상 노릇으로 큰 이익을 남기기도 했다. 이처럼 일본·중국과 연(緣)을 맺을 수 있었던 재일동포·화교 등이 그 특수 지위를 활용해서 상당한 규모의 조선 원화를 축적한 것이 이 시기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마이니치신문
1959년 12월 재일동포 북송선이 일본 니가타 항을 떠나고 있다.

북한의 토착 주민 가운데 돈주가 된 경우가 있다. 북한에는 국가경제(국영기업 및 국영상점, 배급)가 제대로 공급하지 못하는 물품을 인민들이 자발적으로 거래하는 ‘(자유)시장’이 존재해왔다. 농촌에서는 농민시장, 도시에서는 장마당이라고 불린다. 예컨대 농민들이 ‘비공식’적으로 생산한 농작물 등을 판매하는 곳이다. 소비자 처지에서는 배급이 끊기고 국영상점에도 생필품이 들어오지 않을 경우 농민시장이나 장마당을 이용할 수밖에 없다. 북한 당국은 필요에 따라 묵인하거나 단속해왔다. 그러나 국가가 점점 더 생필품을 제대로 공급할 수 없게 된 1980년대 말~1990년대 초의 상황에서는 장마당을 적극적으로 단속할 수 없었다. 인민들 처지에서 장마당은 식량 등 생필품을 유일하게 구입할 수 있는 장소이기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장마당에 뛰어든 북한 토착 주민들이 재일동포 및 화교와 더불어 돈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두 번째 단계(1990년~2000년대 초반)

그러나 첫 번째 단계의 돈주들은 문자 그대로 ‘돈을 가진 사람’들에 불과하다. ‘돈주’가 ‘붉은 자본가’로 불리려면, 그 돈을 어딘가 투자해서 더 늘릴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사회주의 시스템이 작동되던 1980년대까지의 북한에서는 돈을 투자할 곳이 없었다.

그런데 1990년대 중반 대규모의 아사 사태가 발생했던 ‘고난의 행군’ 시기와 더불어 ‘천지개벽’이 일어난다. 북한 당국이 배급을 중단하는 대신 시장을 허용한 것이다. 1993년 3월에는 농민시장을 상시로 열 수 있게 했다. ‘국가가 인민들의 생존을 책임질 수 없으니, 시장 거래를 통해 알아서 먹고살라’는 이야기다. 살길이 막막해진 주민들은 너도나도 시장으로 뛰어들었다. 

ⓒFlickr
평성 시내의 거리 풍경. 평양 인근의 평성은 철도 도로망이 발달해 유통의 거점이 되었다.

이와 함께 국영기업의 설비들은 원자재와 에너지를 공급받지 못해 놀고 있었다. 노동자들 역시 일거리 없는 국영기업으로 출근할 필요가 없었다. 이렇게 국가로부터 ‘자유로워진’ 설비와 노동자들을 결합시키려면 돈이 필요했다. 그 돈이 돈주의 장롱 속에 쌓여 있었다. 돈주들이 자본가로 변신할 기회였다. 축적해둔 돈을 꺼내 더 많은 돈으로 변신시킬 수 있게 된 것이다. ‘자본’이란 ‘쌓여 있는 돈’이 아니라 ‘돈을 낳는 돈’이다. 북한 당국도 돈주들이 놀고 있는 설비와 노동자들을 ‘사용’할 수 있도록 묵인했다.

일반적으로 ‘시장주의 개혁’에는 두 가지 길이 있다고 한다. 하나는 중국처럼 국가가 계획적으로 추진하는 ‘위로부터의 시장화’이고, 다른 하나는 인민들이 일상적으로 시장을 활용하고 이를 국가가 제도적으로 수용해나가는 ‘아래로부터의 변화’다. 북한이 두 번째 경우다.

1990년대 중반 이후 북한에는 생필품을 제조해서 장마당 등에 판매하는 작은 개인 기업들이 수없이 나타났다. 일거리가 없어 국영기업에서 이탈한 노동자들이 여러 명씩 짝지어 수공업 형식으로 상품을 제작한다. 이렇게 번 돈 중 일부를 자신이 등록된 공장에 내면 출근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이런 작은 개인 기업에서 생산되는 제품들이 질적으로도 꽤 우수하다는 평가다. 지난 6월30일 ㈔NK지식인연대(대표 김흥광) 등 탈북자 단체들이 주선해서 이뤄진 ‘북한 실상 설명회’에서 지난해 탈북한 인민군 외화벌이 부원 출신 조순선씨(가명)(오른쪽 상자 기사 참조)는 “최근 북한에서 품질이 나쁜 중국산 대신 평성(평안남도의 공업도시) 등에서 만든 국산을 많이 사용하기 시작했다”라고 증언했다.

