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노래는 존 뉴턴이라는 사람이 쓴 노랫말에 곡을 붙인 거야. 뉴턴은 열한 살 때부터 노예선을 탔고 급기야 노예선 선장이 돼서 수많은 노예를 실어 날랐다가 자신의 죄를 뉘우치면서 이 가사를 썼다고 해. 뉴턴은 한 자 한 자 써 내려갈 때마다 자신을 거쳐간 노예 수만명을 떠올렸을 거야. 짐짝처럼 노예선에 실려 아프리카가 멀어지면 황소같이 울부짖던 사람들, 옴짝달싹도 못할 만큼 빽빽이 실려 멀미에 신음하며 토사물과 배설물에 문드러져 죽어가던 사람들을. 그러면서 스스로를 돌아봤겠지.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노예무역은 막대한 이익을 낳는 거래이고 노예제도는 그 시대의 부(富)를 창출하는 원천이기에 수많은 사람이 고발했음에도 오래도록 존속했어. 영국은 뉴턴이 죽던 해(1807년) 노예무역을 폐지하고 윌버포스가 죽던 해(1833년)에는 노예제도 자체를 철폐했지만, 지구상 도처에는 인간이 인간을 태연히 노예로 부리는 죄악이 남아 있지. 존 뉴턴의 ‘어메이징 그레이스’가 지금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의 멜로디와 만난 건 1830년대라고 여겨진다. 이 노래의 멜로디는 아일랜드나 스코틀랜드의 민요라는 설이 유력하지만 아메리카 인디언 채로키족의 가락이었다는 설도 전하지.
1838년 미국 정부는 채로키 인디언에게 터전을 떠나 수천 리 떨어진 오클라호마의 보호구역으로 갈 것을 명령했어. 채로키 부족 1만5000여 명은 살을 에는 겨울을 거치며 4000명이 쓰러져 죽어간 ‘눈물의 길’을 떠나야 했단다. 그 모습을 지켜본 미군 병사 존 버넷은 이렇게 회고해. “그날 아침의 비애와 엄숙함을 잊을 수 없다. 추장 존 로스의 기도가 끝나자 나팔이 울렸다.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일제히 일어서서 고사리손을 흔들며 낯익은 산과 집에 이별을 고했다. 그들은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채로키 인디언은 채로키 말로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부르며 죽어가는 이들을 끌어안고 서로를 일으키면서 서쪽으로 서쪽으로 나아갔다지.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점차 이 노래는 죄인임을 고백하고 자신을 구원한 신을 찬양하는 원래의 뜻을 넘어서는 의미를 갖게 되었어. 인간이 인간을 차별하는 죄악에 대항하고, 인간이 다른 인간을 열등하다고 규정하는 오만에 맞서는 사람들의 노래로, 가장 어둡고 암담한 순간 홀연 눈앞을 가르는 햇살 같은 노래로, 목마른 사람의 갈라진 혀를 적시는 냉수 같은 노래의 성격을 띠기도 하지.
백인 폭력배들이 불을 질러 잿더미가 된 흑인교회 앞에서 흑인들은 이 노래를 불렀고, 소방 호스를 맞고 경찰견에 물리면서도 ‘그 은혜 놀라워’ 목이 메어 노래했어. 마틴 루서 킹 목사가 수만 군중 앞에서 “나에게 꿈이 있습니다”라고 역사적인 연설을 하던 날에도 울려 퍼졌으며,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는 시위대의 앞머리에서 울렸고, 가깝게는 세월호 유족 앞에서 미국 대학 합창단이 불러 좌중을 울음바다로 만들었지. 이렇게 두고 보면 이 노래는 단순한 새찬송가 305장이 아닌, 좀 더 많은 자유와 더 넓은 평등을 위해, 생명을 위협하는 어둠의 세력에 맞서 싸워온 인류의 친구로 자리매김하지 않을까.
“우리는 노예가 아니다”라고 외치는 2015년
이제 그만 은퇴하시라는 주변의 청에 “아프리카의 무도한 신성모독자가 어찌 말을 멈출 수 있을까!”라고 소리칠 만큼 늙어서도 피가 뜨거웠던 존 뉴턴 목사. 그가 자신이 죽은 뒤 진행된 역사를 알았다면 수만 번 화를 냈을지도 모른다. 미국 내전 때 노예제도를 지키겠다고 총을 든 남부인이 이 노래를 부를 때에도 벌컥 책상을 쳤을 것이고, 채로키 인디언이 겪은 죽음의 행진을 보면서는 이 죄를 어찌 감당할 것이냐고 펄쩍 뛰었겠지. 오늘날 세상을 굽어보더라도, 젊은 시절의 자신을 빼닮은 이들이 열등하다고 규정된 자들의 등을 쳐 돈벌이 수단으로 삼는 꼬락서니 앞에서 “주여 저 죄인들을 어찌합니까” 두 팔을 벌릴지도 모를 일이다.
산 위에서 내려다보면 서울 시내는 붉은 십자가 천지고 휘황찬란한 대리석 교회에서는 허구한 날 “나 같은 죄인 살리신 그 은혜 놀라워” 하는 찬송이 울려 퍼져. 하지만 이 찬송이 가장 절실한 사람은 교회 안보다는 밖에 있을 것 같구나. 그중에서도 아빠는 자신의 권리와 생존을 위해 전국의 굴뚝과 옥상에 올라가서 추위와 더위, 태양과 비, 그리고 외로움과 사투를 벌이는 사람들을 떠올려보고 싶네. 이 글을 쓰는 동안 무려 407일간 굴뚝에 올라가 고공농성을 벌여온 스타케미칼이라는 회사의 해고 노동자 차광호 아저씨가 농성을 끝내고 땅을 밟는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407일. 1년을 훌쩍 넘는 시간을 굴뚝 위에서 먹고 자며 하늘과 땅 중간에 떠 있던 그 아저씨의 심경을 아빠는 짐작조차 할 수 없구나. 그리고 적잖이 고맙다. 언젠가 어떤 아저씨는 크레인 위에서 몇 달 지내다가 절망감을 이기지 못하고 끝내 세상을 등진 적도 있거든.
왜 그들은 세상과 단절하다시피 그 꼭대기에 올라가야 했느냐고?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아빠는 그분들이 “우리는 노예가 아니다”라고 말하고 싶었다고 생각해. 주는 대로 받고, 시키면 따르고, 자르면 양순히 잘려서 집으로 돌아가는 노예가 아니라고 말이지. 휘청거리면서 사다리를 내려와 또다시 지상의 거친 파도에 몸을 맡겨야 할 노동자에게 아빠는 못 부르는 노래나마 불러주고 싶구나.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