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로부터 일주일 후인 6월1일 새벽, 서울 종로구 삼청동 입구에 물대포가 처음 등장했다. 6월2일 월요일 새벽 5시, MBC FM 〈세상을 여는 아침, 허일후입니다〉의 첫 곡도 ‘Sunday, Bloody Sunday’였다. 라디오의 전파만큼이나 시민의 공분도 급속도로 퍼져갔다. 또 일주일이 지났다. 6월10일, 100만 개의 촛불 틈 속에서 수많은 음악이 떠올랐다. 암울한 시대의 벅찬 갈망을 담고 있는 노래, 피 끓는 계몽으로 가득 차 있지만 즐겁고 아름다운 노래, 그리하여 지금 바로 이곳에서 울려 퍼졌으면 하는 노래였다.
역사상 가장 신나는 선동가 밥 말리
역사상, 그리고 앞으로도 가장 신나는 선동가로 남을 밥 말리의 ‘Get Up, Stand Up’이 딱 그날의 노래였을 것이다. “일어나, 일어나, 당신의 권리를 위해 싸워라”가 반복되는 이 노래는 서구의 집회에서 가장 애창되는 곡이다. 밥 말리 하면 그저 뛰어난 뮤지션으로만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현명한 운동가이기도 했다. 1978년 4월22일, 밥 말리가 자메이카의 평화를 위한 ‘원 러브 피스 콘서트’를 개최했을 때다. 당시의 자메이카는 사회주의 계열의 인민국가당과 친미 보수 정당인 자메이카 노동당, 두 세력의 반목으로 실질적 내전 상태에 놓여 있었다. 밥 말리도 1976년 인민국가당을 지원하기 위한 콘서트에서 암살자의 총에 맞고 영국으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점점 나빠지는 조국의 상황을 보다못해 귀국해 원 러브 피스 콘서트를 열었던 것이다. 공연의 막바지, 그를 보기 위해 모인 3만여 관객 앞에서 밥 말리는 외쳤다. “여기 두 분을 모시려고 합니다.” 인민국가당의 에드워드 시아가 당수와 자메이카 노동당의 마이클 맨리 당수였다.
갑작스러운 부름에 두 사람은 무대에 올랐고 밥 말리는 그들의 손을 각각 잡아 하나로 모아 다시 외쳤다. “20년 만에 자메이카에 평화가 왔습니다.” 3만 관객이 눈물 섞인 환호성을 보내며 밥 말리와 함께 ‘One Love’를 불렀다. 그때 자메이카 민중이 느꼈을 감동은 아마 6월30일, 흰 옷의 신부님들이 절정에 오른 공권력을 무력화시켰을 때 우리가 받았던 그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그런 밥 말리는 말한다. “음악으로 혁명을 일으킬 수는 없다. 그렇지만 사람들을 깨우치고 선동하고 미래에 대해 듣게 할 수는 있다.” 우리는 분명히 기로에 서 있다. 눌릴 것인가, 되찾을 것인가. 묻고 싶다. 그런 우리를 깨우치고 미래를 듣게 해줄, 지금 이 땅의 노래는 대체 어디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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