돈주들은 이런 소기업에 원자재 조달 등에 필요한 돈을 빌려준다. 초기 단계의 금융자본 역할이다. 돈주들은 빌려주는 데 그치지 않고 직접 생산을 조직하기도 한다. 의류의 경우라면, 돈주가 옷감 생산자, 의류 제작자 등에게 주문을 하고 국영기업에서 빌린 차량으로 재료와 완성품을 날라서 소매상에게 도매가격으로 판매하는 방식이다. 심지어 돈주가 국영기업에서 빌린 공장에 생산자들을 모아놓고 정해진 공정에 따라 상품을 제작토록 하는 ‘매뉴팩처 단계’까지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나아가 돈주들은 기존 국영기업에 운영자금을 빌려주고 그 대가를 현물로 받거나 아예 국영기업 명의로 제품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야말로 ‘붉은 모자를 쓴 기업가’다.

이런 산업 생산은 기존의 국유 기계공장(돈주들이 공장과 설비를 빌릴 수 있다)이나 원료 산지 근처인 내륙 도시들이 주로 담당한다. 함흥·평성·순천 지역은 의약품 생산으로 유명하고 평남 남포시의 천리마 구역은 의류 가공 및 담배 생산에서 전국 1위다.

돈주들은 북한의 외화벌이에서도 존재감을 뚜렷이 나타냈다. 재정난에 처한 북한 당국은 1991년 말 새로운 무역체계를 수립한다. 대외경제위원회가 독점해온 무역 권한을 북한 내각의 각 성과 위원회, 지방자치단체인 도에 이르기까지 분산시킨 것이다. 한마디로 각자 무역회사를 만들게 해줄 테니 알아서 교역 이익을 챙기라고 한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만들어진 무역회사들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수출하려면 먼저 국내에서 상품을 매입해야 하는데 돈이 없었다. 그래서 돈주로부터 자금을 빌려 무역사업에 나섰다.

그런데 돈주들은 무역 밑천을 빌려주는 정도로 자신들의 역할을 제한하지 않았다. 오히려 국가 측의 무역회사에서 ‘와크(무역 허가증)’를 빌려 직접 무역에 나서는 형태로 나아갔다. 국영 무역회사에는 이익의 일부분을 ‘와크 대여료’로 내면 된다. 개인 사업가인 돈주가 국가기관 산하 무역회사 소속이라는 ‘붉은 모자’를 쓰게 된 셈이다. 이렇게 해서 이른바 ‘외화벌이 돈주’가 등장한 것이다.

돈주들에게 무역은 떼돈을 만질 수 있는 부문이다. 국내의 완성품을 사서 수출하는 정도가 아니라 직접 생산해서 국경 밖으로 내보내면 훨씬 많은 돈을 벌 수 있다. 예를 들어 조개양식으로 유명한 평안남도에서 씨조개 1t은 350달러다. 씨조개 1t을 잘 기르면 큰 조개 10~15t을 얻을 수 있다. 큰 조개를 수출하면 1t당 900달러 정도를 받는다. 즉, 수익을 수십 배 얻을 수 있는 사업인 셈이다.

더욱이 이 돈주들은 자본주의 사회의 사업가들처럼 위험도 직접 부담한다. 조개가 떼를 지어 이웃 갯벌로 이주해버리거나 악천후로 깡통을 차기도 한다. 게다가 북한의 현재 법률하에서는 일상적으로 불법 행위를 저질러야 하기 때문에 호위총국, 인민무력부 등의 ‘호랑이 외피’를 써야 한다. 이처럼 외화벌이는 투기성이 강하고, ‘교화벌이(투옥될 수 있는 돈벌이)’라 불릴 정도로 위험한 일이다. 그럼에도 최근 황해남도의 전체 외화벌이 사업 가운데, 개인 사업가인 돈주의 투자 비중이 무려 80%에 달한다고 한다. 국가의 직접 투자분이 20%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다(김직수 <돈주의 형성 과정에 대한 연구> 북한대학원대학교, 2012. 12).

돈주의 영향력은 유통산업 부문에서도 강력하다. ‘외화벌이 돈주’가 국경까지 물건을 들여오면, 이를 차떼기로 국내에 유통시키는 그룹이 있다. 이 대상(大商)들 역시 국영기업이 아니라 돈주다. 1인의 대상 아래 약 20명의 중간상인이 있고, 중간상인별로 또다시 20여 명씩의 소매상인이 있다고 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 북한 전역의 시장에 수입품이 조달되는 것이다.

