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부상은 세계적일 뿐 아니라 세기적인 주제가 되고 있다. 미국·유럽·일본 어디를 다녀도 국제정치의 주요 담론은 단연 중국 굴기(崛起)다. 얼마 전 중국의 난징 대학, 저장 대학, 그리고 상하이 후단 대학의 초청을 받고 이들 대학의 저명한 국제관계 전문가들과 허심탄회하게 토론할 기회가 있었다. 대화에서 얻은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중국 굴기에는 대전략이 없다. 능동적 외교정책이 없고 외부의 자극에 반사적 대응이 있을 뿐이다. 또한 중국의 외교정책은 일관성이 없고 간혹 모순적인 행보를 보인다. 이게 현지에서 본 중국의 모습이었다. 현지 전문가들은 오히려 나에게 중국이 가야 할 길을 묻었다. 2010년 한국에서 출판한 〈중국의 내일을 묻다〉라는 나의 졸저가 중국에서 〈중국 굴기 대전략〉이라는 책으로 번역·소개된 바 있어서 그런 게 아닌가 한다. 나는 고대 중국의 사상가 순자(荀子)에서 중국이 갈 길을 찾고자 했다.

순자는 대국의 성격을 왕권, 패권, 그리고 강권(强權)으로 구분한다. 여기서 왕권은 천하(또는 세계)를 아우르는 지도력이고, 패권은 천하의 일부에 대한 지배, 그리고 강권은 그 밖의 국가들에 강압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말한다. 칭화 대학의 옌쉐퉁 교수에 따르면 왕권을 가진 국가가 지배하면 국제질서가 안정을 이루는 반면, 강권을 가진 국가끼리 경합하다 보면 국제질서가 혼탁해진다. 반면 패권의 경우, 패권국에게 평정된 지역은 안정을 이룰 수 있으나 기타 경합 지역에서는 혼란이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좀 더 구체적으로 왕권의 길, 즉 왕도는 도덕과 규범으로 국제질서의 안정을 도모한다. 법과 원칙에 의거해 국제적 신뢰를 확보하고, 공공재를 제공함으로써 국제사회의 존경과 정통성을 얻어내는 것이 왕도다. 덕치(德治)라는 도덕적 리더십이 왕도의 기본인 셈이다. 엄격히 말해 왕도는 노자가 주장했듯이 “약자를 부양하고 강자를 억제하며 도덕으로 사람을 복종케(王者要扶弱抑强 以德服人)” 하는 것이라 하겠다.

한편 패권의 길, 즉 패도는 일반적으로 하드 파워와 같은 물리력에 기초해 세력 균형의 논리에 따라 자신의 세력권을 구축하고 그 안에서 맹주로 군림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경우, 힘의 우세만으로는 불충분하며 주변국들을 동맹이나 우호·협력국으로 끌어들일 수 있어야 한다. 역사적으로 패권은 전형적인 강대국 정치다. 힘은 있으나 도덕이 없는 국가의 적나라한 행태가 강권이다.

순자의 위계질서적 국제정치 이론에서 보면 오늘의 중국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중국의 부상과 더불어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패권적 행보다. 시진핑의 신형대국관계론이 바로 그것이다. 이제 중국은 미국의 ‘아시아 회귀(pivot of Asia)’ 전략에 맞설 용의가 있다는 출사표이기도 하다. 해상통로 안전문제를 중심으로 한 미·중 간의 신경전, 센카쿠(조어도)를 둘러싼 중·일 갈등, 그리고 방공식별구역과 관련된 공세적 행동들은 이러한 패권적 경합의 면모를 드러내고 있다. 중국이 주변국과 친선을 도모하고 성의를 다하며 혜택을 주는 동시에 관용을 베풀겠다는 친성혜용(親誠惠容) 정책을 적극적으로 펴는 것도 역내 세력권 확대를 위한 포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왕도·패도·강권의 길을 동시에 추구하는 중국

또한 중국은 물리력에 기초한 강권적 행동도 보인다. 남중국해와 관련한 중국의 행태가 바로 그것이다. 국제법이나 다자주의 틀 속에서 평화적으로 분쟁을 해소하기보다는 고압적이고 일방적인 무력 행사에 의존하는 경향을 보여준다. 스카보러 섬(중국명 황옌다오)을 둘러싼 필리핀과의 충돌, 난사군도의 피어리크로스 암초(중국명 융수자오)에 시멘트로 인공섬을 만드는 행위 등은 다분히 대국이 아니라 소국의 강권적 모습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런 행동이 바로 미국과 일본의 개입을 정당화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 왕도의 면모도 찾아볼 수 있다. ‘일대일로’라는 신(新)실크로드 구상을 통해 아시아 전역에 새로운 인프라를 깔고 이를 위해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을 세우는 노력은 분명히 왕도에 해당한다. 그뿐 아니다. 중국은 유엔 평화유지군(PKO)을 가장 많이 파견한 국가이고 최근 네팔 지진 참사 때도 가장 신속하게 구조대를 보낸 바 있다. 게다가 개발도상국에 대한 원조도 다른 선진국 못지않게 적극적으로 기여한다. 이는 책임 대국에 걸맞은 왕도의 행보라 하겠다. 이렇게 보면 현재 중국은 왕도·패도·강권 이 세 가지 길을 동시에 추구하고 있는 듯하다. 답은 패권이나 강권의 길이 아니라 왕도에 있다.

기자명 문정인 (연세대 교수·정치외교학)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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