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행란씨(47)의 삶은 어릴 때부터 불행했다. 전남 신안에서 3남3녀 중 맏이로 태어난 그는 어머니로부터 끔찍한 구박을 받으며 자랐다.

“도대체 우리 엄마는 왜 그렇게 나를 미워했는지 몰라요. 까닭 없이 때리고, 혼내고…. 남들이 내 어릴 적 이야기를 들으면 ‘네 엄마 계모 아니냐’고 말할 정도였지요. 집을 나가고 싶은 마음뿐이었어요. 열여덟 살 때던가? 집에 놀러 왔던 고모를 따라 집을 나왔어요.”

고모를 좇아 인천으로 올라온 박행란씨는 나이를 속이고 공장에 들어갔다. 그때 상처가 컸는지 그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퀴퀴한 냄새 나는 다락방에서 비참하게 살았어요. 그래도 집에서 살 때보다는 나았죠.”

박행란씨가 두 번째 들어간 직장은 국제상사라는 옷 만드는 공장이었다. 몸은 힘들었어도 박씨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 국제상사 등에서 4년 정도 일할 무렵,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때 어머니가 할머니와 동생들을 데리고 인천으로 올라왔다. 박씨로서는 불행이 되풀이되는 듯했다. 당시 스물다섯 살이었던 박씨는 한 남자를 만나 결혼한다. 결혼을 빨리 한 까닭에는 어머니와 함께 살기 싫다는 점도 컸다. 하지만 결혼 뒤에도 삶은 순탄치 못했다. 남편 직장이 불안정한 탓에 박씨는 두 살, 세 살 된 아이들을 방에 가둬놓고 일을 나가야 했다. 그의 눈에 또 눈물이 고인다.

“너무 어려웠어요. ‘점프’라는 분유가 그때 3500원이었는데 그것 사먹일 돈도 없어서 밤에는 물만 먹였어요. 한 번은 일을 나갔다가 집에 들어왔더니 작은애는 자고, 큰애는 변기에 똥을 누었다가 그걸 못 닦고 그대로 잠든 거예요.”

그 뒤 직장을 그만두고 집에서 부업을 하던 박행란씨는 큰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무렵 한 아동용품 회사에서 다시 일을 시작했다. 4년 정도 다닐 무렵 6개월 동안 월급이 밀리더니 사장마저 보이지 않았다. 친구들과 처음으로 노동부를 찾아갔다. 그 뒤 사장이 나타났고 박씨는 밀린 급여 500만원을 받아냈다. 야근수당, 퇴직금 등 상당액의 급여는 결국 받아내지 못했다. 

“파업 1000일 장군이 탄생했다”

ⓒ안건모기륭전자는 2004년 8월 직원 200여 명을 해고했다. 맨 오른쪽이 박행란씨.

불행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박행란씨는 2004년 3월25일 서울 금천구 가산동에 있는 한 전자회사에 들어간다. 그 이름도 유명한 ‘기륭전자’. 2005년 8월에 ‘계약 해지’라는 명목으로 200여 명을 해고했던 회사다. 박씨도 그때 해고당한 뒤 지금까지 일터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구속도 당했고, 30일간 단식도 해봤고 3보 1배 항의도 해봤다. 심지어 서울시청 앞 조명탑과 구로역 광장 CCTV탑에 올라가 항의 농성도 벌였다. 하지만 벌써 1000일이 넘었다. 그렇게 항의를 해도 회사는 묵묵부답이다. 6월25일, 기륭전자 노동자들은 흰 옷을 입고 또다시 단식 농성에 들어갔다. 1000일이 넘는 투쟁, 혹시 너무 지쳐 포기하고 싶지 않은가 물었더니 박씨는 딱 잘라 말한다.

“한 번도 그런 생각 한 적이 없어요. 여기서 물러나면 갈 데가 없거든요. 지금까지 경찰과 구사대에게 숱하게 맞았지만, 그렇게 겉으로 난 상처는 치료하면 나아요. 하지만 마음의 상처는 치유할 수 없어요. 우리가 이기기 전에는…. 최동열 회장은 더는 못된 짓 안 했으면 좋겠어요.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용서가 안 돼요. 이 투쟁이 어서 끝나서 웃으면서 화해하고 서로 상처를 치유했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1037일째 투쟁 중인 박행란씨를 생각하니 내 눈에도 눈물이 흐른다.

기자명 안건모 (작은책 발행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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