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그림

100% 관객 투표만으로 상을 주는 영화제가 가능할까? 그렇다. 오는 10월19일 SBS를 통해 중계되는 대한민국영화연기대상이다. 홈페이지에서 진행되는 네티즌 투표로 수상작을 가린다. 후보작을 정하는 예심도, 본심도 동일한 방식이 적용된다. 작품상과 감독상 외에 10개 부문은 오로지 배우를 위한 것이다.

예심이 진행되던 지난 10월 초. 크게 회자된 적이 없는 〈꽃미남연쇄테러사건〉이라는 영화가 최우수작품상 2위에 오르는 이변이 벌어졌다. 무려 7개 부문에서 본선 후보에 들었다.  1일1인1표 방식이어서 팬들이 매일 출근해 투표를 했고, 자연스럽게 누적 득표수가 많아진 것이다.   

자연스레 다른 네티즌 사이에서 ‘빠순이들은 가라’는 거친 말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팬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집중 투표를 자제하자는 움직임도 있었지만, 자신들이 무슨 죄냐고 발끈한 것이다. ‘팬들이 투표에 강한 거 모르세요? 매일 와서 투표할 수 있게 해놓고, 와서 투표한다고 우리를 욕하는 건 뭔가요?’

100% 네티즌 투표로 진행되는 대한민국 영화연기대상.

이 영화제는 ‘100% 네티즌에 의한 시상식’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한국 영화 역사에서 새로운 페이지를 썼다. 이 역사는 더한 요지경으로 전개될 수도 있었다. 출품 대상은 올해 7월30일까지 개봉된 영화들이었다. 문제의 영화 〈디 워〉는 8월1일 개봉되었다. 만약 〈디 워〉가 하루 일찍 개봉해 영화제에 출품이 되었다면? 짓궂게 이런 상상을 해보는 까닭은 〈디 워〉가 이미 극장에서 간판이 내려진 상태인데도 의견 충돌 양상이 좀체 누그러들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디빠'와 '디까'의 논쟁 2라운드

10월 중순인 지금도 포털 사이트 다음의 토론 광장 아고라에는 추천 수로 선정되는 베스트 게시물 태반이 〈디 워〉 관련 글이다. 대다수 관리자가 노출을 차단해 놓았다. 서로를 ‘디빠’와 ‘디까’, 혹은 ‘심빠’(심형래 지지자)와 ‘진빠’(진중권 지지자)로 부르면서 진행되는 설전은 새삼 2라운드를 맞은 참이다. 재점화의 계기는 김조광수 감독이 〈디 워〉 에필로그를 패러디해 만든 새 영화의 티저 광고와 미국 개봉 결과에 대한 설전, 그리고 캐나다 개봉 일정에 관한 설왕설래 등이다. 

디빠로 불리는 〈디 워〉 팬들의 열정만 대단한 것이 아니다. 이른바 ‘디까’로 불릴 법한 한 네티즌은, 혼자 무려 1000건의 댓글을 올린 것이 드러나 경악을 자아냈다. 그가 사용한 닉네임은 무려 100여 개. 한 사람이 여러 개의 닉네임을 쓰는 ‘다중닉’ 행각을 벌이다가, 다음이 아고라 게시판에 새로 설정한 ‘게시자의 다른 글 보기’ 기능을 통해 행적이 드러났다. 쓰는 닉네임이 달라도 로그인한 ID가 같아 들통이 난 것.

이 소란은 몇 가지 대목을 명확히 보여주었다. 한민족의 이름으로 이뤄내는 성취에 대한 갈증이 건재하다는 점과 동시에 그에 대한 염증의 강도가 만만치 않다는 것. 또 하나는 이른바 지식인과 대중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디 워〉를 ‘씹었다가’ 블로그에 댓글 폭탄을 맞았던 김조광수 감독은, 그 경험을 상처로 남겨두지 않고 십분 활용했다. 〈디 워〉를 패러디해 자신이 제작한 코믹에로 영화 〈색화동〉(감독 공자관)의 홍보 동영상을 만들어 공개한 것이다. “영화사 청년필름의 대표인 저는 태어날 때부터 영화제작자는 아니었습니다.” 영화 크레딧이 올라가기도 전에 심형래 감독이 ‘메시아풍’으로 스크린에 등장해 읊던 〈디 워〉의 대사들을 끌어와서 대놓고 조롱하고 나섰다. 심 감독이 할리우드를 배경으로 미국 시장 진출의 의미를 설명하던 장면은, “영화는 월드컵 경기가 아니다”라는 대사로 치환되었다.

한편 진중권씨의 유보 없는 태도는, 대중을 무시하는 거냐는 반론을 불러들였다. 진씨로부터 ‘디 빠’ 취급을 받은 개인뿐 아니라, 문화평론가 김규항과 천정환씨 등도 진중권씨의 인식이 대중에 대한 폄하와 오만한 지적 엘리트주의를 보여준다며 비판하고 나섰다. 

