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한 해, 자사 책을 되사들이는 사재기와 해외 유명 작품에 대한 과다 선인세 논란으로 홍역을 치른 출판계를 기다린 건 편법 할인이었다. 2014년 1월, ‘초감성 에세이’를 표방한 도서 한 권이 출판계를 달궜다. 문학평론가 정여울씨가 유럽을 돌아보고 나서 쓴 책이다. “중요한 것은 ‘유럽’이 아니라 ‘여행’ 자체”라는 깨달음을 전하겠다는 의도로 쓴 듯한 이 에세이는 출간되고 한 달이 채 지나기도 전에 교보문고 베스트셀러 목록의 최상단에 올라섰다. 저자의 진의와 필력에 독자들이 감탄했기 때문일까. 그럴 수도 있지만, 내가 보기엔 다른 이유가 큰 것 같다. 해당 도서는 출간과 동시에 인터넷 서점에서 반값에 판매되었다. 1만5800원짜리 책이 7780원 할인된 가격에 팔렸다. 출판사가 이 책을 실용서로 분류해 시장에 내놓았기 때문이다. “발행일로부터 18개월이 지나지 않은 책은 19% 이상 할인할 수 없다. 단 실용서는 제외”라는 도서정가제 법에 따른 것이다. 정여울씨의 책만이 아니다. 실용서란 “주로 실무에 관계된 실용적인 내용의 도서, 실생활에 활용할 수 있는 도서, 수험 서적” 등을 말한다는 기준으로 볼 때 ‘어째서 이게 실용서지?’ 하고 고개가 갸웃거려지는 책들이 출간되자마자 반값 할인으로 높은 판매고를 기록했다. 그중에는 <오즈의 마법사>나 <셜록 홈스> 같은 고전문학도 있었다. 책을 ‘싸게’ 팔려는 출판사들의 ‘노력’에 독자들은 적극적으로 호응했다. 독자들이 마땅치 않아 했던 건, 책을 싸게 파는 걸 마땅치 않게 보는 나 같은 업자들이었다.

ⓒ시사IN 신선영 도서정가제를 앞두고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 진열대에 할인 행사를 알리는 알림판이 세워져 있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출판사들의 사정은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동아일보> 출판팀이 금융감독원 전자공시 시스템을 통해 빅4 출판사(김영사, 문학동네, 민음사, 창비)의 경영 상태를 분석한 결과 지난해 빅4 중 3곳의 당기순손실 합계가 약 31억원에 달했다”라는 기사에서 알 수 있듯 베스트셀러를 여러 권 만들어낸 대형 출판사들조차 어려움을 맞았다. 단순히 과도기적 현상으로 받아들이기에는 침체를 반등시킬 만한 계기를 찾기가 쉽지 않아 보였다. 불똥은 출판사 직원들에게도 튀었다. 지난 4월, <한겨레>가 단독으로 보도한 “중앙북스, 전체 직원 40% 사직서 쓰게 해, 민음사, 직원 6명 해고했다 논란 일자 철회, 출판편집자 40명 중 절반 이상 해고 경험”이라는 제하의 기사에 따르면 큰 몸집을 감당하기 힘들어진 출판사들에 본격적으로 감원 바람이 불었다. 하지만 이렇다 할 논의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다 같이 힘을 합치고 지혜를 짜내서 이 위기를 벗어나보자는 사해동포적 마인드 같은 건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예전 같으면 손가락질받았을 만한 편법을 동원해가며 제 살길만 찾기 바빴다. 이제는 동종업계 종사자든 언론이든 누가 뭐라 해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다는 분위기 정도가 과거와 다르다면 다른 점이었다.
 
