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국민은행(이하 국민은행)은 2008년 임금피크제를 도입했다. 58세이던 정년을 60세로 연장하는 대신 임금을 만 55세부터 5년간 50%만 받도록 했다. 정년 연장 법제화를 앞두고 임금피크제가 대안으로 제시되는 가운데, 국민은행은 임금피크제의 실제 작동 양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다.

국민은행은 5월22일부터 일주일간 임금피크제 적용 직원 1000명과 장기근속 일반 직원 4500명 등 모두 5500명을 대상으로 희망퇴직 신청을 받았다. 신청한 사람은 1121명. 임금피크제 적용 직원 1000명 중 절반에 가까운 468명이 희망퇴직을 신청했다. 은행은 “개인의 판단이다. 아무래도 특별퇴직금이 있었기에 고려하지 않았을까 싶다”라고 말하지만, 현장의 정서는 다르다.

김현정씨(58·가명)는 이번에 희망퇴직을 신청했다. 1977년 입사한 지 38년 만이다. 2002년부터 10년간 지점장으로 일했다. 지점장으로 있으면서 대회에서 상을 타고, 수년 연속 S등급을 받았다. 실적 평가가 좋아 해외여행도 몇 번 다녀왔다.

만 55세가 된 2012년부터 임금피크제 적용이 시작됐다. 이전 월급의 50%를 받으며 ‘자점검사’ 업무를 했다. 하루 3개 점포를 2시간씩 돌며 전날 서류를 검토하는 일이었다. 임금피크 대상자라면 업무능력이나 기존 성과에 관계없이 사실상 일괄 처분을 당했다. 업무 부담은 적지만 문제는 자존감이었다. “사람이 자존감이 떨어지거든요. 월급을 얼마 받느냐를 떠나서. 그런데 은행 지점을 경영하던 사람을 갑자기 뒤로 빼는 거예요. 영업을 잘할 수 있는데도 기회를 주지 않더라고요.”

ⓒ시사IN 조남진KB국민은행이 모두 5500명을 대상으로 희망퇴직 신청을 받았다. 임금피크제 적용 직원 중 절반에 가까운 인원이 희망퇴직을 신청했다.
임금피크제 적용 3년째에 접어든 올해, 김씨의 업무가 바뀌었다. 회사 측은 임금피크제 적용자들에게 자점검사를 포함한 ‘내부 통제 업무’를 부여했다. 종전에 여러 지점을 돌던 것 대신 한 지점에 머물면서 자점검사에 더해 보안사고 예방 등 직원 업무를 통제하는 일이다. “은행에서 사고가 나면 책임을 져야 해서 팀장이 맡는 중요한 자리예요. 그렇게 높은 리스크를 안고 하루 종일 일을 하면 그에 상응하는 보상이 있어야 하는데, 월급은 그대로 50%니 불만이 많았죠. 은행이 임금피크제를 만들어놓고 업무를 자기들 마음대로 바꿨어요. 마케팅하라고 했다가, 자점검사를 하라고 했다가, 내부 통제를 하라고 했다가….”

2008년 임금피크제 도입 이후 대상자들 업무는 주로 자점검사나 내부 통제였다. 김씨처럼 영업 같은 다른 업무를 하고 싶어 하는 이들에게는 사실상 선택권이 없었다. 회사 측도 만족하지 못했다. 국민은행 인력지원부 관계자는 “3개 점포를 돌아다니면 아무래도 내 식구가 아니다 보니 소속감 문제가 생겼다. 은행도 똑같은 고민을 했다. 그래서 올해 초부터 내부 통제 업무를 부여했는데, 현업을 통제하는 업무이다 보니 직원들 대하기를 껄끄러워하는 분도 있고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속 일하기에는 업무량도 적었다(직원과 회사는 노동 강도에 대한 인식 차이가 크다). 그러다 보니 지점은 ‘따로 앉아서 놀고 계시네’ 하는 느낌이 들고, 임금피크 직원 입장에선 소외감을 느끼는 문제가 있었다”라고 말했다. 노조에 따르면 영업점 금고 안이나 서고, 파쇄기 옆에 임금피크제 직원의 책상을 놓는 사례도 있었다고 한다.