대중예술로 일컬어지는 영화 장르에서 벌어진 두 개의 사건, 즉 〈디 워〉 논란과 대한민국영화연기대상은 과거 전문가 혹은 지식인들이 누려온 권위에 대한 반란의 징후로 읽을 여지가 많다. 아이들(Idol) 스타 팬들의 맹활약으로 인한 돌발 상황이 아니더라도 100% 관객의 투표로 수상작이 정해지고, 배우만을 대상으로 한 영화제가 만들어져 공중파를 통해 중계될 수 있는 상황은 징후적이다.

그동안 영화제란 전문가와 종사자, 그리고 관객이 머리를 맞대고 의미있는 작품을 ‘선정’하는 일로 인식되었다. 그것이 오로지 네티즌의 투표로 대치되고, 작품 생산의 한 축이라고 할 수 있는 스태프를 수상 대상에서 통째로 배제하는 것은, 과거라면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을 게다. 올해 칸 영화제 수상작인 〈밀양〉은 아예 대상작이 아니다. 제작사가 출품하지 않겠다는 뜻을 밝혀서다.

집단 지성인가, 짚단 지성인가

과연 이 징후들이 소란을 뚫고 유의미한 활력으로 전환될 수 있을까. 진중권씨는 “오늘날 지식인은 과거에 누렸던 권위를 잃어버렸다. 이것은 진보적이다. 그들의 권위가 무너지면서 ‘논리’의 권위도 사라졌다. 이것은 반동적이다. 오늘날 대중은 과거에 누리지 못한 힘을 획득했다. 이것은 진보적이다. 하지만 그 힘은 논리로 뒷받침되지 못하고 쪽수의 물리량과 익명성의 보호막 위에 서 있다. 이것은 반동적이다(〈하나의 대한민국, 두 개의 현실〉(지승호 인터뷰집 274쪽, 시대의 창 펴냄)”라고 말했다.

그는 “지식인은 대중이 듣고 싶어하는 얘기가 아니라 들어야 하는 얘기를 해야 한다”라고 단언하지만, 적어도 넷 공간의 가능성에 관한 한 진보성과 반동성을 고루 보는 축에 속한다.

〈디워〉 파동을 겪었던 이들이 〈디워〉 패러디를 선보였다.

아예 가망없다는 선고를 내리는 이들도 있기 때문이다. 누구보다 넷 공간이 익숙한 우석훈 박사(금융경제 연구와 연구위원)는 “사이버 공간은 쓰레기통이 되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구조이다”라고 말했다.
그가 아니더라도 “웹2.0 시대의 집단 지성? 차라리 짚단 지성이라고 불러라”는 냉소와 위악도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몇몇 개인의 냉소가 아니다. 사람들이 북적이는 공간, 몰려드는 공간을 아예 피하는 이들이 늘고 있기 때문이다. 찌질한 댓글, 반대 견해가 게시된 사이트를 집단  방문해 항의하는 것으로 뜻이 변질된 ‘성지순례’ 등의 관행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소통이 무망하다는 인식이다.

그런 맥락에서 ‘뻘플(뻘소리를 담은 댓글)’의 공포를 지적하는 사람도 있다. 만화가 김태권씨는 아프가니스탄 파병 논란이 벌어졌을 때 여러 버전의 ‘뻘플’을 경험했다. 악플의 일종이라고 볼 수 있지만, 뻘플은 읽는 사람을 열받게 하는 것이 아니라 힘이 쪽 빠지게 한다고. 그는 “차라리 너, 빨갱이지? 하는 반응은 괜찮다. 예상 범위 안에 들어 있으니까. 노무현 대통령 당선 이후 입장이 분화하는 과정에서 참 이해하기 어려운 반응을 많이 접했다. 급기야 과연 대화나 소통이 가능할까, 라는 지경에 이르게 되더라”고 말했다.

실제로 넷 공간의 여론을 주도하던 이들이 포털계를 주요 무대로 삼지 않은 지는 오래되었다. 디시인사이드나 딴지일보 등 게시판형 논장의 열기 또한 예전만큼 뜨겁지 않다. 그 많던 논객은, 그 많던 폐인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대세는 블로그이다. 지난 10월4일 메타블로그인 올블로그가 집계한 바에 따르면 등록한 블로그 숫자가 10만 개를 넘어섰다. 인터넷 이용자 3000만명에 비하면 미미한 수준이지만, 블로그가 스스로 콘텐츠를 생산하고 발신하는 미디어의 성격을 재고, 진입 장벽이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꽤 역동적인 흐름이다. 올해 상반기 한국인터넷진흥원의 통계에 따르면 카페 등의 커뮤니티 이용자를 블로거나 미니홈피 가입자가 처음 앞지르기 시작했다. 3~4년 전부터 불어닥친 블로그 열풍은 이제 성숙기를 맞아 2세대 블로그 시대를 열고 있다. 네이버의 블로그와 싸이월드의 미니 홈피에 이어 최근 대세는 이글루스(www.egloos.com)에서 t스토리(www.tistory.com)로 옮아가고 있다.

