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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자는 가장 꼼꼼히 읽는 첫 독자”

임지영 기자 toto@sisain.co.kr 2014년 10월 20일 월요일 제38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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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작이 곧 달문을 의미하는 건 아니다. 그렇더라도 놀라운 수치다. 달문이 아니면 의뢰가 이어질 리도 없다. 올해, 번역가 노승영의 이름을 달고 나온 책만 13권이다. <이렇게 살아가도 괜찮은가> <로드사이드 MBA> <숲에서 우주를 보다> <만물의 공식> <철학 한입 더> 등 분야를 막론한다. 7년차 번역가인 그는 지금까지 39권을 냈다. 출판계 동료들은 “인문학 전반과 과학 분야에서 일정 이상의 수준으로 번역을 해낼 수 있는 역자는 소수다. 그중에서도 그가 눈에 띈다” “양서를 꾸준히 번역하면서 정확하고 유려한 번역으로 많은 독자의 호응을 얻었다”라며 그를 올해의 번역가로 추천했다.

배수아·김명남의 이름도 등장했다. 각각 ‘읽는 맛을 살리는 동시에 글의 아름다움까지도 추구한다’는 점, ‘과학 분야에서 저자만큼이나 신뢰할 수 있는 번역가’라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다. 공교롭게도 이들 세 명은 경기도 일산 인근에 가까이 산다. 얼마 전에는 함께 모이기도 했다. 일산동구 중산마을 입구, 번역가 노승영의 작업실을 찾았다. 한 달 전쯤 집 앞 상가 건물 2층에 마련한 자리다. ‘허브 다이어트’라고 쓰인 간판이 아직 그대로였다.

 
  <div align = right><font color=blue>ⓒ시사IN 이명익</font></div>번역가 노승영씨(위)는 대학에서 영문학을, 대학원에서 인지과학을 공부했다. 컴퓨터 회사와 환경단체에서 일하기도 했다.  
ⓒ시사IN 이명익
번역가 노승영씨(위)는 대학에서 영문학을, 대학원에서 인지과학을 공부했다. 컴퓨터 회사와 환경단체에서 일하기도 했다.
올해에만 13권의 책이 나왔다. 어떻게 가능했나?
묵혀놓았던 원고가 올해 나왔을 뿐이다. 보통은 1년에 5권 정도 번역한다. <대중문화 오천년의 역사>는 번역한 지 좀 됐다. 시기를 타는 책들이 아니어서 출판사 일정에 따라 미뤄지는 경우도 있다.

영문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서 인지과학을 공부했다. 컴퓨터 회사와 환경단체 이력이 특이한데, 번역은 언제부터 관심을 두었나?
중학교 때 (학습)전과 같은 걸 보면 번역문이 나와 있는데 나 같으면 그렇게 안 하고 이렇게 하겠다고 생각했다. 영문학과에 입학할 때부터 번역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고, 언어학을 부전공했다. 언어학·철학·심리학 등이 다 합쳐진 게 인지과학이다. 다양한 분야를 공부하고 싶어서 그쪽을 전공했다. 컴퓨터 회사는 언어학과 선배가 차렸다. 번역 사전을 만들기 위한 데이터베이스 작업을 했다. 환경에 관심이 있어서 환경운동연합에서 3년 정도 활동가로 일했다.

본격적으로 번역에 뛰어든 계기는?
번역가 강주헌 선생의 수업을 들었다. 번역 작가 양성 과정이다. 전에는 어떻게 번역을 시작해야 할지 몰랐다. 그 수업을 듣고 출판사랑 연결되었다. 강주헌 선생이 펍헙(pubhub)이라는 번역 그룹을 만들어 거기에 속해서 같이 책도 찾았다. 첫 책은 2007년 출간된 <페이퍼 머니>다.

한 달에 얼마나 번역하는지. 고료는?
200자 원고지로 한 달에 한 800~900장 작업한다. 책 한 권이 대략 2000장짜리라 2~3개월 걸린다. 양이 많은 건 3500장짜리로 5개월 정도 걸린다. 처음 번역하는 이들은 장당 3500원 정도 받는다. 많이 받는 분들은 장당 6000~7000원 정도라고 들었는데 나는 아직 그 정도는 아니다.

번역가의 하루는 어떤지 궁금하다.
애들이 초등학생이라 아침에 학교 가는 거 도와주고 같이 나온다. 11시까지 일하다가 집에 들어가 청소를 하고 점심을 먹고 오후에 다시 나와서 일한다. 애들이 태권도나 피아노 학원에 갔다가 사무실에 오면 한 시간 정도 있다가 같이 저녁 먹는다. 나와서 일하기 전엔 딱히 시간 구분 없이 일하곤 했다.
 
