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르스 초기 대응이 부실했다는 지적이 나오는 가운데 정부와 병원을 상대로 한 ‘소송 봇물’이 터질 것으로 보인다.

물꼬는 이미 트였다. 지난 6월19일 문정구 변호사(법무법인 한길·사진)는 서울행정법원에 대한민국 정부를 상대로 ‘부작위 위법 확인’ 소송을 냈다. 부작위란 수행할 의무가 있는 행위를 하지 않았다는 법률 용어다. 메르스와 관련한 첫 소송인데, 문 변호사가 직접 원고로 나섰다.

문 변호사는 헌법과 감염병 예방 및 관리에 관한 법률을 근거로 소송을 제기했다. 헌법 제34조 6항은 ‘국가는 재해를 예방하고 그 위험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또 헌법 제36조 3항은 ‘모든 국민은 보건에 관하여 국가의 보호를 받는다’고 명시해놓았다. 더 구체적인 근거는 감염병의 예방 및 관리에 관한 법률에서 찾았다. 이 법 제4조 2항에는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감염법에 관한 정보의 수집 분석 및 제공을 해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고, 제6조 2항에는 ‘국민은 감염병 발생 상황, 감염병 예방 및 관리 등에 관한 정보와 대응 방법을 알 권리가 있다’고 나와 있다.

 

ⓒ시사IN 조남진문정구 변호사(법무법인 한길)
하지만 정부는 환자 발생 19일 만에야 병원 정보를 공개했다. 문 변호사는 “19일간 정보를 제공하지 않는 정부는 법이 규정한 국민의 알권리를 위반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또 그는 “알권리를 충족시킬 시행령도 없었다. 입법 부작위다”라고 덧붙였다. 국회는 6월25일 신속한 정보공개를 의무화한 법률 개정안을 뒤늦게 통과시켰다.

메르스 확산의 진원지, 대형 병원도 소송 대상

문 변호사는 부작위 위법 확인 소송 외에 손해배상 소송을 따로 내지는 않았다. 본인이 확진자이거나 의심자로서 격리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나중에 메르스 확진자나 사망자 가족 등이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내면 유리한 판례로 작용할 수 있다. 문 변호사는 “정부의 초기 대응이 정책상 오류나 무능이 아니라 위법이었다는 사법부 판단을 받고 싶다”라고 말했다.

문 변호사의 소송을 두고 법조계에서는 해볼 만하다는 평가와 승소 가능성을 낮게 보는 평가가 엇갈린다. 하지만 소송 물꼬가 터진 만큼 확진자 등 피해자들의 소송도 잇따를 것으로 보인다. 정부뿐 아니라 삼성서울병원 등 메르스 확산의 진원지로 꼽히는 대형 병원도 소송 대상이다. 이미 대형 로펌에서는 메르스 소송 TF를 꾸렸다. 확진자뿐 아니라 자가 격리자들의 집단 소송도 예상된다. 시민단체인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경실련)이 자가 격리자들의 집단 소송을 준비 중이다. 남은경 경실련 사회정책팀장은 “메르스 의심자(자가 격리자)들은 피해 입증도 쉽지 않고 소송가액이 적어 손해배상 소송의 사각지대에 있다. 이들을 묶어서 집단 소송을 낼 계획이다”라고 말했다.

이전에도 정부를 상대로 한 유사한 소송이 있었다. 2009년 신종플루 유행 당시, 경기도 한 보건소에서 근무하던 공중보건의 ㄱ씨가 환자를 진료하다 감염된 후 정부를 상대로 3억8000여만 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이 소송은 현재 서울고등법원에 계류 중이다.

또 신종플루 백신 접종 뒤 사망한 이의 유가족 10명이 녹십자를 상대로 집단 손해배상 소송을 내기도 했다. 당시 유가족들은 소장에서 “녹십자가 만든 불량 백신이 사망 원인이었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법원은 “백신 접종으로 과다면역 반응이 일어나 사망했다는 사실을 추인하기에는 자료가 부족하다”라며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다.

이런 판례 때문에 법조계에서는 메르스 피해자들도 소송은 가능하지만, 입증하기가 쉽지는 않다는 의견이 적지 않다. 하지만 신종플루 때와 달리 정부의 메르스 초기 대응이 미숙했다는 점을 대통령도 인정한 만큼 소송 결과를 속단하기에는 이르다는 의견도 나온다.

기자명 김연희 기자 다른기사 보기 uni@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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