블로그 사용자 숫자, 카페 이용자 추월

선풍적 인기를 끌었던 이글루스는, 최초의 블로그 서비스 군에 든다. 4년 전 (주)온네트가 시작했고, SK커뮤니케이션즈가 인수해 외연을 넓혀갔다. 이글루스는 조용하고, 긴밀한 소통의 장을 원하는 이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다. 19세 미만 가입 금지 항목이 주효했다는 의견도 있다. 다른 곳과 달리 ‘18금(禁)’을 넘나드는 내용도 웬만하면 건드리지 않았고, 텍스트 위주의 글을 쓰는 진지한 블로거들이 모여들면서 짭짤하면서도 소란이 덜한 ‘이글루스 월드’를 열어갔던 것이다. 요즘 주도권은 t스토리로 이양되는 양상이다. 다음과 테터툴즈, 구글이 연합한 t스토리 서비스는 한층 진전된 서비스들을 제공한다.

블로거들의 만족도와 자부심은 무척 높다. 이정환닷컴이라는 블로그를 운영하는 이정환씨는, 이른바 파워 블로거다. 이정환닷컴은, 1인 독립 언론이라는 블로그의 이상론에 근접한 모양새를 갖추고 있다. 〈이코노미21〉과 〈월간 말〉, 한국경제 〈프로슈머〉 등에서 기자로 일했던 그는 “한동안 우스갯소리로 ‘내 직업은 블로거다. 회사는 블로거로 살기 위해 생계비를 벌려고 다닌다’고 말하곤 했다”라고 말한다.

그는 블로고스피어(블로그들의 연대로 만들어지는 사이버 공간)를 통한 소통과 담론의 형성이 가능하다고 믿는다. 그는 “내 글에 붙은 댓글이나 트랙백을 따라가다 보면, 깜짝 놀랄 때가 많다. 전문성을 갖춘 블로거들이 많고, 그곳에서 기사의 소스를 얻는 경우도 많다”라고 말한다. 그의 블로그 대문에는 이런 카피가 쓰여 있다. ‘더 나은 세상이 가능하다.’

한편 소란과 불신의 문화를 해결하기 위한 대형 포털들의 노력도 발빠르다. 지난 10월8일 네이버 측은 댓글 시스템을 바꾼다는 공지를 띄웠다. 클린지수를 도입해 댓글 행적에 따라 점수를 매기고, 독자는 일정 점수 이하의 댓글은 아예 보지 않아도 되게끔 차단할 수 있는 블라인드 시스템을 도입한 것이다. 클린지수 출발점은 100점. 댓글을 활발히 달면서 물의를 일으키지 않는 이들의 점수는 200점까지 올라간다. 반대의 경우까지 삭감된다. 네이버는 해피블로고스피어 운동을 벌인 지 오래다. 반응은 엇갈린다. ‘아그들아, 이 형님은 클린지수가 0이다’ ‘후덜덜’. 이렇게 비웃음을 사기도 하지만, 소란스러운 댓글에 지친 이들은 이를 반기기도 한다.   

네이버 측 조사에 따르면 도배성 댓글의 25%를, 고작 0.06%의 사람들이 생산한다. 그렇다면 소수의 부적절한 행위를 통제할 수 있는 시스템을 고민해야지 댓글 문화를 혐오하거나 그로 인한 소란을 무조건 죄악시할 필요는 없는 셈이다. 

"아직도 네이버에서 블로그 하니?"

그러나 문제는 다른 곳도 아닌 네이버가 이런 운동을 펼치는 것에 골수 블로거들의 반감이 만만치 않다는 점이다.  일부 블로거들 사이에서는 ‘아직도 네이버에서 블로그 하니?’ 라는 분위기가 퍼져 있다. 네티즌 박성기씨에 따르면 ‘네이버’는 너도나도 달려드는 키워드를 말하는, 인터넷 계의 대표 ‘떡밥’ 이다. 이유는 많다. 허락 없이 내용을 통째로 퍼가는 ‘불펌’을 조장한다는 것, 자의적인 내용 삭제와 저작권 문제도 불만 사유이다. ‘게이버’ ‘인터넷 계의 국정원’ 등 네이버에 달갑지 않은 별칭들이 붙은 것도 그런 맥락에서다.  

10년 전 인터넷 민주주의라는 말이 떠돌 때부터 한 번도 그 말을 믿어본 적이 없다는 우석훈  박사는 “사이버 공간이 쓰레기장으로 변해가는 것을, 소수의 사람들이 방어하면서 지켜내고 있다”라고 말했다. “잡음을 막고, 청소를 하기 위해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아야 한다. 차라리 말자, 는 생각이 든다”라고도 말했다. 그에 따르면 상대적으로 조용했던 블로고스피어도 점점 번잡스러워지고 있다. 그는 모르는 사람들이 내 블로그에 쏟아져 들어오는 일을 한두 번 겪고 나면 “아, 짐을 쌀 때가 되었구나”라고 생각한단다.

 그러나 활력은 으레 소란을 동반하곤 했다. 소란을 뚫고 오를 수 있는 활력의 계기는 어디에 있을까.  

기자명 노순동 기자 다른기사 보기 lazysoon@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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