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중에 젊은 출판인들 몇몇이 뜻을 모았다. 그들은 조그마한 스튜디오에 앉아 자신들이 축적해온 경험을 바탕으로 이런저런 문제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오로지 책만 소개하는 다른 팟캐스트와는 달랐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책을 더 팔아보겠다는 욕망이 담긴 것도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동지적 안타까움’에서 이들의 이야기는 출발했다. 올봄부터 궤도에 오른 팟캐스트 <뫼비우스의 띠지>(이하 <뫼띠>)를 누구보다 반긴 건 출판 노동자들이었다는 점이 이를 방증한다. 출판 노동자들은 SNS를 통해 ‘속 시원하다’는 소감을 털어놓았고, 제보도 아끼지 않았다. 이들의 반응은 쌤앤파커스 출판사의 성추행 문제가 불거졌을 때 절정에 달했다. 9월, “유명 출판사 상무 성추행 사건 뒤늦게 공개… 여직원 ‘수습 때 오피스텔 데려가 옷 벗으라 요구’라는 기사가 <경향신문>에 단독으로 보도되었다. 그동안 수면 아래에서만 거론되던 문제가 비로소 세상에 알려진 것이다. 오해와 불신이 거듭되는 가운데 <뫼띠>는 ‘올바른 정보’를 알리는 데 힘을 쏟았다. 이를 계기로 책이라는 외피에 가려 술자리에서나 떠돌던 ‘추문’들이 구체적인 정황 설명과 함께 <뫼띠>로 제보되었다. 박태근, 백상웅, 정유민. 세 사람의 입을 통해 드러난 출판계의 성추행 사례들은 하나같이 쌤앤파커스 못지않았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책을 만드는 인간들은 뭔가 다를 것이라는 환상’의 붕괴였다. 독자들은 기함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해결된 건 없었다. 쌤앤파커스 대표는 “그동안 상식적이지 않다고 비난받았던 저와 직원들이 보인 행동들의 이유와 진실은 오래지 않아 밝혀질 것”이라는 말을 남긴 채 출판사를 매각하고 대표직에서 물러났다.
한편 개정된 도서정가제의 시행을 앞두고는 진풍경이 연출되었다. 가뜩이나 안 팔리는 책이 개정된 도서정가제로 인해 더욱 안 팔릴 거라는 전망과 이후로 책값이 비싸질 거라는 낭설이 시행 전부터 나돌더니 급기야 출판사와 독자가 한마음 한뜻으로 책을 팔고 샀다. 이런 말이 어떻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것은 목적을 상실한 ‘판매·구매’처럼 보였다. ‘저들을 믿을 수 없으니 살(팔) 수 있을 때 사(팔)자’라는 것이 전부였다. 독자들 눈에 출판사들은 ‘이익을 위해 담합을 서슴지 않는 이기주의적인 집단’이었고, 출판사들이 보기에 독자들은 ‘싸거나 남들이 사는 책이라면 우르르 몰려가는 몽매한 존재들’이었다.
도서정가제가 시행되고 나흘 뒤에는 마치 총체적 난국의 출판계를 상징하는 듯한 사건이 벌어졌다. 김영사가 출간한 밀리언셀러 <정의란 무엇인가>(이하 <정의>)를 와이즈베리가 재출간한 것이다. <정의>의 출판권 계약 종료를 앞두고 김영사가 처음 선인세(약 2300만원)의 10배인 20만 달러(약 2억원)를 제시했으나 이보다 많은 금액을 제시한 와이즈베리가 출판권을 가져갔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와이즈베리는 보도자료를 통해 “새로운 번역과 감수, 해설을 보완해 재출간한다”라면서 “원문을 독자 수준과 눈높이에 맞춰” (김영사판 <정의>보다 이해하기 쉽게) 번역했음을 강조했다. 이에 대해 김영사도 이례적으로 반박 보도자료를 내며 “타 출판사가 성공적으로 출판한 책을 거액을 투자해 출판권을 가져가는 데는 성공했지만 출판사 고유의 메시지와 출판 정신을 담으려고 했는지에 대해 질문하게 한다”라고 비난했다. 하필 이 책의 제목이 <정의란 무엇인가>였다는 점, 해당 저자의 후속작이 와이즈베리에서 출간한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었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섣부른 희망도 먹구름 같은 절망도 현재의 상황을 타개하는 데는 도움이 될 것 같지 않다. 이 글을 끼적이는 내내 희망도 절망도 없이 묵묵히 써나갈 뿐이라는 어느 작가의 말이 부쩍 자주 머릿속을 맴돌았다. 희망도 절망도 없이 묵묵히. 책을 만들고 있는 지금의 내 심정은 그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