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자 국가제소(ISD)의 망령이 한국을 휘감고 있다. 미국계 사모펀드 론스타가 한국 정부를 제소한 중재는 완전히 비밀로 진행되고 있다. 현재 알려진 소송액수는 43억 달러(약 4조6590억원)이고 정부가 이 소송에 쓴 예산만 해도 2013년 47억5000만원, 2014년 106억500만원, 그리고 추경까지 합쳐서 올해 126억원이 배정되어 있다. 이뿐 아니라 이란의 엔텍합 그룹, 아랍에미리트의 국제석유투자회사도 정부에 중재 의향서를 제출했다고 한다. ISD는 간혹 발생하는 일이 아니라 이제 모든 기업의 일상적 고려 사항이 된 느낌이다.

더구나 FTA에 들어 있는 ISD와 투자협정에 들어가 있는 ISD는 또 다르다. 정부에 불리한 결정이 나와서 정부가 이에 불복했을 때 한·미 FTA의 ISD는 보복관세를 물릴 수 있도록 했다. 론스타 사건이 벌어졌을 때는 한·미 FTA가 발효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한국·벨기에 투자협정을 근거로 했지만 앞으로는 가장 강력한 투자 조항이 들어 있는 한·미 FTA를 이용할 것이 틀림없다.

소송이라는 용어를 썼지만 별도의 국제재판소가 존재하는 건 아니다. 론스타와 한국 정부가 각각 한 명의 법률전문가(변호사)를 택하고, 이 둘이 합의한 또 한 명의 전문가, 총 3명이 중재위원회를 구성한다. 재판 과정은 공개하지 않으며 단 한 번으로 끝난다.

한국 측은 한·벨기에 투자보장협정이 한국의 국내법을 준수한 투자만 보호하도록 한 조항에 희망을 걸고 있다. 론스타는 산업자본이어서 애초에 외환은행을 인수할 자격이 없고 외환카드 주가조작 등 불법행위를 했으므로 협정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현재 증인으로 거론되고 있는 금융위원회 공무원들은 당시에 론스타의 대주주 적격성 심사를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오히려 론스타의 외환은행 인수를 적극 도왔던 사람들이다.

또 론스타가 중재 의향서에서 밝힌 것처럼 금융 당국의 외환은행 매각 승인 지연, 국세청의 과세 등이 정당한 행위인지도 쟁점이다. 론스타는 외환은행 주식을 2006년 KB금융지주, 2007~2008년 영국계 글로벌 은행인 HSBC 등에 매각하려 했지만 금융 당국이 매번 국민 정서 등을 이유로 매각 승인을 늦췄다고 주장한다. 이에 따라 주식을 제값에 팔지 못했다는 것이다. 론스타는 또 벨기에 기업이므로 한국 기업의 지분 매각으로 얻은 수익에 대해 한국에서 세금을 납부할 의무가 없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제소에서 흔히 문제가 되는 원칙은 내국민 대우, 최혜국 대우, 최소기준 대우이다. 이 중에서 최소기준 대우 위반 여부를 판단하는 건 지극히 어렵다. 국제관례에 비춰볼 때 과도한 정책인지, 아닌지를 판단해야 하기 때문이다. 과연 론스타에 세금을 부과하고 매각을 늦추도록 요구한 것이 국제관례에 어긋나지 않는 것일까? 오로지 세 사람의 판단에 달려 있다. 모든 국민이 원하는 정책이라 하더라도 국제관례에 어긋난다고 세 명의 민간인이 판단하는 순간 휴지조각이 되고 정부는 그 피해액을 현금으로 보상해야 한다. 이렇게 공공정책의 강화를 사전에 막는 것을 위축효과(Chilling Effect)라고 한다.

민간 법률가 세 명의 판단에 달린 우리의 삶과 국가의 운명

정부는 우리가 한 번도 ISD를 당하지 않았으므로 아무 문제가 없다고 주장했지만 이제 ISD는 명백한 현실이 되었다. 아무도 북한의 핵폭탄이 아직 터지지 않았으므로 문제가 아니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이미 폭탄은 째깍거리며 초읽기를 하고 있다. 현재까지 제기된 ISD의 대상은 거의 모두 공공정책이었다. 환경 규제나 식품 규제 등 공공의 이익을 위한 정부 규제는 거의 언제나 기업의 이익을 침해할 테니 이런 현상은 오히려 당연하다고 봐야 한다.

왜 공공정책의 운명을 민간 법률가 세 명의 판단에 맡겨야 하는가? 이는 공공행정의 영역을 사적인 중재에 맡기는 것이다. 2001년 아르헨티나의 예에서 보듯이 경제위기 때 국가가 취하는 긴급조치도 ISD의 대상이다. 최근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스티글리츠 교수는 ‘비밀스러운 기업인수(The Secret Corporate Takeover)’라는 칼럼을 썼다. 사실상 기업이 정부를 인수한 것이나 다름없으므로 오바마 대통령에게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에 ISD가 들어가면 안 된다는 편지를 보냈단다. 과연 이 편지가 위력을 발휘할 것인가? 글의 마지막 문장을 보면 그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미국, 유럽, 그리고 태평양의 시민들이 우렁차게 ‘No’라고 외치기를 바란다.”

기자명 정태인 (칼폴라니 사회경제연구소 소장)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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