임금피크제가 성공적으로 안착하려면 고령 노동자에게 맞는 직무 개발이 중요하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임금피크 대상자를 지점장과 같은 기존 보직에 두는 것은 제도 취지에 맞지 않고 인사 적체가 생겨서 조직의 활력이 떨어진다. 그렇다고 허드렛일만 주면서 자존감을 훼손시키면 노동자는 사실상 해고 압력으로 받아들인다. 노동시간과 노동강도를 임금피크제에 걸맞게 낮추면서, 고령 노동자의 경험과 숙련을 활용할 수 있는 직무 개발이 중요한 이유다. 하지만 이런 원론이 현실에서 작동하는 현장은 드물다.
 

ⓒ연합뉴스7월23일 서울역광장에서 ‘노동시장 구조개악 저지를 위한 한국노총 결의대회’가 열렸다.
임금피크제는 구조조정의 다른 이름?

국민은행과 금융산업노조 KB국민은행지부(이하 제1노조)는 지난 5월 임금피크제 개편안에 합의했다. 임금피크제 적용에 들어가면 일괄적으로 내부 통제 업무에 배치되던 데서 △일반직 △마케팅직 △희망퇴직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게 했다. 일반직이란 기존의 자점검사나 내부 통제 업무를 넘어서 일반 직원들과 같은 업무를 하는 형태다. 마케팅직은 임금피크제 급여의 50%(즉 전체의 25%)를 기본급으로 받고 나머지를 실적에 따라 최대 200%까지 메우는 형태다. 노사 합의가 있을 때 제한적으로 이뤄지던 임금피크제 직원 대상 희망퇴직도 아예 정례화하기로 했다.

이번 개편안은 기존 임금피크제 운영이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인식에서 나왔다. 희망퇴직 신청 인원이 반영되기 전인 5월 말 기준으로 국민은행 정규직 직원 2만687명 가운데 지점장·부장과 부지점장·팀장 등 중간 간부가 5213명(25.2%)으로 네 명 중 한 명꼴이었다. 임금피크제 적용 직원은 올해 1000명이 됐다. 이번 희망퇴직으로 468명이 옷을 벗었지만, 내년에 다시 400~500명이 새로 임금피크제 인원에 들어온다. 곧 다시 1000명 수준이 된다.

회사 측의 고민은 ‘활용’에 방점이 찍혀 있다. “기존 자점검사 등은 업무 효율성이나 다른 직원들과 녹아들지 못하는 측면에서 문제가 있다고 봤다. 어떻게 하면 이분들을 다양한 방법으로 활용할까 하는 고민에서 직무도 다양하게 부여하고, 현업들과 같은 업무 수행을 하면서 소속감도 더 끌어올리자는 취지다.” 제1노조 관계자도 “(기존의 느슨한 직무가) 일하는 분위기에 맞지 않으니 직무를 줘서 (임금피크제 직원을) 일하게끔 하겠다는 큰 압박이 회사 측에서 들어왔다. 그래서 막으려 하다가 ‘그럼 선택하게 하자’고 해서 나온 안이다”라고 말했다.

당사자들 생각은 다르다. 임금피크제 대상자들 사이에선 이번 임금피크제 개편과 희망퇴직 시행을 구조조정으로 인식하는 정서가 있다. 특히 종전과 달리 일선 창구에 배치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높다. 임금피크제 대상 직원들이 주로 가입한 ‘KB국민은행 노동조합’(이하 제3노조)의 배상철 위원장은 이번 개편안에 대해 “사실상 나가라는 이야기다”라고 말했다. “은행에서는 직업에 귀천이 있냐고 하지만 조직이라는 건 장기간 근무를 하면서 서열 관계라는 게 형성되는데, 지점장 하던 사람을 나이가 들었다고 출납(영업점에서 현금을 적절히 분배하는 업무. 주로 입행 시기에 맡음)을 맡게 한다는 건 모멸감을 줘서 퇴직을 유도하는 것이다. 우리는 구조조정 수단이라고 본다.”