ⓒ시사IN 신선영 쌤앤파커스(위)는 사원 성추행 문제로 논란을 빚었다.
<뫼비우스의 띠지>가 벗겨낸 출판계 추문들

와중에 젊은 출판인들 몇몇이 뜻을 모았다. 그들은 조그마한 스튜디오에 앉아 자신들이 축적해온 경험을 바탕으로 이런저런 문제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오로지 책만 소개하는 다른 팟캐스트와는 달랐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책을 더 팔아보겠다는 욕망이 담긴 것도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동지적 안타까움’에서 이들의 이야기는 출발했다. 올봄부터 궤도에 오른 팟캐스트 <뫼비우스의 띠지>(이하 <뫼띠>)를 누구보다 반긴 건 출판 노동자들이었다는 점이 이를 방증한다. 출판 노동자들은 SNS를 통해 ‘속 시원하다’는 소감을 털어놓았고, 제보도 아끼지 않았다. 이들의 반응은 쌤앤파커스 출판사의 성추행 문제가 불거졌을 때 절정에 달했다. 9월, “유명 출판사 상무 성추행 사건 뒤늦게 공개… 여직원 ‘수습 때 오피스텔 데려가 옷 벗으라 요구’라는 기사가 <경향신문>에 단독으로 보도되었다. 그동안 수면 아래에서만 거론되던 문제가 비로소 세상에 알려진 것이다. 오해와 불신이 거듭되는 가운데 <뫼띠>는 ‘올바른 정보’를 알리는 데 힘을 쏟았다. 이를 계기로 책이라는 외피에 가려 술자리에서나 떠돌던 ‘추문’들이 구체적인 정황 설명과 함께 <뫼띠>로 제보되었다. 박태근, 백상웅, 정유민. 세 사람의 입을 통해 드러난 출판계의 성추행 사례들은 하나같이 쌤앤파커스 못지않았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책을 만드는 인간들은 뭔가 다를 것이라는 환상’의 붕괴였다. 독자들은 기함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해결된 건 없었다. 쌤앤파커스 대표는 “그동안 상식적이지 않다고 비난받았던 저와 직원들이 보인 행동들의 이유와 진실은 오래지 않아 밝혀질 것”이라는 말을 남긴 채 출판사를 매각하고 대표직에서 물러났다.

한편 개정된 도서정가제의 시행을 앞두고는 진풍경이 연출되었다. 가뜩이나 안 팔리는 책이 개정된 도서정가제로 인해 더욱 안 팔릴 거라는 전망과 이후로 책값이 비싸질 거라는 낭설이 시행 전부터 나돌더니 급기야 출판사와 독자가 한마음 한뜻으로 책을 팔고 샀다. 이런 말이 어떻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것은 목적을 상실한 ‘판매·구매’처럼 보였다. ‘저들을 믿을 수 없으니 살(팔) 수 있을 때 사(팔)자’라는 것이 전부였다. 독자들 눈에 출판사들은 ‘이익을 위해 담합을 서슴지 않는 이기주의적인 집단’이었고, 출판사들이 보기에 독자들은 ‘싸거나 남들이 사는 책이라면 우르르 몰려가는 몽매한 존재들’이었다.
 

ⓒ연합뉴스 와이즈베리에서 재출간된 <정의란 무엇인가>의 행사 참여를 위해 마이클 샌델(왼쪽) 교수가 방한했다.
왜 하필 그 책이 <정의란 무엇인가>였을까

도서정가제가 시행되고 나흘 뒤에는 마치 총체적 난국의 출판계를 상징하는 듯한 사건이 벌어졌다. 김영사가 출간한 밀리언셀러 <정의란 무엇인가>(이하 <정의>)를 와이즈베리가 재출간한 것이다. <정의>의 출판권 계약 종료를 앞두고 김영사가 처음 선인세(약 2300만원)의 10배인 20만 달러(약 2억원)를 제시했으나 이보다 많은 금액을 제시한 와이즈베리가 출판권을 가져갔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와이즈베리는 보도자료를 통해 “새로운 번역과 감수, 해설을 보완해 재출간한다”라면서 “원문을 독자 수준과 눈높이에 맞춰” (김영사판 <정의>보다 이해하기 쉽게) 번역했음을 강조했다. 이에 대해 김영사도 이례적으로 반박 보도자료를 내며 “타 출판사가 성공적으로 출판한 책을 거액을 투자해 출판권을 가져가는 데는 성공했지만 출판사 고유의 메시지와 출판 정신을 담으려고 했는지에 대해 질문하게 한다”라고 비난했다. 하필 이 책의 제목이 <정의란 무엇인가>였다는 점, 해당 저자의 후속작이 와이즈베리에서 출간한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이었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섣부른 희망도 먹구름 같은 절망도 현재의 상황을 타개하는 데는 도움이 될 것 같지 않다. 이 글을 끼적이는 내내 희망도 절망도 없이 묵묵히 써나갈 뿐이라는 어느 작가의 말이 부쩍 자주 머릿속을 맴돌았다. 희망도 절망도 없이 묵묵히. 책을 만들고 있는 지금의 내 심정은 그러하다.

기자명 김홍민 (북스피어출판사 대표)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