  노승영씨는 인문학 전반과 과학 분야의 책을 주로 번역한다. 위는 그가 한국어로 옮긴 책들이다.  
노승영씨는 인문학 전반과 과학 분야의 책을 주로 번역한다. 위는 그가 한국어로 옮긴 책들이다.
번역한 책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은?
작업하면서 가장 재미있었던 건 이매진 출판사에서 나온 <일>이다. 미국의 1960년대 갖가지 직업을 가진 이들의 구술사를 푼 책인데 삶에 대해 배울 수 있었다. 입말을 그대로 옮긴 거라서 재미있게 작업했다. 좋은 책이다. <대중문화 오천년의 역사>는 내가 골라 출판사에 제안해서 냈다. 잘 몰랐는데 해보니까 예전 고대 수메르어를 영어로 번역한 글들도 있고 라틴어나 고대 영어가 나와서 어렵더라. 굉장히 애먹었다. 번역은 할 때마다 제일 어려운 것 같다. 항상 새롭고 어려운 게 나온다.

외서 출판을 제안하기도 하나?
번역 그룹 펍헙이 저작권 에이전시 역할도 한다. 출판사는 번역 여유 기간을 많이 주지 않는다. 판권 계약을 하면 빨리 책을 내야 하기 때문에 보통 몇 달 안에 끝마쳐야 한다. 정말 탐나는 책을 놓칠 때도 있다. 그럴 때는 기획도 같이 하는 게 도움이 된다.

번역의 매력은?
독자로서의 위치를 유지하면서 책을 만든다는 매력이 있다. 최초의 독자가 되는 거고 가장 꼼꼼히 읽는 사람이 되는 거니까. 강주헌 선생의 경우 굉장히 빨리 한다. 오래 붙들고 있는다고 좋은 번역은 아니다. 생각의 흐름을 글로 옮겨야 하기 때문에. 약간 신들린 것 같은 상태에서 하는 게 좋을 때가 있다.

좋은 번역이란?
번역은 서비스라고 생각한다. 대부분 영어를 할 줄 알기 때문에 원서를 읽을 수는 있다. 그런데 사전 찾아보는 것도 시간이 많이 걸리고 문화적인 배경도 알아야 한다. 여러 가지 뜻이 있어서 관련 자료도 찾아봐야 한다. 독자 개개인이 하면 시간 낭비니 번역자가 해서 만들어주는 것이다.

그만두고 싶을 때가 있었나?
번역료가 제때 안 들어오던 초창기에 그랬다. 보통 책이 나온 다음에 번역료를 받았다. 몇 년째 못 받는 경우도 봤다. 번역료는 10년 전이나 비슷하다. 지금은 계약금 형태로 먼저 받고 출간 후에 나머지를 받는다.

번역하는 책 말고도 책을 많이 읽나?
다양한 책을 번역하니까 여러 분야 지식을 공부한다. 요즘은 과학이 재미있다. 책에서 좋은 표현들을 배우기도 한다. 번역가는 언어학자가 될 만한 자질이 있는 사람들인 것 같다. 비교언어학을 매번 하는 거니까. 그리고 두 언어에 대해 성찰하게 되고…. 그런 것들도 재밌더라.

번역에서 중요한 건 무엇인가?
영어를 잘 이해하는 것보다 한국어로 된 책을 읽고 친구들한테 쉽게 설명해주는 능력이 오히려 더 필요한 것 같다. 우리가 잘 모르는 게, 번역할 때 단어 대 단어의 의미가 맞는지 생각하는데 책 속에는 저자의 전략이 들어 있다. 설득하고 이해하기 위한 전략을 포착해야 한다. 독자들이 봐도 잘 모른다. 잘 읽히고 이해가 되고 그런 차이가 있다. 기계적 직역이라고 하는데 글자만 한글이지 한국어라 보기 힘든 문장도 있다. 자기가 원서를 제대로 이해하더라도 그걸 표현하는 것은 또 다른 영역이다.

번역 일은 외로운 작업일 것 같다.
사람들과 교류를 잘 하지 못하니까 외로운 직업인 건 맞다. 그래서 번역가들이 SNS를 열심히 한다. 온라인상에서 소통을 많이 한다. 나도 번역하다가 언어에 대한 생각, 한국어나 영어에 대한 생각이 떠오르면 그 단상을 쓴다.

한국에서 번역가로 살아가기는 어떤가?
일반 독자들은 번역을 부차적인 존재로 생각하니까 요구하는 것도 좀 다르다. 작가가 쓴 걸 왜곡하지 말고 전달해달라는 분들이 대다수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딱딱하게 쓰지 말고 쉽게 풀어서 쓰라고 한다. 오역 문제가 가장 크다. 아예 없을 수는 없는데 오역하면 요새는 그것들을 공개적으로 지적당하니까 스트레스를 받는 것 같다.

카뮈 번역 논쟁에 대한 생각은?
내용은 모른다. 다만 태도에서 다른 사람의 번역을 공격하면서 그걸 책의 홍보 수단으로 삼은 건 좀 바람직하지 않다는 느낌이 있다. 당사자에게 공감하는 부분도 있다. 카뮈에 빙의해서 번역한다고 했는데 번역가들은 저자의 머릿속에 들어가서 한국어로 쓰면 어떨까 상상하곤 한다.

번역을 시작하는 이들에게 조언한다면.
책을 많이 읽어라. 번역 시작하고 읽으려면 늦으니까. 나는 이것저것 하지만 자기 분야를 하나쯤 갖고 있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러면 편집자와 얘기할 때도 거기에 대해 전문가로서 조언도 해주고 신뢰를 쌓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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