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가 정체의 늪에 빠져 답보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경제·사회의 양극화가 심화 일로에 있어 ‘신봉건체제’ 운운의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는데 정치는 그들만의 겉도는 게임을 할 뿐 근본적인 문제 해결에 전혀 돌파구를 뚫지 못하고 있다. 나빠져만 가는 노동환경, 빈부격차의 급속한 확대, 악화 일로에 있는 남북한 관계, 거의 모든 분야가 답답하다. 글로벌 경제라는 이름 아래 초대형 기업만 부의 축적을 가속화하고, 국민 다수를 이루는 노동은 위축되기만 한다. 토마 피케티가 나오기도 했지만, 더 과감한 이론가들이 뒤를 이을 것이다.

여당은 영남 헤게모니에 기대어 느긋하다. 사실상의 단일 야당인 새정치민주연합은 중구난방의 군웅할거로 무기력 상태로 늘어져 있다. 따지고 보면 정치 그 자체의 현저한 축소에는 변화된 환경의 영향이 없지도 않다. 북한의 미니 핵 등장으로 슈퍼 핵 미국을 업은 안보체제는 더한층 겁을 주고 있으며, 국제경제에의 편입은 무조건 심화 일로다. 그렇기에 국내 정치가 몸을 놀릴 범위는 축소되는 것 같다. 노령화와 세대별로 다른 투표 성향으로 선거 정치의 활력이 쪼그라드는 것도 무시할 수만은 없고.

백낙청·박성민·김영훈 등이 야당에 건네는 신랄한 비판

최근 나온 〈백낙청이 대전환의 길을 묻다〉는 요즘의 정치 논의를 폭넓게 정리한 책이다. 백 교수의 지론은 ‘변혁적 중도주의’. 현재의 정치 지형에서 ‘중도주의’는 이해하겠는데 ‘변혁적’이라는 수식어는 아쉬워서 붙인 것인가. 거기에 ‘후천적 분단인식 결핍증후군’이라는 신조어도 나온다. 5·24 조치의 ‘자해(自害) 효과’를 말하기도 하고.

백 교수의 책에서 정치평론가 박성민씨는 이렇게 말한다. “야당 지도자들은 맞서 싸우려는 적이 없습니다. 싸울 적이 없다는 것은 내가 누구를 대변하겠다는 게 없다는 뜻입니다. 어떤 대한민국을 만들겠다는 비전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죠.” 매우 혹독한 비판이다.

김영훈 전 민주노총 위원장도 백 교수 못지않게 신랄하다. “결국 뭘 해도 이기는 여당과 아무것도 안 해도 제1야당이 되는 이 구도를 바꾸지 않으면 어렵겠다고 생각했어요.” “…야당을 긴장하게 하는 또 다른 야당이 없어서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새정치민주연합에 혹독한 것은 그들에게 걸었던 기대가 무너졌기 때문일 터이다. 사실 그 정당은 제1야당의 기득권을 즐기고만 있는 것 같다. 국민을 위하여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정책 논의는 제쳐두고 당권 싸움, 지분 싸움, 공천 싸움만으로 세월을 보내온 게 아닌가. 어느 쪽이 지분 3, 4할을 보장하라고 노골적으로 요구했다는 보도까지 나온 판이고 보면 나눠먹기 판인 것 같다.

걸핏하면 비상대책위, 혁신위다. 물론 그런 절차를 밟을 수도 있으나 그 정당의 난맥상을 그런 위원회를 만드는 ‘정태적’ 방법으로 수습하기는 어렵다고 본다. 정당 안의 갈등은 투쟁의 용광로 속에 집어넣어 녹여내는 방식인 ‘동태적’ 방식으로 해소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중대한 어떤 쟁점을 놓고 거당적으로 여당과 치열한 투쟁을 할 때 그 투쟁의 용광로 속에서 갈등은 소각되는 것이다. 그러고도 남는 잔재의 처리는 간단하다. 당원을 수동적으로 놓아두는 게 아니라 능동적으로 참여시키는 과정이다.

근래 제1야당의 대여 자세는 미지근했다. 안보·대북 문제에 움츠러든 듯하다. 백 교수는 남북관계에서 “천안함 사건을 계기로 군부가 거의 우위에 서는 그런 정국으로 가지 않았나”라고 말하며, 문재인 대표의 태도에 아쉬움을 말한다. ‘합리적 의심’의 해소를 단념했다는 이야기 같다.

당내 잡다한 세력을 인내로서 다독거리는 것도 미덕일 수 있다. 그러나 그러는 것은 소극적 방법일 뿐이다.

앞서 인용한 김영훈씨의 말대로 제2야당의 문제도 무시할 수 없다. 또 다른 큰 야당이 나오면 아마도 활발한 정책 경쟁이 있을 것이다. 김영삼·김대중 양당 시대를 돌이켜본다. 사실 이미 같은 정당의 천정배 의원이 깃발을 들지 않았는가. 야당은 일종의 느슨한 연합정당의 성격을 갖고 여러 세력을 모아 거대 여당과 대결해야 한다. 특히 선거에 임해서는 반드시 연합을 해야 한다. 그러나 그 사이에는 각각의 투쟁도 괜찮다고 본다. 용혹무괴(容或無怪:혹시 그럴 수가 있더라도 괴이할 것이 없음). 정의당 등 진보 정당들의 재편 움직임이 있는데 그것은 별도의 이야기가 될 줄 안다.

기자명 남재희 (전 노동부 장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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