2014년 출범한 제3노조는 조합원이 430여 명(네이버 밴드 가입자 수는 870여 명)이다. 법적으로 단체교섭 권한이 있는 제1노조는 조합원이 약 1만8000명이다(모두 희망퇴직 전 숫자). 지점장 출신이나 연배가 높은 차장급은 제1노조 조합원이 될 수 없다. 내년 임금피크제 대상자로 이번에 희망퇴직을 신청한 이용호씨(54·가명)는 “회사가 임금피크에 들어갈 당사자와 협의해야 하는데 노조(제1노조)와 협상을 하는 게 가장 문제다. 조합원이 아니니 신경을 안 쓴다. 여태 아무런 얘기 없다가 갑자기 직무를 부여할 테니 선택하라는 것은 일방적인 처사다. 제1노조라는 젊은 친구들이 임금피크제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이씨는 지점장 실적 평가 하위 20%로 밀려나 이른바 ‘후선’으로 빠진 사례다. 이미 임금이 50% 수준으로 떨어져 있는데, 임금피크제를 적용받으면 지점장 봉급의 25%를 받게 된다. “급여가 거의 최저임금 수준이거든요. 지점장까지 했는데, 그렇게 다닐 바에야 자존심이라는 게 있잖아요.” ‘후선역’ 신분으로 임금피크제 적용을 받는 이들을 제3노조는 가장 약자라고 본다. 지점 발령 자체도 파벌과 로비가 작용해 불공정하게 이뤄지는데, 경영의 책임을 지점장 개인에게 물어 임금피크제 5년치 봉급에 일괄 적용하는 것은 가혹하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배상철 위원장 역시 후선역 해당자로 임금피크제 2년차다.

제3노조는 회사 측과 제1노조에 자신들의 어려움을 수차례 전달했지만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제3노조 홈페이지에는 임금피크제 대상 직원들이 회사 측에 전달한 어려움이 절절히 적혀 있다. “직무와 역량의 괴리, 급여 수준과 근로시간의 불일치, 근로자와 조직의 생산성 인식 차이, 근로환경 열악, 임금피크 편입 후 조직의 무관심 및 정서관리 부재 등 금전적 심리적 박탈감” “막상 임금피크 들어와 보니 자존감도 상하고 문제점이 많다고 느낀다. 특히 1~2년차들의 상실감이 엄청나게 크다. 단계별 직무 부여 등 검토 요청” “후선역 생활도 가혹한데 임금피크 들어와서도 5년간 책임을 물어 급여를 삭감하는 것은 당사자에게 분노와 모멸감을 주는 것” “임금피크로 들어오면 고용불안이 없겠다고 이야기하는데 실제로는 당사자들이 느끼는 불안이 매우 크다.”

제1노조에 대한 원망도 곳곳에서 발견된다. 회사 측에서도 노조에서도 보호받지 못한다는 원망이 짙다. “경영진과 노조가 결탁(?)하여 당사자들에게 일방적 희생을 강요하는 쪽으로 진행되어가는 현실. 힘없고 보호막이 없다고 해서 임금피크 대상자들은 이리 몰리고 저리 몰리고, 차별적 대우를 받는 것이 많이 아픕니다.”

갈등 불거지는 동안 직무 개발은 없었다

제1노조는 이미 벌어진 세대 간 간격을 메우기가 쉽지 않다고 토로했다. “정년 연장과 임금피크제를 둘러싸고 영업점 안에서도 젊은 세대와 나이 든 분들 간에 갈등이 심하다. ‘나는 빨리 승진하고 싶은데, 일도 쉬엄쉬엄 하면서 연봉 1억원 가까이 받는 저분들이 나가줬으면 좋겠다’고 얘기하는 직원이 적지 않다. 노조 게시판에 ‘이번에 희망퇴직 받고 나가서 후배들 길 좀 열어주지’라고 쓰는 분도 있다.”

기존의 임금피크제가 불만족스럽게 운영됐다는 점에는 사·노·노 모두 공감하는 듯 보인다. 제1노조 관계자는 “이번 희망퇴직으로 나간 숫자가 임금피크제가 고용 안정에 도움이 되는지 아닌지를 보여준 사례라고 생각한다. 잘리는 것보다는 나았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기여했지만, 시간과 비용이 드는 직무 발굴이나 동기 부여 노력이 부족했다”라고 말했다. 배상철 위원장은 “경영진들이 적합한 직무 개발에 노력해야 하는데 그런 것 없이 일방적으로 밀어붙인다. 은행도 은퇴 관리 등 얼마든지 발굴해볼 만한 직무가 있는데도 창구로만 밀어내려 한다”라고 말했다.

정년 60세 시대를 맞아 일찌감치 임금피크제를 도입한 국민은행에서는 도입 8년째가 되도록 적절한 직무 개발이 쉽지 않아 보인다. 늘어나는 임금피크제 대상 직원을 두고, 국민은행은 임금피크제 직원이 소속감과 보람을 느끼면서 조직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하는 어려운 방정식을 풀어야 할 처지다. 다른 사업장에도 멀지 않은 얘기다. 당장 내년부터 300인 이상 대기업과 공공기관에 정년 60세법이 시행된다.

기자명 전혜원 기자 다른기사 보기 woni@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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