정은이 경상대 교수가 추산한 바에 따르면, 북한의 시장은 평양에 22개 이상, 전국의 시급 도시에 48개 이상, 군급 도시에 138개 이상 등 모두 250개가 넘는다(이석기·양문수·정은이 <북한 시장 실태 분석> 산업연구원). 임을출 경남대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구글 사진으로 확인된 시장만 해도 400군데 이상이라고 했다.

더욱이 현재 북한의 시장은 생필품만 거래되는 곳이 아니다. 먹고 입는 것에서 가구, 가전제품, 자동차, 주택의 순서로 수요가 고도화되고 있다. 시장 활동을 통해 소득을 크게 높인 계층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한 최근 가뭄으로 식량난이 우려되지만 시장에 육류 등 대체 식품이 얼마든지 있어 과거처럼 먹을거리를 구하지 못해 굶어죽을 걱정은 사라졌다고 한다.

세 번째 단계(2000년대 초반~)

돈주들의 입지는 2002년의 ‘7·1 경제관리개선조치’ 이후 대체로 더욱 강화되어온 것으로 보인다. 특히 중요한 사건은 2003년의 ‘종합시장 개혁’이다. 농산품 위주의 생필품이 반(半)합법 상태로 거래되던 농민시장(장마당)을 상설화·합법화하면서 공산품을 포함한 모든 소비재를 거래할 수 있게 한 것이다. 더욱이 국영기업(실질적 소유·운영자는 돈주인 경우도 많다)의 제품은 물론 무역회사의 수입품(종합시장 이전에는 외화상점에서만 구입 가능)까지 종합시장에서 거래할 수 있도록 했다. 이를 계기로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국가가 운영해온 외화상점의 독점체계가 무너지면서 그중 80%의 경영권이 ‘명의상 소유’만 국가에 남긴 채 개인 돈주로 넘어갔다.

국영 무역회사들(돈주들이 대출이나 실질적 경영을 통해 큰 영향을 미치는)이 화교를 제치고 북한 시장에 제1의 수입품 공급자로 등장하게 된 것도 큰 변화다. 이전까지 북한 화교들은 국경을 합법적으로 넘나들 수 있는 지위 덕분에 북·중 무역을 사실상 주도했다. 이로 인해 한동안 국경 도시인 신의주의 ‘채하시장’이 북한 최대의 도매시장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화교들은 기껏해야 단둥의 도매시장에서 물건을 떼어와 뇌물을 써가며 국경을 통과하다 보니 상품의 양이 적고 부가비용 부담도 만만치 않다. 그러나 명목상의 국영 무역회사들은 중국의 현지 공장에서 대량으로 물건을 구매해 합법적으로 국경을 통과한 뒤 교통망이 잘 갖춰진 국경 대도시의 물류창고에 쌓아놓을 수 있다.

이에 따라 화교와 조선족들이 형성해놓은 신의주 채하시장 등의 무역 주도권이 평안남도 평성과 함경남도 청진 등의 대도시로 넘어갔다. 특히 평성은 수도 평양을 옆에 낀 데다 전국 각지로 연결되는 철도 도로망의 중심지라는 유리한 여건으로 단번에 북한 최대의 유통 거점 도시로 등장했다. 최근에는 이 도시의 전통적 과학기술 인프라와 중국에서 수입한 원자재를 결합한 새로운 제조업 생산지로 부상하고 있기도 하다.

7·1 조치 이후 지방의 제조업 공장들도 큰 변화를 겪었다. 예전에는 각 공장들이 국가가 정해준 생산 목표를 현물로 달성하면 그만이었다(예컨대 철강 1만t). 그러나 7·1조치 이후에는 현금 액수만 채우면 되는 액상목표 체계로 바뀌었다. 공장 지배인만 똑똑하면 외부 자금을 끌어들여 현금 목표를 채우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돈주의 자금이 이때부터 지방산업 공장들에 대부투자 내지는 명의 임대 방식으로 본격적으로 유입됐다고 한다. 2000년대 중·후반 이후로는 시장화가 더욱 진전됨에 따라 중앙의 대규모 공장들에도 돈주 자금이 본격적으로 유입되었다(<북한 시장 실태 분석> 중에서).

이처럼 국제사회의 제재 속에서도 북한 경제성장의 물주 구실을 해온 세력은 바로 시장화의 물결 속에서 북한 전역에 확산된 돈주들이었다. 김정은 시대의 북한은 생산수단의 ‘공식적 소유자’인 국가와 ‘붉은 모자 쓴 개인사업가’ 돈주의 공생체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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